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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509화 (509/609)

00509  시간을 초월하여  =========================================================================

“폐하?”

분수대 앞에 멈춘 왕이 한참이나 미동도 않자, 수행하던 시종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그러나 왕은 들리지 않는 것처럼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폐하, 왜 그러시옵니까.”

시종이 보다 못해 다시 왕을 불렀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왕의 눈치를 살폈다.

왕은 분수대에 고인 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 안에서 헤엄치는 관상어들을 보고 있나 싶었으나, 시선이 고정된 걸 보니 그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기이하다.”

한참 후에야 왕이 겨우 내뱉은 말이었다. 시종들은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참으로 기이하구나. 기이해…….”

왕은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며, 수면 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물에 비친 짐의 모습이, 이리 낯설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다.”

“……폐하.”

“분명 짐의 모습이건데 낯설게 느껴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눈을 뗄 수가 없구나.”

왕은 해야 할 일을 잊어버린 듯이, 뜻 모를 중얼거림을 흘리며 언제까지나 멍하니 수면을 바라보기만 했다.

검의 기억.

이전에 한서진은 그 거대한 역사의 정보에 휘말려본 경험이 있었다. 검이 간직한 오랜 기억을 엿봄으로써, 레노지안이 어디에 존재하며, 어떻게 번성했고 어떻게 멸망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혼을 휩쓴 기록의 폭풍은,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온전한 신살검이 그의 혼을 향해 조금의 배려도 없이 쏟아낸 흐름은 거친 파노라마가 되어, 그의 의식을 말 그대로 짓밟았다.

아서 왕의 모습이 보인다.

아니, 그는 닮았을 뿐 아서 왕 본인이 아니었다. 아서 왕의 까마득한 선조였던 것이다.

한서진의 의식은 그의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그는 선조의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제독, 목적지인 3987 우주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자동 항행 모드를 종료합니다. 새로운 터전 구축 작업을 시작합니다.

낯선 기계음에 한서진은 정신을 차렸다. 그제야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새하얀 금속의 공간, 사방에는 복잡한 디스플레이가 떠 있고, 전방의 대형 스크린에는 검은 우주만이 보였다.

―우리의 옛 고향, 레노지안과 완벽히 일치하는 우주 환경입니다. 문명의 번영을 꾀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합니다.

“아니, 이제부터는 이곳이 레노지안이다.”

제독이 덤덤히 입을 열었다. 그와 의식을 공유하는 한서진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튀어나온 말에 깜짝 놀랐다.

제독은 천천히 우주선 내부로 보이는 공간을 거닐었다.

함교로 보이는 공간에 서서, 아무것도 없는 암흑의 우주를 지그시 바라본다.

한서진은 문득 유리창에 비친 제독의 모습을 보았다. 검은 제복을 입은 그의 모습에는 짙은 고독함이 드리워져 있었다.

“시작해라.”

―알겠습니다, 제독.

거대한 우주함선의 전면부가 개방되며, 투명한 금속으로 이뤄진 에너지 발사체가 돌출되었다. 에너지가 가동되며 발사체의 투명한 금속 부분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곧이어 아무것도 없는 우주 빈 공간에 막대한 에너지가 투사되었다.

제독의 시야를 통해 관조하며, 한서진은 혼이 떨리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투사 중인 에너지의 막대한 출력이 고스란히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통찰안?’

한서진은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의 통찰안이 아니다. 바로 아서 왕의 선조, 제독이 사용하고 있는 통찰안이었다.

최초의 통찰안, 그것이 비추는 진실의 크기는 한서진의 혼으로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막대했다. 보고 있어도 그게 무엇인지 인지할 수 없을 만큼.

‘아아……!’

한서진의 의식은 진한 신음을 흘렸다.

우주함이 방출하는 에너지가 얼마나 거대한지 가늠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큼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저것은 별을 품은 에너지였다.

아무것도 없는 우주 공간에 막대한 에너지를 투사하여 물질을 빚어내, 별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뜨거운 항성이 창조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한서진은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느껴야만 했다.

항성에서 뿜어져 나온 에너지는 주변에 자리를 잡으며, 서로 뭉쳐서 물질화를 이루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행성들이 만들어져 항성 주위를 돌기 시작한다.

붉은 코로나가 넘실거리는 항성.

한서진은 모든 상념을 잊은 채 원시 태양이 태어나는 순간을 지켜보았다.

―새 터전의 문명 구축을 위한 에테르 에너지원 형성에 성공했습니다.

―에테르 에너지원의 과부하에서 새 터전을 보호할 방어 회전체 두 개를 생성했습니다.

―새 터전을 생성했습니다.

―외우주의 위협으로부터 새 터전을 보호할 방어 회전체 다섯 개를 생성했습니다.

시스템의 보고가 잇따라 울린다. 하지만 제독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자신의 손으로 우주 공간에 빚어낸 새로운 터전을 말없이 응시할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제야 한서진은 제독이 혼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함교 어디에도 다른 승무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설마 이 거대한 우주선에 그 혼자란 말인가?

“승객들을 깨울 준비를 해라.”

―동면 중인 승객 5,321명을 해동합니다. 해동 전 그들에게 주입할 적합한 문명 수준을 설정해 주십시오.

“문명 수준은 코드레벨 53으로.”

―레노지안이 이룩한 지식 수준에 비해 지나치게 떨어진, 너무 미개한 수준입니다. 재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코드레벨 53으로. 그 이상은 필요 없다.”

제독의 음성은 냉소적으로 느껴졌다.

“불필요하게 높은 수준은 문명의 몰락을 가져온다. 이미 우리는 한 번 그것을 겪었다. 되풀이할 필요는 없다.”

―코드레벨 53을 선택하실 경우 주입 지식의 양이 극도로 제한됩니다. 인류는 에테르 에너지원을 창조할 힘과 지식을 잃어버리고, 에너지원을 두려워하며 경배하게 될 것입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제독의 나지막한 음성에는 깊은 회한이 서려 있었다.

“더 이상의 에너지원은 필요 없다. 이 넓은 우주에서, 이것 하나면 충분하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번에도 만족하지 못하겠지…….”

제독은 심연이 가득한 눈빛으로 창에 비친 자신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통해, 한서진은 제독의 눈동자에 비친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유리창을 통해 제독이 ‘한서진 자신’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마저 주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이에게 말하듯이, 제독은 처연히 입을 열었다.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아득한 시간의 흐름을 뛰어넘은 질문에 한서진의 의식은 파르르 떨었다.

이것은 까마득한 오래 전에 새겨진 ‘검의 기억.’

그러나 아주 오래 전에 존재했던 제독은 지금 분명히 한서진의 의식을 인지하고 있었다.

“나의 눈을 통해 자세히 지켜 보거라, 나의 후손이여. 우리가 어떻게 또 한 번 번성하고, 또 몰락하는지…….”

수십 억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전해진 의사 표시에, 한서진은 그저 전율했다.

시간의 흐름이 쏜살같이 지나간다.

우주함의 승객들은 ‘새 터전’에 무리 없이 적응했다. 그리고 제독은 왕이 되어 그들을 통치하고, 이끌었다.

그들은 ‘완성된 문명’을 품은 채 삶을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에테르 과학 문명이었지만, 그들은 ‘마법’이라고 불렀다.

그들에게 허용된 것은 마력을 활용한 마법, 그것만으로도 놀라운 문명 수준을 건설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이 품은 지식에 대한 탐구욕은 끝이 없었다.

코드레벨 53, 제한된 문명 지식을 주입받은 그들은 자신들의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 끊임없이 알고 싶어 했다. 마법과 마력, 그 원천을 쉬지 않고 탐구했다.

“폐하, 마침내 마력의 원천을 찾아냈습니다!”

제독의 시선을 통해, 한서진은 흥분한 신하들을 덤덤히 관조했다.

“마력은 그 자체로 온전한 에너지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비한 특정 근원 에너지가 일정한 형태를 갖추고 조성된 가공 에너지입니다!”

“벌써 거기까지 알아냈는가.”

“만약 그 근원 에너지를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만 있다면, 우리 레노지안은 지금보다 한층 더 번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서진의 의식은 생각했다.

이것은 제독이 원하는 전개가 아닐 것이라고.

이미 그의 고향은 지식과 힘에 대한 끝없는 탐구로 한 차례 몰락을 맞이했다. 그리하여 새로 찾아 일군 이곳, 태양계.

일부러 퇴화한 문명 수준을 설정한 제독이, 사람들이 태양의 비밀을 찾아낸 것을 반길 리가 없다. 원할 리도 없다.

“원하는 대로 하거라.”

제독이 승낙하자 신하들은 뛸 듯이 기뻐하며 나갔다. 대륙을 대표하는 마도사들이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그저 어린아이처럼 좋아라 한다.

제독은 한손으로 턱을 괴며,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주 먼 훗날에 듣게 될 누군가를 위하여.

“왜 저들을 막지 않는지 궁금할 것이다.”

수십 억 년의 시간을 뛰어넘은 의사소통. 시간마저 지배하는 지고한 그에게 있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리라.

“진리를 탐하는 인간의 욕망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지켜볼 뿐…….”

오랜 번민에 적셔진 중얼거림을, 한서진의 의식은 그저 조용히 새겨들을 뿐이었다.

시간이 더욱 흘렀다.

천재들은 지혜를 쥐어짜내 모아 마침내 대기 중에 존재하는 근원 에너지, 에테르를 채집하는데 성공했다. 마법은 더욱 고등한 영역으로 뛰어올랐고, 사람들의 인식 수준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확장되었다.

천문 관찰이 활발하게 이뤄지며, 우주라는 개념까지 터득하게 되었다. 드넓은 우주에 태양과 비슷한 어마어마한 항성들이 수도 없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아가 인간은 자신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최초의 근원에 대해서까지 의구심을 품었다.

“우주 다른 곳에도 우리 같은 지성체가 있을까? 아니, 생명이 존재하고 있을까?”

인간은 레노지안 같은, 또 다른 생명가능지대를 찾아 끊임없이 나섰다.

그러나 관측과 탐색을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그들은 헤어 나오기 힘든 혼란에 빠져야 했다.

“태양 같은 항성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저 넓은 우주 어디에서도 생명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혹시 생명은 우리 레노지안에서만 존재하는 게 아닐까?”

드넓은 우주에 레노지안과 흡사한 환경이 없을 리가 없다. 하지만 생명의 흔적은 전혀 관측되지 않는다.

“어쩌면 생명이 존속하는 시간은 우주의 영겁에 비하면 티끌처럼 짧아서, 서로 겹치지 않는 건지도…….”

무수한 의문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장대한 노력 끝에, 마침내 우주의 비밀 한 조각을 엿보게 되었다.

“에테르는 우리 태양계에만 존재하는 힘이다.”

다른 우주에는 에테르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냈고.

“에테르의 근원은 바로 태양이다!”

미지의 에너지를 품은 태양의 위대함을 깨닫게 되었다.

드넓은 우주에서는 흔하디흔한 항성, 그 크기도 실로 보잘것없는 자그마한 항성, 태양.

그러나 태양은 유일하고 지고한 별이었다. 그 사실을 여태 몰랐던 것이다.

그렇게 모든 인간들의 시선과 관심이 태양을 향했다.

============================ 작품 후기 ============================

“그러니까 태양계를 손수 만들 재주가 있으시면서 안 물려주신 거네요. 유류분 청구권을 행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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