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11 시간을 초월하여 =========================================================================
태양은 우주에서 유일한 에테르 항성이다.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태양이 내뿜는 에테르 덕분이며, 다른 곳에서는 아무리 유사한 환경이라 해도 생명이 발생할 수 없다. 기적적으로 유기물이 조합된다 하더라도 오래 유지되지 못한다.
레노지안은 그 기적을 향한 탐구욕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성스러운 기적조차도 누군가에는 하나의 엔진에 불과했던 것이다.
‘제독이라는 사람…… 대체 어디에서 온 거지?’
제독이 떠나온 본래의 레노지안. 그곳은 아마 에테르 문명의 극의를 이루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그 폭주를 이기지 못하고 파멸했으리라.
그것을 상상하면 오싹 소름이 끼친다.
태양은 제독이 빚어낸 작은 에너지원에 지나지 않았다. 현대 문명으로 치면 자동차 엔진 정도나 될까.
그런 엔진만으로도 하나의 항성계가 발생하고, 유지되며, 소멸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제독이 떠나온 곳에서는 얼마나 거대한 멸망이 있었을 것인가.
‘어쩌면 우주 하나가 통째로 사라져 버릴 정도로…….’
식은땀을 흘리던 한서진은 나지막한 신음소리를 들었다. 급히 내려다보니 금방이라도 깨어날 것처럼 신효진의 눈썹이 떨리고 있었다.
“효진 씨? 정신이 들어요?”
“아……. 박사님.”
“상황이 다급한 것 같아서 저도 왔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어요?”
“레노지안이 멸망한…… 진짜 이유를 봤어요.”
초점이 약해진 눈으로 그녀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태양…… 도전…… 날조…… 신화…… 예언…….”
“……!”
한서진은 가벼운 한기를 느꼈다. 신효진도 자신과 동일한 과거를 본 것일까?
그녀는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부 맨틀은 레노지안을 지켜주기 위한 방공호였군요. 우리 지상은…… 그 위에 뿌리를 내린 것이었고요.”
“…….”
“우리는…… 우리는 해서는 안 됐어요. 신계에 도전을…… 그것 때문에 모두가 멸망했어요. 아아, 아아아…….”
그녀는 적지 않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그래서 아버지는 그토록 저에게 오지 말라고……. 이미 이곳은 닫혀버린 시간이니까…… 아아, 그래서…… 그런데 전 그런 것도 모르고 자꾸만…….”
“효진 씨, 진정해요. 어차피 이미 오래 전에 끝난 일입니다.”
“아니요! 끝나지 않았어요!”
갑자기 그녀는 초점이 돌아온 눈으로 외쳤다. 어느새 벌떡 일어난 그녀는 창백해진 안색을 한 채, 두 팔로 자신의 몸을 껴안듯이 감쌌다.
“아서 왕이 꾸는 꿈이 끝나선 안 돼요! 만약 그가 꿈에서 깨어나면, 정말로 모든 게 끝나버리고 말아요!”
“……무슨 말을 들었습니까?”
자신이 전혀 모르는 이야기에 한서진은 긴장했다. 아무래도 신효진이 본 것과 자신이 본 것이 완벽하게 동일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아버지가 그랬어요. 저에게 더 이상 찾아오지 말라고, 제가 자꾸 찾아오면 아서 왕이 현실을 인식해버린다고. 그럼 꿈에서 깨어나게 된다고…….”
“……효진 씨.”
“어서 나가야 해요. 빨리요!”
신효진은 창백해진 얼굴로 그를 재촉했다.
한서진은 뒤를 돌아보았다. 아서 왕과 스칼린 왕비의 거대한 유해가 눈에 들어왔다.
인간이 인지하기 어려울 만큼 까마득한 세월을 저곳에서 있었을 걸 생각하니, 가슴이 막막했다.
그러나 곧 마음을 다잡고, 그는 일어섰다.
“돌아갑시다.”
연구실로 돌아온 한서진은 곧바로 레노지안과 지상을 잇는 웜홀을 닫아버렸다. 이제 두 세계를 오가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썩 개운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소정했던 목적은 달성할 수 있었다. 바로 완전한 신살검을 획득한 것이다.
십 수억 년 전의 것이라 믿어지지 않는 찬란한 형태, 한서진은 레노지안에서 돌아온 후 한참 동안이나 검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신살검…… 대체 어떻게 된 걸까?’
레노지안의 역사에서 신살검은 어느 순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그게 처음부터였는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했다.
레노지안 왕가의 역사는 신살검과 함께 해왔다는 것이다.
‘누가 신살검을 만들었지?’
태양의 힘을 염원하는 레노지안 왕가의 누군가?
아니면 제독이 남긴 것일까?
아무리 생각을 되짚어 봐도, 검의 기억에서 그걸 보지는 못한 것 같다.
‘검에는 태양계가 태어나기 전의 일까지 기억으로 남겨져 있었어. 그렇다면 제독이 만들었나?’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기도 했다.
‘제독은 인간의 끝없는 탐구욕을 경계했는데…….’
우주선은 제독의 뜻에 따라 레노지안을 보호하는 방공호, ‘격벽’이 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태양의 에테르 흐름을 조절하며 폭주를 막고 있을 것이다.
레노지안이 멸망한 것은 격벽에 구멍을 뚫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태양 통제가 순간적으로 흐트러졌고, 일시적으로 강력해진 에테르 파장이 모든 것을 멸망시켜버렸다.
인류의 문명을 제한한 제독이, 격벽을 뚫을 수 있는 무기를 남겼다는 것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생각을 정리하던 한서진은 옆에 앉는 인기척을 느꼈다. 바로 신효진이었다.
“이제 좀 괜찮나요?”
“예, 좀 나아졌어요.”
왠지 어색한 분위기에 둘 다 뻘쭘해했다.
한서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서 왕이 꿈을 깨면 안 된다고요?”
“레노지안 백성들의 영혼은 아서 왕의 꿈에서 살고 있으니까요. 그걸 깨서는 안 되죠.”
“…….”
그 또한 검의 기억에 있던 내용이었다.
멸망으로 치닫게 된 아서 왕은 스스로를 희생해서 모든 백성들의 혼을 품었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아서 왕의 꿈속에서 영원히 행복하고 살고 있으리라.
‘내가 겪었던 세상은…….’
한서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과거 몇 차례 들어가 봤고, 또 타르타로스를 통해서 관찰했던 레노지안. 그것은 바로 아서 왕의 꿈이었던 것이다.
‘그 신하…… 나에게 이곳만이 진실이라고 했었지.’
아서 왕의 꿈에서, 그 노신하만이 유일하게 세계의 진실을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레노지안은 아서 왕의 꿈에서만 영원히 존재한다. 당연히 노신하는 그가 꿈에서 깨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그것은 아서 왕의 바람도 아니고, 레노지안 백성들을 위하는 길도 아니니까.
“굳이 신계에 도전했어야 했을까요?”
한서진의 중얼거림에 신효진은 쓰게 웃었다.
“신좌의 탈환은 왕의 독단이 아니에요. 대륙 전체의 염원이죠.”
“…….”
“왕은 당연히 대륙 신민들의 뜻을 실현해줄 의무가 있고요. 그것뿐이에요. 진실 따위는 아무도 알지 못했어요. 신화와 전설…… 그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결국…… 우리가 줄곧 레노지안을 찾아왔던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군요.”
“……박사님께는 그런가요.”
신효진은 서글픈 눈빛을 지어 보이며 웃었다.
“저는 이것도 괜찮은데.”
“…….”
“좀 아프긴 하지만요. 그래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박사님하고 전생에 그런 인연이었다는 것도 알았고, 그냥 전 이 정도만 해도 좋네요.”
“그리고 슈퍼맨 뺨치는 힘도 얻으셨고요.”
“그것도 있네요.”
가벼운 농담으로 받아치자 그녀의 안색이 조금이지만 밝아졌다.
“박사님.”
“네, 말씀하세요.”
“이제 더 이상 레노지안 때문에 만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저희는 친구인 거죠?”
그녀의 말대로다.
둘은 지금까지 레노지안을 찾는다는 공통분모가 있었다. 같은 목적이 있어서 가깝게 지냈다.
그러나 레노지안의 실체를 확인한 지금, 더 이상 그곳을 추구할 동기가 없다. 둘만이 공유하던 비밀이 그 가치를 잃은 것이다.
“당연하죠. 그리고 앞으로는 레노지안이 아니라 효진 씨가 얻은 스칼린 왕비의 힘을 연구할 겁니다. 그것 때문에 더 자주 보게 될 것 같은데요.”
“하나 씨한테 신경 많이 써주세요.”
“…….”
“이번 생에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인 것 같으니까요.”
그녀가 특별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것은 알고 있다. 전생에 부부였던 데다가, 그녀는 꿈을 통해 그것을 생생하게 겪기까지 했으니까.
만약 송하나가 없었다면 자신은 그녀를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녀는 각별했고, 매력적인 여자였다.
그러나 인연이라는 것은 언제나 타이밍 아닌가.
한서진은 씁쓸한 내심을 감추며 웃었다.
어쩌면 사랑했을지도 모른다는 거지, 지금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만큼은 분명히 말할 수 있었다.
“이만 퇴근하시고 당분간은 쉬세요. 저는 한동안 신살검만 들여다볼 것 같습니다.”
“알겠어요. 박사님도 너무 무리하진 마세요.”
문을 닫기 전 그녀가 짧게 돌아보며 말했다.
“잘 자요, 아서. 나의 왕.”
한서진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는 재빠르게 문을 닫았다.
상부 맨틀, 즉 격벽은 제독이 타고 온 우주선이 그 형태를 구체로 변환시킨 것이다. 그 역할은 폭주한 태양의 에테르 흐름을 조절하는 것에 있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도 태양은 폭주 중일까?”
어쩌면 태양의 폭주는 오래 전에 멈추고, 우주선도 휴면 상태로 돌입하진 않았을까?
제독이 보인 문명 수준을 생각하면, 고작 태양 하나의 폭주를 아직까지 잠재우지 못했을 리는 없다.
하지만 선뜻 검증에 나서기에는 여러 모로 부담스럽다.
‘격벽을 잘못 건드리면 안 돼.’
격벽, 변형된 우주선은 단순히 레노지안을 보호하는 천장이 아니었다. 그 자체로 태양을 통제하는 거대한 마법진이다.
정말 태양이 안정화된 상태라 해도, 격벽을 잘못 건드려서 태양을 자극하기라도 한다면? 지상 역시 레노지안의 뒤를 따르게 된다.
한서진은 레노지안을 찾기 위해 격벽을 스캔했던 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이었나 깨닫고 모골이 송연해졌다. 다행히 관찰만 했을 뿐, 격벽에 어떤 자극을 준 것은 아니었지만.
‘아니, 그냥 격벽은 건드리면 안 돼.’
한서진은 잘못 건드리면 안 된다에서 건드리면 안 된다로 생각을 바꿨다.
‘레노지안은 이제 잊자. 그냥 신살검이나 연구하자. 뭐라도 건질지 몰라.’
한서진은 타르타로스 3의 황금 원반을 흘끔 바라봤다. 직경 수백 미터가 넘어가는 거대한 메인보드는 지금 그 중심이 텅 비어 있었다.
그는 완전한 신살검을 저기에 꽂으면 과연 어느 정도의 성능을 낼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자신이 잠시 놓친 점을 깨닫고 쓴웃음을 지었다.
“반쪽일 때도 보드가 코어 성능을 못 따라가서 발목만 잡았는데.”
신살검의 힘을 온전히 사용하기 위해서는 보드를 더욱 확장해야 할 것 같다.
한서진은 신살검을 소중히 어루만졌다. 그 안에 담긴 무궁무진한 힘을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격벽하고 태양만 절대 건드리지 말자.”
왕은 들었다. 누군가의 속삭임을.
―폐하, 부디 저희들의 꿈을 이뤄주소서.
―태양의 전능함을 취하소서. 그 힘으로 만백성들을 영원히 번성케 하소서.
―왕가의 사명을 이뤄주소서!
―레노지안의 문명이 위대함을 온 우주에 널리 떨쳐주소서!
잡음, 통곡, 애원, 충언, 갈망, 온갖 감정이 섞인 속삭임이 쉬지 않고 의식을 맴돈다.
―레노지안을 다시 부활시켜 주소서…….
흐느끼는 듯한 여자의 목소리.
분명 귀에 익다. 듣는 것만으로도 의식이 아련해질 만큼.
왕은 천천히 눈을 떴다.
잿빛 죽음이 가득한,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왕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향했다. 레노지안을 가두고 있는 신의 감옥이 저 높이 보였다.
왕은 그 위를 향해 손을 뻗었다가,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