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10 시간을 초월하여 =========================================================================
“참으로 위대하지 않은가?”
한서진은 제독의 자조 가득한 역설을 들었다.
수십 억 년 전, 그가 느꼈을 막막함을 한 조각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어리석지 않은가?”
제독의 눈이 태양을 향했다.
현재는 물론이고 과거와 미래의 진실마저 내다보는 눈은, 8광분의 거리를 너무나 손쉽게 꿰뚫어본다.
“인간을 위해서 인간이 이룩한 문명을 삭제했음에도, 인간은 다시 과거를 반복하고 있다.”
제독은 고향에 관해 어떤 이야기도 들려주지 않았다. 고향이 어디에 있는지, 얼마나 발전된 문명을 누렸는지.
그러나 한서진은 그가 떠나온 고향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것 같았다.
지금 레노지안이 그것을 반복하고 있었으니까.
에테르의 근원이 태양이라는 걸 알아낸 레노지안의 마도사들은 태양을 연구하기 위해 아낌없이 힘을 쏟았다. 끊임없이 지식을 탐구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태양까지 도달했다.
태양의 열기를 견딜 수 있으며, 먼 거리를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탐사선을 만들었다. 레노지안이 보유한 마법의 정수가 집약된, 그야말로 인간의 지성이 한데 뭉친 작품이었다.
탐사선을 만드는 과정에서 레노지안은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마법 발전의 비약을 이루었다. 그들은 마력을 넘어서서, 에테르 그 자체를 통제하는 지식마저 획득했다.
탐사선은 태양 표면을 관찰, 표본을 채취하여 무사히 귀환했고, 레노지안은 축제 분위기에 들떴다.
제2, 제3의 탐사선이 속속들이 만들어져 태양을 향했다.
레노지안은 태양이 감춘 위대한 진실에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하게 나아가고 있었다.
그 끝에는 오직 한 명만이 예견한 비극이 있었다.
―태양 흑점에서 이상 현상이 관측되었습니다!
―12레벨 에테르 에너지가 감지되었습니다!
―마력 파동이 급격히 팽창하고 있습니다! 이대로는 버티지 못합니다!
최초의 유인탐사선은 레노지안 전체의 기대를 안고, 태양 탐사 임무에 나섰다.
그러나 무엇을 잘못 자극했는지, 태양의 내부에서부터 미칠 듯한 폭주 반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실시간으로 상황을 접한 레노지안은 당황했고, 해결책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충격적인 소식이 전 대륙을 덮쳤다.
―태양, 에테르 임계점에 도달.
―한 달 안으로 태양은 폭발할 것.
―태양계 소멸, 피할 수 없는 운명.
절망이 온 세상을 흠뻑 적셨다.
길어야 한 달이었다. 그 안에 모든 생명이 소멸하고 만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광분 상태로 들어섰다.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혼란과 무질서가 거리를 점령했다.
그토록 현명하고 이성적인 시민들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예기치 않은 멸망만을 앞두고, 세상을 저주하며 발악하고 울부짖는 이들만이 있었을 뿐이다.
사회는 무너지고, 악에 받친 절규만 남았다.
그런 와중에, 유인탐사선이 실험 목적으로 태양 내부의 에테르 흐름을 자극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세상이 또 한 번 발칵 뒤집혔다.
마도사들이 호기심을 해소하기 위해 무계획적으로 시행한 실험이 태양 폭발을 야기한 것이다. 애꿎은 희생을 치르게 된 군중들이 참고 있을 리가 없었다.
대대적인 폭동이 일어났다.
지금까지는 멸망을 앞두고 어쩔 줄 몰라 하던 이들이 소요를 일으키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실험을 자행한 이들에게 울분을 토하고 응징하기 위한 분노의 흐름이었다.
수많은 군중들이 수도로 향했다.
그들의 발길에 닿는 모든 것이 짓밟히고, 부서지고, 무너졌다.
마침내 마법 도시는 분노한 군중들에 의해 포위되었고, 마법사란 직함을 단 이들은 사정없이 끌려나왔다.
그들 대다수는 태양 실험과 관련이 없는 이들이지만, 분노에 눈이 멀어버린 군중에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나온 어린 마법사 지망생들이 성난 군중의 발길질에 맞아 죽었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태양 폭발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던, 아무런 책임 없는 실력자들이 몽둥이에 맞아 머리가 깨져나갔다.
그들을 위해 밥을 짓고, 차를 끓이며, 열심히 시중을 들던 가정부들이 무참히 살해당했다.
멸망을 앞둔 군중은 마법사라는 이름을 단 자들에게 집요하게 책임을 물었다. 갈 곳 없는 자신들의 분노와 절규를 쏟아낼 대상이 필요했다.
제독은 그 모든 것을 담담하게 관조했다.
“프리덤, 나의 시간은 얼마나 남아 있지?”
―3년 2개월입니다. 제독께서 본래 설정한 수명 타이머가 거의 다 소모되어 갑니다.
“3년 2개월이라……. 이후 저들의 미래가 어떻게 되는지 지켜볼 수는 없겠구나.”
―타이머 재설정을 권합니다. 이대로 제독의 개체 수명을 끝내기에 인류의 미래는 너무 불안합니다.
“괜찮다. 육신을 버릴 뿐, 소멸하는 게 아니니.”
제독의 눈이 거울을 향했다. 거울에 비친 눈빛을 통해, 한서진은 그가 자신을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는지, 가늠할 수 있겠나?”
수십 억 년을 뛰어넘은 물음에, 한서진의 의식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을까.
“인간에게는 차라리 닫힌 세상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진리를 향한 끝없는 탐구욕, 그러나 그 개방성은 지금처럼 인류 자체를 멸망에 몰아넣었다.
태양에서 쏟아지는 강렬한 에테르 파장은 방사선처럼 사람들을 질병과 죽음으로 몰아넣기 시작했다. 치명적인 파장을 쬐인 사람들은 신체가 붕괴한 채, 곳곳에서 쓰러져 신음하며 죽어갔다.
그 절대적인 살상력 앞에서는 대마도사의 놀라운 마법적 지식도 아무 소용없었다.
죽음은 매우 공평하게, 인간들의 머리 위에 드리워졌던 것이다.
수많은 이들이 죽어나가고, 살아남은 이들조차 몸이 타들어가는 고통에 숨을 헐떡거리며 멸망을 기다리고 있던 그때.
“프리덤, 코드레벨 52를 시행해라.”
―명령을 실행합니다, 제독. 함체의 형태를 폐쇄형으로 변환 개시합니다.
거대한 우주함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유선형으로 날렵하게 생긴 금속 표면은 마치 용광로에 던져 넣은 듯이 녹아내렸다. 액체 금속처럼 변한 우주선은 구름처럼 레노지안 행성의 하늘을 높이 감싸 안기 시작했다.
액체 금속으로 이뤄진 대기는 투명하게 레노지안 행성 전체를 감싸 안기 시작했다.
죽어가던 이들은 흐릿한 눈으로, 자신들의 머리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적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그것이 기적이라는 것을 인지할 힘조차도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액체 금속이 행성 전체를 뒤덮자, 몸을 태워버릴 듯이 쏟아지던 에테르 파장도 사라졌다.
태양을 검게 뒤덮었던 흑점도 빠른 속도로 가라앉으며, 본래의 찬란한 붉은 빛을 되찾아나갔다.
“기적이다.”
“기적이야! 기적이 일어났다!”
“태양이 진정되었다! 만세! 만세!”
살아남은 사람들은 뛸 듯이 기뻐하며, 서로 끌어안고 눈물로 감격을 나누었다.
“마법은 지적 호기심 해소가 아닌, 인간의 행복 조성을 위해서 쓰여야 한다. 보라, 소수 마법사들의 호기심이 불러온 이 참담한 비극을!”
지식인들은 깊이 반성했고, 시민들은 무분별한 연구를 비판했으며, 마법사들은 살아남기 위해 무모한 호기심에 얽매이지 않을 것을 선언했다.
시간이 흘렀다.
태양을 건드린 비극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점차 잊혀져 가고 있었다.
극에 달한 지적 호기심이 야기한 비극은 세대를 거쳐 내려오며 신화 속 이야기가 되었다.
멸망 직전, 왕가가 혼신의 힘을 다하여 태양의 폭발을 억제한 것은 신의 후손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왕가는 신민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존엄한 신의 지위를 잃고, 지상으로 떨어져 인간으로 강등당했다.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마법사들과 지식인들이 적극적으로 퍼트린 전설이지만, 사람들은 의심 없이 그런 전설을 믿었다. 그 믿음은 왕실을 향한 끝없는 헌신과 존경으로 나타났다.
―언젠가 위대한 왕이 출연해 신계를 되찾을 그날,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찬란한 빛과 힘을 얻게 되리라. 그리하여 왕국의 모든 이들을 영원토록 번창케 하리라.
한때 태양을 다스리던 지고한 신.
그러나 배신자에게 신좌를 빼앗기고, 지상으로 추방당한 비운의 절대자.
그런 위대한 신을 왕으로 모신다는 자부심, 그리고 언젠가는 자신들의 왕을 신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
레노지안 백성들은 수천 년 동안 그런 목표 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왕국을 발전시켰다.
코드레벨 52.
태양, 유일한 에테르원에 대한 접근 자체를 완전히 차단당하는 문명 수준을 말한다. 그들은 허용된 만큼의 에테르 에너지만을 수동적으로 소비하며 살아갈 수 있었다.
레노지안은 아무리 노력을 기울여도 행성을 감싼 금속벽을 뚫을 수 없었고, 그것을 신계의 배신자가 설치한 장벽이라고 여겼다.
오랜 시간 동안, 그들은 단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다.
신계와 지상계를 가로막는 장벽을 부수고, 태양의 전능한 힘을 다시 되찾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왕가가 배출한 가장 훌륭하고 걸출하며 위대한 왕이 해냈다.
신살검의 힘을 온전히 다스릴 수 있게 된 왕은 장벽을 뚫는데 성공했다. 그것은 장벽, 우주함이 지속적으로 통제해온 태양의 억제를 흐트러뜨리게 만들었다.
뚫린 구멍을 통해 폭주한 태양의 막대한 에테르 에너지가 여과 없이 지상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그리하여 레노지안의 모든 생명은 남김없이 소멸했다.
그리고 다시 까마득한 시간이 흘렀다.
격벽 위에 점차적으로 우주의 먼지가 쌓이며 축적되기 시작했고, 그렇게 찬란했던 레노지안의 흔적은 영원히 사라졌다.
위대한 왕은 자신의 책임을 통감하여, 자신의 의식을 백성들이 머무를 수 있는 보금자리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수백억이 넘는 레노지안 신민들의 혼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안락한 꿈을 꿀 수 있게 되었다.
격벽 위에 새로이 구축된 땅 위에서는 전혀 다른 생명이 싹을 트고, 생태계를 만들어나갔다. 에테르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은 제2의 지상에 다양한 생명이 꽃필 수 있게 해주었다.
“…….”
기억이 끝났다.
한서진은 우두커니 선 채 신살검을 쥐고 있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오한이 솟게 만든다.
검을 통해, 모든 것을 보았다.
어떻게 태양계가 탄생하고, 지구가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그 까마득한 세월 아래 어떤 비극이 가라앉아 있었는지.
이 모든 것은 단 한 명의 외우주 이주자로부터 시작했으며, 그의 후손에 의해 레노지안의 번영은 끝났다.
입안이 바싹 말랐다. 이 순간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끈적끈적한 망설임만이 기분 나쁘게 심장에 들러붙어 맥박을 방해하고 있었다.
상부 맨틀이라 불리는 행성 천장, 그것으로 레노지안을 가둔 것은 선조인 제독의 배려였다. 그들이 통제할 수 없는 지적 욕망으로 인한 비극을 제어하기 위한 것.
그러나 인간의 탐구욕은 기어이 그런 배려마저 뚫고, 다시 한 번 큰 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때에는 더 이상 도와줄 수 있는 존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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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건물에는 큰 상속세가 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