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08 건너가다 =========================================================================
―기어이 여기까지 왔구나.
들리지 않는 소음이 머릿속을 부술 듯이 크게 울린다. 그 강렬한 공명에 신효진은 부르르 떨며 주저앉고 말았다.
“아아…….”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눈앞에 서 있는, 다 헤진 로브를 두르고 있는 거대한 백골. 비록 뼈만 남아 얼굴과 살점을 모두 잃어버렸지만, 그게 누구인지 한눈에 알았다.
―딸아, 너는 여기 오지 말아야 했다.
묵직한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머릿속에 울린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그녀를 배려하는 건지, 조금 전보다 아주 약간은 부드러워진 울림이다.
그러나 공명음이 품고 있는 성량이 워낙 거대해, 그저 목소리를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작고 여린 그녀를 날려버리기에 충분했다.
꿈을 통해 전해 받은 스칼린의 육체적 능력은, 진정한 레노지안 마도사의 앞에서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그 능력을 담고 있는 그릇이 연약한 지상의 인간에 지나지 않았으니.
「효진 씨? 왜 그래요? 무슨 일이에요?」
다급한 한서진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러나 반쯤 정신이 흔들린 신효진은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눈앞에 서 있는 백골을 멍하니 올려다보기만 했다.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갑자기 왜 그래요? 효진 씨! 효진 씨! 대답해주세요!」
한서진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카메라와 마이크를 통해 신효진과 시야와 소리를 공유하고 있지만, 상황 파악이 전혀 안 되는 모양이다. 신효진의 눈앞에 선 백골의 존재를 모르는 것일까.
백골이 다시 말했다.
―너는 너의 시간에서, 우리는 우리의 시간에서 머무르는 것. 그것이 모두를 위한 길이다.
한서진은 송출 영상을 보면서 발만 동동 굴렀다.
이해되지 않았다. 아무 전조도 없었는데 갑자기 신효진이 기절한 것처럼 넋이 나가버렸다. 그녀는 땅에 무릎을 댄 채, 아무것도 없는 허공만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대체 왜 저래?”
혹시 멀리 뭔가 있나 싶어 카메라를 최대한 줌인 했지만, 영상에는 을씨년스러운 대기만 잡힐 뿐이었다.
바로 그때 신효진의 음성이 들렸다.
「아버지.」
작지만 분명한 그녀의 발음. 한서진은 더욱 당황해서 주변을 살폈지만,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어떻게…… 된 거죠?」
“효진 씨? 효진 씨?”
아무래도 그녀가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상대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혹시 그녀에게만 보이는 환영이나 환청이 있는 것은 아닐까?
‘가만, 아버지라면 수석 대마도사? 아서 왕의 충신?’
자신도 꿈에서 여러 번 보았던 인물, 심지어 그는 자신에게 ‘지상’이 가짜라고 진지하게 당부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거짓으로 판별 난 지금, 대마도사는 누구보다 믿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지상이야말로 진짜 실존하는 세상이고 지하인 레노지안은 오래 전에 멸망했으니.
한서진은 급히 타르타로스 3를 가동시켜서, 신효진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샅샅이 훑었다. 그러나 타르타로스 3의 레이더에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그는 당황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정말 아무 것도 없는데, 그저 신효진이 혼자서 망상을 겪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타르타로스 3의 스캐닝마저 무효화하는 환영을 보고 있는 것인가?
그는 신효진이 바라보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비추는 영상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통찰안을 발동해보지만,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현장까지 가서 직접 봐야 하나?’
영상을 통한 간접 관찰은 아무래도 통찰안의 능력을 온전히 발휘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직접적으로 뚫어본다면?
한서진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현재 웜홀에서 효진 씨가 있는 곳까지는 약 26km.’
지금 당장 웜홀에 들어간다 해도, 도저히 자신이 도달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좋아.”
한서진은 급히 대기 중인 웜홀 설치장비에 접속해서 가동시켰다. 그리고 미리 축적한 에너지를 예열하고, 지정 좌표를 새로 계산해서 입력했다.
웜홀을 새로 여는 게 아닌, 기존의 웜홀 한쪽의 좌표를 이동시키는 것. 그것은 그렇게 많은 에너지도, 예열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성공이다.”
한서진은 에테르 스캐닝 결과를 확인하고 환호했다. 웜홀의 반대쪽은 신효진이 있는, 뼈의 무덤 정상으로 무사히 이동했다.
연구실 중앙에 있는 웜홀 앞에 선 한서진은 잠시 망설였다.
‘그냥 들어가도 될까?’
무기라도 들고 가야 하나? 아니면 보호슈트라도 입고 들어가야 하나?
그런 망설임이 잠시 머리를 스쳤지만, 한서진은 곧 떨쳐냈다.
‘어차피 그런 거 다 소용없어.’
게다가 이미 신효진도 그런 것 없이 별다른 위협을 받고 있는 것도 아니고.
한서진은 웜홀을 향해 힘껏 뛰어들었다.
―그것이 모두를 위한 길이다.
백골은 머릿속을 통해 덤덤히 말했다. 조금 전보다 다시 약화된 공명음, 신효진은 상대가 최선을 다해 자신을 배려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백골에게 악의는 없다. 그저 사념의 체급 차이가 워낙 크다 보니, 의식 공명을 통해 의사소통을 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에게 과부하가 걸린 것이다.
수백kg을 들어 올리는 운동선수와 갓난아기의 악수는, 아무리 조심스러워도 갓난아기에게 부담이 되는 것처럼. 게다가 백골과 자신의 차이는 운동선수와 갓난아기의 차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까마득하지 않은가.
“……아버지.”
그녀는 힘들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 그 낯선 단어가 얼마나 어렵게 입에서 나왔는지 몰랐다.
그녀의 기억에서 친아버지는 가정을 내팽개친 한량이었다. 딸인 자신과는 아무런 유대 관계도, 혈육의 정도 없었다.
그저 지긋지긋함만 남은 사이. 틈만 나면 찾아와서 돈이나 요구하는, 차라리 없는 것만도 못한 존재였다.
아버지 때문에 숨 막혔던 인생은, 한서진과 인연을 맺으면서 너무나 쉽게 해결되었다. 송하나는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다시는 그녀의 아버지가 연락을 하지 못하게끔 조치를 취했다. 그것도 폭력적이 아닌 평화적인 방법으로.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눈앞의 백골로부터 태어나서 제대로 겪어본 적 없는 ‘혈육의 정’을 느꼈다. 아버지의 향기를 맡았다.
신장 수십 미터의 백골, 처음에는 무시무시하게 느껴졌던 모습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살점이 썩어 어두운 공백만 남은 두 눈동자 속 푸른 눈빛도 따스하게만 느껴졌다.
―내 눈을 통해, 네가 알아야 할 진실을 보거라.
수십 미터의 신장 차이를 넘어서서 두 눈이 마주친 순간, 무수한 사념이 그녀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신기하게도 머리가 지끈거리거나 메스껍지 않았다.
마치 아름다운 꿈속에 잠긴 것처럼, 백골이 전달하는 의식의 집합이 그녀의 머릿속을 자유롭게 유영했다.
인간이 태어나고, 문명을 쌓아나간다.
지식을 축적하고, 힘을 배우며, 세상의 원리를 깨우친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발전하며, 만물을 통제할 수 있는 근원을 찾는데 성공한다.
인간의 인지 능력으로는 셈할 수도 없는 까마득한 오래 전부터 시작된 진짜 역사. 그것이 백골의 의식 전이를 통해, 신효진의 머릿속에서 찰나 간에 재생되고 있었다.
인간은 끝없이 강대한 힘을 추구했고, 추구했으며,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
힘을 향한 갈망은 오래 전에 폭주 상태에 접어들었고, 그 어떤 족쇄로도 그것을 멈출 수 없었다.
‘태양.’
인간은 마침내 그들이 갈구하던 힘을 오롯이 손에 넣었으며, 모든 이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기뻐했다.
그리고 그것은 비극이자 종말의 시작이었다.
“아…… 아아! 아아아아!”
무차별로 쏟아져 들어오는 과거의 홍수에 신효진은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그녀는 입을 틀어막은 채, 소리 없이 오열했다.
“효진 씨!”
웜홀을 통해 뛰어든 한서진은 주저앉은 채 오열하고 있는 신효진을 발견했다. 그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그녀를 향해 뛰어가서 부축했다.
“괜찮아요? 효진 씨?”
그녀는 반응하지 않았다. 이미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고, 한서진을 인지하지도 못했다. 정신을 뒤덮은 환영에 쓸려나가고 있는 듯했다.
“젠장, 대체 뭐야?”
한서진은 답답해서 허공을 향해 일갈했다. 여태 신효진이 시선이 향하던 곳이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신을 집중하고 통찰안을 발휘해봤지만, 역시나 잡히는 것은 없었다.
그런데 대체 그녀는 무엇을 보고, 또 무엇과 대화를 한 것일까?
“분명 아버지라고 했는데.”
스칼린 왕비의 친부, 그 대마도사가 이곳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하지만 그 역시 레노지안이 멸망할 때 죽지 않았나?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한서진은 신효진을 끌어안은 채 답답해서 외쳤다.
그때 문득 흐릿하게 일그러지는 풍경이 언뜻 잡혔다. 바로 신효진이 여태 바라봤던 그 방향이었다.
한서진은 두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틀림없이 그곳에 뭔가 있었다. 그것도 아주 거대한…….
“뭐지? 뭐가 있는 거야?”
한서진은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그러나 흐릿했던 영상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분명히, 뭔가 있었는데…….”
그는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절대 잘못 본 게 아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자신할 수 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저곳에, 뭔가가 있다고.
‘……?’
바로 그 순간 한서진은 뒤통수에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설명할 순 없지만,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듯한 감각에 오싹 소름이 끼쳤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눈동자가 썩고 없는 해골이 이쪽을 가만히 주시하듯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그것은 바로 아서 왕의 백골이었다.
‘우, 움직였어!’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아서 왕의 백골은 분명 시선의 방향이 변한 채였다. 틀림없이 움직인 것이다.
싸늘한 한기가 몸을 훑고 지나갔다. 한서진은 신효진을 부축하던 것도 놓아버린 채, 식은땀이 흐르는 주먹을 쥐었다.
분명 오래 전에 죽은 백골이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만 같다.
조금 전 시선이 돌아간 것은 정말이었을까? 혹시 자신이 잘못 본 것은 아닐까? 그런 의심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스쳤다.
쿠우웅!
그때 어디선가 강력한 떨림의 파장이 퍼져 나갔다. 마치 먼 거리에서 거인이 땅으로 힘차게 뛰어내린 듯한 느낌이다.
한서진은 고개를 돌렸다. 아까 무언가 존재감을 느꼈던 방향, 그곳에 찬란히 빛나는 물체를 발견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신살검…….”
놀랍게도 그곳에는 부러진 신살검의 조각이 있었다. 그토록 자신이 찾아 헤맸던.
신살검의 조각은 다른 레노지안의 잔해처럼 크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에게 딱 알맞은 크기로 변한 채였다.
눈부신 빛을 발하는 검의 조각은 죽음의 향취가 가득한 이 땅에서 홀로 찬란히 생명의 기운을 뿌리고 있었다. 무기물이지만 기이하게도 살아 숨 쉬는 것 같다.
그 신비한 생명력에 취해, 한서진은 저도 모르게 저벅저벅 다가갔다.
바로 그 순간, 밝은 섬광이 하늘을 뒤덮었다. 고개를 든 한서진은 빛이 만들어낸 눈부신 균열 사이로, 어떤 광휘 하나가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쿠웅!
낙뢰가 떨어지듯, 광휘는 신살검을 향해 추락했다.
팔을 들어 눈을 가렸던 한서진은 이윽고 추락한 빛의 정체를 확인하고 신음했다. 놀랍게도 그것은 타르타로스 3에 꽂혀 있어야 할 신살검의 손잡이 부위였다.
부러진 검은 하나로 합쳐진 채, 더할 나위 없이 빛나는 생명의 기운을 찬란히 자랑하고 있었다.
한서진은 홀린 듯이 다가가, 손잡이를 쥐었다. 뜨거운 기운이 손끝을 타고 온몸으로 흘러들어왔다. 기분 좋은 충만함에 저도 모르게 미소 짓는 순간, 검이 간직한 완전한 기억이 폭풍처럼 그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태양의 폭발, 그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 작품 후기 ============================
태양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