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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507화 (507/609)

00507  건너가다  =========================================================================

신효진은 한서진이 만든 슈트를 입고 준비를 마쳤다.

거울을 볼수록 한숨만 나온다. 여성을 위한 디자인적 측면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것 같다. 말 그대로 안전만을 중시한 디자인이었다.

“꼭 깡통 로봇 같네요.”

「그래도 웬만한 데미지는 막아줄 겁니다. 미국이 개발한 나노 슈트를 제가 특별히 개량한 모델이거든요.」

“왠지 갑옷보다 제 몸이 더 튼튼할 것 같은데요.”

「스칼린 왕비의 힘을 전해 받았지만 아직 모든 게 확실한 건 아닙니다. 확인되지 않은 스펙을 맹신할 순 없지요.」

“…….”

「효진 씨? 왜 그러시죠?」

“저어, 박사님. 실은 제가 따로 테스트해봤어요.”

「네?」

한서진의 목소리가 커지자, 신효진은 미안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떨어뜨렸다. 마치 그가 눈앞에서 놀라고 있는 걸 보기라도 한 것처럼.

“박사님이 저 맷집 테스트하시는 건 너무 소프트해서 답답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혼자 해봤어요.”

한서진은 신효진의 능력을 측정하기 위해 꾸준히 여러 가지 테스트를 해왔다.

그것은 주로 신효진이 어느 정도 힘을 낼 수 있으며, 얼마나 민첩하게 움직이는가에 치중돼 있었다.

그녀의 신체가 외부 충격을 어느 정도까지 받아낼 수 있는지는 매우 제한적이고 보수적으로 했다. 맷집을 테스트한답시고 그녀가 중상을 입거나 죽기라도 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설마 칼 같은 걸 시험해본 건 아니겠죠?」

“……그보다는 진도가 쬐끔 더 나갔는데요.”

「……대체 어디까지?」

“산사태 나서 암석더미에 깔려도 안 다칠 자신이 있어요. 아무튼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어서 레노지안을 탐색해야지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죠.」

그의 목소리에서 숨을 크게 참는 게 느껴진다. 신효진은 괜히 미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자신을 걱정해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저벅저벅 걸어서 웜홀 앞에 섰다.

“이 보호슈트, 생각보다 움직이는 게 불편하진 않네요? 상당히 자연스러워요.”

「생긴 게 깡통이라 그렇지 성능 면에서는 여러 모로 쓸 만합니다. 자, 준비하세요.」

“네.”

신효진은 잠시 호흡을 고르고 뒤를 돌아보았다.

유리격벽 너머 제어실에 한서진이 섬세한 시선으로 제어장치를 살피고 있었다. 진지함이 가득한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던 신효진은 조용히 슬쩍 웃었다.

“들어갈게요.”

다음 순간, 그녀는 웜홀을 향해 뛰어들었다.

웜홀을 통과하는 순간,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은 느낌에 그녀는 조금 놀랐다. 어지러움이나 짜릿함 같은 게 느껴질 줄 알았지만, 그런 것은 전혀 없었다.

다만 균열을 통과하는 순간 풍경이 완전히 뒤바뀌는 경험은 생소하면서도 신기했다.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아늑한 연구실은 사라지고 대신 황량한 어둠의 지평선만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

그녀는 저도 모르게 크게 심호흡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어둠만이 가득하다. 그러나 한치 앞도 볼 수 없을 만큼 완전한 암흑은 아니었다. 새벽과 아침의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는 듯한 명암이었다.

「무인 로봇으로 여러 번 환경 테스트를 했습니다. 인간이 활동하기에 무리가 없는 대기 환경이니 안심하세요. 다행히 인간이 들어섰다고 특별한 이상 현상이 생기지는 않는군요.」

“좀 달릴게요. 그래도 되죠?”

「예?」

신효진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땅을 박차고 달렸다.

그녀는 치타처럼 날렵하게 대지를 달렸다. 달리면 달릴수록 익숙한 풍경들이 시야에 나타났다가 뒤로 밀려지듯 스쳐갔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속에서 왈칵 솟구치는 눈물을 억지로 참았다.

틀림없다. 분명히 익숙한 풍경의 거리였다.

바로 레노지안의 수도. 대륙에서 제일 번성한 도시.

그러나 그녀가 왕비라는 신분을 숨기고 마실 나왔을 때 보았던, 활기 넘치는 풍경은 어디에도 없다.

그림 속의 집처럼 화사하고 아기자기했던 저택들은 여기저기 허물어지고 빛이 바래 있었다. 쓸쓸함의 풍경 아래에는 널브러진 가재와 신발 등이 보인다.

곳곳에 동물의 뼈가 보인다.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뼈는 거리에 없었다.

그녀는 한때는 큰 축제가 끊이지 않았던 번화가의 광장 중심에 섰다. 분명히 그때와 같은 공간이지만, 그때의 활력은 어디에도 느껴지지 않는다.

우두커니 선 채 쓸쓸함에 젖어 있는데, 문득 한서진의 음성이 고요함을 깨뜨렸다.

「이상하군요. 제가 본 기억에서 레노지안의 멸망은 적어도 몇 억 년도 훨씬 전에 일어난 일인데, 거리 풍경은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것처럼 보이지 않아요.」

억 년 단위의 시간. 대륙의 모양마저 바뀌고도 남을, 까마득한 시간이다.

그러나 도시의 풍경은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기껏 해야 수십 년에서 수백 년 정도?

지붕이 무너진 저택들의 잔재는 억 년 단위의 시간을 흘려보낸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마치…… 이곳의 시간만 느리게 가는 것 같네요.”

「일단 더 찾아봅시다.」

“찾을 것도 없네요. 바로 저기 보여요.”

신효진은 마치 그가 옆에 있는 것처럼, 손가락을 들어 어느 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뼈로 이뤄진 거대한 동산이 있었다. 동산을 중심으로 무수한 사람들의 뼈가 방사형으로 퍼져 나가듯이 쓰러진 채,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신효진은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땅을 박차고 뛰어나간 그녀는, 자신보다 몇 배는 큰 저택들이 양옆으로 즐비한 거리를 빠르게 달렸다.

마침내 뼈의 무덤 앞에 선 그녀는 우두커니 멈춰 선 채 한참이나 올려다보았다.

「……효진 씨.」

아무 말도 없던 한서진이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

「지금 효진 씨가 어떤 기분일지 알 것 같네요.」

“박사님도요?”

「네, 저도 꿈에서 지금 효진 씨가 선 그 자리에 서서 올려다봤었습니다.」

“다행이에요. 지금 제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신효진은 뺨에 흐르는 한 줄기 눈물을 닦았다.

“이제 이 보호슈트, 벗어도 되죠?”

「네? 하지만…….」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잖아요. 그리고 스칼린 왕비의 신체라면 이런 갑옷은 도움이 되지 않아요. 오히려 움직이는데 방해만 돼요.”

「…….」

“이런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남편’을 만나고 싶지 않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벗으세요.」

제어장치의 버튼을 누르자 슈트의 결합부가 일제히 풀렸다. 투두둑 소리와 함께 슈트가 벗겨지며 바닥에 떨어졌다. 목 아래부터 완전히 가린 검은 전신 타이즈가 그녀의 늘씬한 몸매 라인을 드러냈다.

그녀는 가볍게 도약하며, 뼈의 무덤을 올랐다.

수십 미터가 훌쩍 넘어가는 거대한 인간의 뼈, 그 무덤을 밟을 때마다 자신의 심장을 밟는 듯이 가슴이 저렸다.

뼈의 무덤을 이루고 있는 이들 하나하나가, 한때 자신이 사랑했던, 그리고 자신을 사랑해주었던 백성들이다.

그걸 생각하니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흐르는 눈물을 참기 어려웠다.

마침내 정상이 저기 보였다.

고지를 넘어가기 직전,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기온이 변한 것도 아닌데 몸이 오슬오슬 추웠다.

「효진 씨?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요?」

통신기에서 걱정스러운 한서진의 음성이 울렸다.

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대답했다.

“용기가 안 나요.”

「…….」

“비록 꿈속의 삶이지만 제가 오랜 세월 동안 사랑하고, 저를 사랑해줬던 사람이에요. 그 사람의 유해를 실제로 마주친다 생각하니…… 너무 두려워요.”

「……이해합니다.」

한서진은 재촉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으로 배려를 대신했다.

정상의 바로 아래에서 한참이나 붙들려 있던 그녀는 마침내 용기를 내어, 위로 올라섰다.

“흐윽!”

마침내 정상의 풍경을 본 순간, 그녀는 폐가 우그러지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하마터면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수십 미터가 넘는, 남녀 한 쌍의 거대한 뼈.

빛바랜 왕관을 쓴 이는 뼛조각 위에 앉은 채 두 손을 옆으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아서 왕의 백골이 앉은 뼛조각, 그것은 죽음의 왕좌처럼 보였다.

그의 옆에는 무릎을 꿇은, 상대적으로 가녀린 인간의 뼈가 있었다. 신효진은 뼈의 발목에 남은, 너덜너덜한 가죽 조각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즐겨 입던 가죽 갑옷 부츠였던 것이다.

아서 왕과 스칼린 왕비.

그 둘의 오랜 유해 앞에서 신효진은 돌처럼 굳은 채, 울음조차 터트리지 못하고 우두커니 바라보기만 했다.

「효진 씨…….」

한서진이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

통신기에 장착된 카메라를 통해, 그도 지금 이 풍경을 보고 있으리라. 신효진은 아서 왕을 바라보며, 마치 그에게 묻듯이 조용히 물었다.

“지금 어떤가요?”

「…….」

“말해주세요. 박사님의 심정은 지금 어떤지…… 알고 싶어요.”

「서글프네요.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저는……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요.”

「…….」

“각오는 단단히 했었어요. 어차피 오래 전에 끝난 일이다, 그리고 꿈속의 일이다, 지금의 내 인생과는 상관없다. 여기로 오면서 끊임없이 저에게 세뇌를 했어요. 그래도 참기 힘드네요.”

「…….」

“근데 왜 막상 눈물이 안 나는 걸까요?”

멀리서 뼈의 무덤을 발견했을 때, 무덤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았을 때, 그리고 정상에 오르기 바로 직전일 때 솟아나왔던 눈물. 그러나 신기하게도 지금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다.

“너무 가슴 찢어지게 슬프면 눈물도 안 나온다는 말…… 그게 어떤 건지 알 것 같아요.”

「…….」

“박사님도 그런 거겠죠? 그래서 덤덤하신 거겠죠?”

「……네.」

머뭇거림이 섞인 대답이지만, 신효진은 그가 자신의 슬픔에 공감해준 것에 만족해했다.

한참 후 그녀는 약간이나마 밝아진 음성으로 물었다.

“자, 박사님. 이제 제가 뭘 하면 되나요? 다른 곳도 한 번 뒤져볼까요? 아니면 여기서 뭔가를 좀 더 찾아볼까요? 아! 포렌 산맥으로 가보는 건 어때요? 제가 꿈을 시작한 곳이니 뭔가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저, 아니 스칼린의 아버지도 두 번째 꿈에서 그곳으로 절 유인했었잖아요.”

포렌 산악지대. 신효진은 그곳에 레노지안에 얽힌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 번 닫혔다가 다시 열린 꿈에서, 코르비우스가 그녀를 쫓아낸 곳이니까.

「아닙니다. 제 생각에 거기는 별로 중요한 건 없을 것 같아요. 그보다는 신살검의 반쪽을 찾는 게 우선입니다.」

“아, 맞다. 신살검을 찾는 게 중요하죠. 제가 너무 정신이 없어서 깜빡했네요.”

「괜찮습니다. 아마 아서 왕 주변에 있을 텐데…… 한 번 찾아보세요.」

“네.”

신효진은 아서 왕 주변을 수색했다.

신장 수십 미터가 넘는 거대한 뼈의 주변을 돌다가, 문득 스칼린의 뼈가 아서의 뼈를 꼭 잡고 있는 걸 보고 다시 한 번 왈칵 솟구치는 감정을 느꼈다.

“이상해요. 신살검 조각이 안 보여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분명히 아서 왕의 옆에 박혀 있어야 정상인데…….」

“아무것도 없어요.”

통신기 너머로 한서진이 당황해하는 게 느껴진다. 신효진은 마치 자신이 잘못하기라도 한 듯한 미안함에, 더욱 열심히 신살검을 찾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도 지쳐서 멈추려는 순간, 갑자기 밟고 있는 뼈의 무덤이 쿠웅 하고 미미하게 진동했다.

“뭐지?”

그녀는 놀라서 멈췄다. 착각인가 싶은 순간, 뼈의 무덤이 다시 한 번 쿠웅 하고 울렸다.

틀림없다. 무언가 무덤 정상을 밟으며,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천천히 등을 돌렸다.

그곳에는 낡고 헤진 로브를 두른 거대한 백골이 서 있었다. 백골은 왼손에는 다 닳아버린 지팡이를, 그리고 오른손에는 부러진 쇳조각을 띄우고 있었다.

텅 빈 안구 속의 푸른 불빛이, 마치 눈동자처럼 그녀를 향했다.

―기어이 여기까지 왔구나.

머릿속의 신경을 끊어놓을 듯이 짜르르 울리는 듯한 공명음에, 그녀는 극심한 두통을 느끼며 주저앉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수십 미터짜리 언데드가 눈앞에서 말을 걸다니...

열라 무서울 것 같네요. 덜덜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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