00512 소유한다는 것 =========================================================================
“오빠, 표정이 엄청 밝아요.”
송하나가 앉자마자 대뜸 꺼낸 말에 한서진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래? 난 잘 모르겠는데? 뭐 달라진 게 있나?”
“아니에요. 진짜 밝아지셨어요. 연구하시던 게 잘 풀리셨나 봐요.”
그런 걸 캐치하는 걸 보면 약혼녀 눈치가 귀신이기는 한가 보다. 한서진은 기분 좋게 피식거리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제 드디어 큰 산을 넘은 것 같아.”
“와, 정말요?”
“몇 년 동안 내 골치를 썩이던 문제가 있었는데……. 이제 해결됐거든. 앞으로는 일이 잘 풀리는 것만 남았어.”
“축하해요. 정말 잘 됐어요.”
송하나는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주었다.
“그럼 이제 에테르학회가 본격적으로 출범하는 건가요?”
“응? 에테르 학회라니?”
“모르세요? 요즘 니트론 교수님을 중심으로 여러 분들이 학회를 새로 꾸리고 계세요. 오빠 자리도 만들어놓고 어서 참여하시기만 기다리시던데요?”
“이 양반들이 하라는 맷돌질은 안 하고 엄한 짓만…….”
저도 모르게 튀어나올 뻔한 ‘자본가’로서의 본성. 한서진은 헛웃음만 지었다.
“지혜는 요즘 어때?”
“언니한테 직접 물어보시지 않고요.”
“만나는 남자 같은 거 없어? 그런 걸 본인한테 직접 물어보긴 그렇잖아.”
“아하.”
송하나는 알겠다는 듯이 웃고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몇 명 있는 거 같기는 해요.”
“몇 명이나 돼?”
한서진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내 여동생에게 그런 면모가 있었나?
“아, 전부 다 사귀는 건 아니에요. 그저 가볍게 만나는, 썸 정도? 언니도 아직 누구를 정리할지 고민 중이신가 봐요.”
“누구를 사귀는 게 아니라, 누구를 정리한다고? 그럼 한 명만 사귀겠다는 게 아니란 말이야?”
“제가 여러 명을 동시에 만나 보라고 권했어요. 언니는 남자 볼 줄 너무 모르셔서. 어차피 사귀는 것도 아닌데 아무 상관없잖아요.”
한서진은 조금 납득이 안 갔지만, 차분히 생각해보니 송하나의 말이 이해되었다. 그녀는 조금 난처한 듯이 바라보다가 다시 말했다.
“어차피 언니가 아무하고 결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렇긴 해.”
현재 여동생인 한지혜는 자기 명의로 1조 AU가 넘는 재산을 가지고 있다.
서울과 평성에 각각 큰 저택을 하나씩 갖고 있으며, 본인 명의로 1조 AU의 현금을 갖고 있다. 물론 한서진이 여동생의 미래를 생각해서 증여로 준 것들이다.
남들에게는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막대한 금액이지만, 그래봐야 에테르 워치 하나 값만도 못하다.
동생을 챙겨주긴 해야겠는데 너무 많이 해주면 오히려 버릇 나빠질까 봐, 한서진도 그 정도로 노후 보장을 해주는 정도에서 그쳤다.
‘사업을 하고 싶으면 차라리 미리 나한테 말을 해서 회사 하나를 만들어달라고 해. 앞으로도 네 돈으로 사업할 생각은 말고. 그 돈은 죽을 때까지 생활비로만 써.’
‘응, 오빠.’
남매간의 흔하디흔한, 단란한 대화 아닌가.
아무튼 집이 ‘두 채’나 있으며, 개인 자산만 1조 AU이 넘어가는 20대, 그것도 꽤 괜찮은 미모와 학벌까지 갖추고 있다. 무엇보다 한서진의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다.
당연히 한지혜와 좋은 관계를 만들려고 하는 남자들이 줄을 섰다.
본인도 자각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은 평범한 결혼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오빠가 정략혼을 권유하지는 않겠지만, 배우자감을 고를 때 집안과 인품, 외모, 학벌 등 모든 것을 고려해서 신중하게 골라야 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도 팔자니까 어쩔 수 없지. 나 같은 오빠 갖고 태어나기가 어디 쉬운가.”
송하나는 그저 가볍게 웃기만 했다.
“그런데 아버지한테 아직 말씀 못 들으셨어요?”
“무슨 말씀?”
“은퇴 생각하시나 봐요.”
“회장님이 은퇴를?”
한서진은 조금 놀랐다.
아니, 그 정정한 분이 왜 벌써? 70대가 넘긴 했지만 엘릭서를 복용한 효과 덕분에 온전한 건강을 되찾았고, 신체 나이가 현저하게 젊어졌다.
최근에 행한 정밀검진 결과에서도 백철중의 내부 장기는 현재 20대에 달하는 싱싱함을 지니고 있다고 나왔다. 얼굴의 주름도 많이 사라져서 겉보기에는 50대 이하로 보일 정도다.
“아무래도 제가 사업 경험을 쌓기를 바라시니까요. 원래라면 진작 은퇴하셨어야 할 나이긴 하죠.”
“그래도 아직 정정하신데…… 그 분 경영 욕심도 많으실 텐데, 쉽지 않은 결정이겠어.”
“어쩔 수 없잖아요.”
송하나는 현재 부회장 대행에 달하는 직함을 달고 일부 계열사를 맡아 운영하고 있다. 실전 경영 경험을 착실히 쌓는 중이다.
언젠가는 그룹 경영을 물려줘야 한다. 그리고 그 시기는 너무 늦어선 안 된다.
“하지만 너도 아직 20대잖아?”
“재벌 총수 하기에는 좀 이르긴 하죠.”
“좀이 아닌데…….”
“아무래도 엄마가 뒤에서 닦달하시는 거 같아요. 70 넘도록 총수 노릇 하셨으면 많이 하신 거니, 차라리 저한테 다 물려주고 좀 편히 놀면서 지내자고요.”
“회장님도 심난하시겠어.”
권력이란 본질적으로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벌 총수, 그것도 H그룹 총수가 지니는 금전 권력의 위상은 어마어마하다.
아무리 자식에게 물려준다지만 그 달콤한 힘을 하루아침에 내려놓으려면 얼마나 섭섭할까. 심지어 건강이 악화된 것도 아니고 청년처럼 쌩쌩한데.
“그럼 네 생각은 어때?”
“저야 아빠가 준다면 고맙게 덥석 받지요. 부모가 준다는데 거절할 자식이 어디 있어요.”
“이야, 솔직해서 좋네.”
“나중에 시집가기 전에 기둥뿌리 몇 개 정도는 미리 뽑아놔야죠. 어차피 나중에 가면 큰오빠들이 달려들 텐데.”
“달려든다고? 과연?”
유류분 제도가 있긴 하지만, 한국 땅에서 그들이 한서진 가족에게 소송을 걸 수 있을까? 평생 눈에 띄지 않게 숨어 살거나, 혹은 나중에 애걸복걸을 하며 먹고 살 길을 만들어달라고 하지 않을까?
한서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뉴월드그룹 어때?”
“갑자기 뉴월드는 왜요?”
“거기 인수해서 네가 운영해보는 건? H그룹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뉴월드도 제법 덩치가 크잖아? 아니다, 아예 라테까지 인수해서 계열 합병을 해버릴까?”
“어, 정말 그래도 돼요?”
“어차피 얼마 하지도 않잖아. 저번에 나 때문에 폭탄 맞아서 주식도 줄줄이 쏟아졌고. 그때 우리도 지분 꽤 확보하지 않았어?”
“적어도 25% 이상은 있을 거예요, 아마.”
한서진 때문에 국내 기분이 흔들린 재벌 기업들은 몇 번의 풍랑 속에서 우호지분을 상당수 잃었다. 그 지분들 대부분은 현재 한서진이 쓸어 담듯이 해서 확보해둔 상태였다.
“남은 지분 전량 인수하고 상장 폐지해서 사기업으로 만들어서 한 번 운영해 봐. 그럼 합병도 쉽고 괜찮을 것 같은데.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진짜 그래도 돼요?”
“그럼 회장님도 경영에서 안 물러나셔도 되니까 잘 된 거 아냐?”
자리가 부족하면 그룹 하나를 더 만들면 된다.
「허허, 자네가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아닙니다. H그룹이야 장인어른께서 평생을 일구신 거죠. 그 자리를 굳이 내려놓으실 이유가 있겠습니까?”
「사실 마음 같아선 나도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었는데 그러기에는 염치가 너무 없어서 말이야. 내가 그럼 H그룹은 잘 간수했다가 나중에 더 나이 먹어서 거동을 못할 때 하나한테 물려주겠네.」
송하나가 식사 중에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백철중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는 진심으로 한서진에게 고맙다는 뜻을 전했다.
「그런데 뉴월드 그룹과 라테 그룹을 인수해서 합병한다고? 우리 하나가 그 큰 집단을 잘 다스릴 수 있을까? 이제 겨우 스물 둘인데 말이야. 말아먹진 않을까 너무 걱정이 되네.」
“괜찮습니다. 말아먹는 것도 다 좋은 경험이지요. 원래 실패에서 얻는 게 많다지 않습니까.”
「역시 자네는 통이 커. 허허.」
“회장님이야말로 스물 두 살밖에 안 됐는데 벌써 그룹 경영을 물려주실 생각을 하신 건가요?”
「……내가 자네니까 하는 말이네만, 요즘 하나 엄마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서 말이야. 나 아직 정정하다는데도 어찌나 옆에서 졸라대던지, 에휴.」
“금슬이 좋아 보여서 다행입니다.”
송하나의 모친, 송지현이 욕심 때문에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 남편이 일선 경영에서 손을 떼고 좀 한가롭게 지냈으면 하는 마음에서라고 들었다.
그런데 사위가 딸에게 다른 기업을 냉큼 사주는 바람에 일이 무산됐으니, 송지현은 좋기도 하고 떨떠름하기도 할 것이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10대 대기업 경영권은 단번에 확보할 수 있습니다.”
「들었네. 저번 증식 혼란 때 자네가 시중에 나온 주식들을 쓸어 담았다면서?」
“하나와 제 측근들이 권한 것도 있고, 나중 일도 생각해서 겸사겸사 쇼핑 한 번 했습니다. 지분 전량 인수도 아마 가능할 겁니다. 시간이 좀 걸리긴 하겠지만.”
「10대 대기업이 모두 자네 손에 들어가면 참 이 나라 경제가 볼만해지겠어.」
“안 그래도 돈 쓸 데도 없이 쌓아두고만 있는데, 한 번 그렇게 해볼까요?”
「그건 안 되네. 아직 우리 하나가 그럴 능력은 못 돼. 지금 자네가 해준 것만 해도 충분히 과분한 거야.」
“그래도 대비는 하십시오. 저도 진지하게 생각 중이라서요.”
「…….」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한서진의 말이 지나가는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진심인가?」
“예,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니까요. 지금 상태로는 이 나라 경제 상황을 관리하기가 버겁습니다.”
「…….」
“회장님도 그때 많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그러니 지금 H그룹에서 물러나시면 안 됩니다.”
「……자네가 우리 계열사 지분을 몇 %나 갖고 있었지?」
“9%가 조금 넘을 겁니다. 틈날 때마다 조금씩 사 모으고 있습니다. 물량이 없어서 문제네요.”
「흐음……. 혹시 자네, 절대적인 독점 시장을 원하나? 하지만 그건 국민들이 받아들이기 힘들 걸세.」
“소유만 하고 경영은 공정한 경쟁 원칙에 맡길 겁니다. 중간에 적절히 통제를 해주면서요. 그러려면 전부 제 장바구니에 담는 게 낫겠더군요.”
「하나 말대로군. 확실히 자네가 요즘 부쩍 이 나라 사회 구조에 관심이 늘었어.」
“제 집 마당 앞에 쌓인 눈은 치워야지요. 그래야 제가 지나다닐 때 미끄러지지 않으니까요.”
「잘 알겠네.」
한서진은 전화를 끊었다. 아직 송하나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창밖을 응시했다. 창 너머로 서울의 야경이 내려다 보였다.
한때 저 광경을 내려다보며, 손을 뻗으면 그 안에 다 담을 수 있을 것 같았던 느낌에 사로잡혔던 적이 있다. 벌써 몇 년이나 지난 옛날 일이다.
손을 뻗으면 다 담을 수 있을 것 같았던 세상, 그것은 이제 손바닥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기도 힘들 만큼 작아져 있었다.
전부 움켜쥔다 해도 느낌조차 들지 않을 만큼.
레노지안은 오래 전에 끝났고, 남은 것은 그 막대한 힘의 유산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롯한 자신의 소유.
우주의 질서 한 조각을 엿본 그에게 있어, 이런 자그마한 인간의 문명 따위는 너무나 시시하게만 느껴졌다.
“편하게 정리하는 게 낫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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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진이 기르는 햄스터가 되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 근데 수명이 너무 짧구나.. 그럼 거북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