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506화 (506/609)

00506  건너가다  =========================================================================

“성공이다.”

건너편에 존재하는 또 다른 지구, 그리고 그곳에서 흘러나온 암흑이 넘실거리는 웜홀 게이트.

한서진은 자신의 손으로 빚어낸 업적을 보며, 한참이나 그 자리에 붙들려 있었다. 말로 형언하기 힘든 감격이 속에서 울컥거리며 솟구쳐 올랐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몇 년이 걸렸던가.

‘길었다. 참…….’

지난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머니에게 배신당하고, 췌장암에 걸려 직장에서도 해고된 채 죽을 날만 기다려야 했다.

그러다가 통찰안을 얻으며 새 인생을 얻었다.

엘릭서를 만들어 병을 극복하고, 반도체공학기사 자격을 획득하면서 직장에서도 승승장구했다.

상사(지금은 버러지 취급하는 예비 처가 친척이지만)의 인정을 받아 회사에서도 독립했고, 정지원의 조언을 받아 미국에 진출한 것은 그의 인생 자체를 바꿔놓는 전환점이 되었다.

그 뒤 수퍼카로 고속도로를 달리듯이 모든 것이 만개했고, 지금은 미국 대통령조차 고개를 숙이는 ‘세계의 실권자’가 되었다.

인생 변환의 알파이자 오메가였던 레노지안, 그 비밀의 영역에 이제야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게 되었다.

‘아서…… 당신은 나의 뭐지?’

왕과 자신은 머리색을 제외하면 너무나 똑같이 생겼다.

그리고 왕은 자신을 스스로와 동일시했다. 같은 영혼을 가진 존재라고 단정했다.

신효진을 만나고, 레노지안과 거듭 엮이며 많은 답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불충분한 게 너무 많았다.

이제는 진실의 남은 조각을 모두 확인할 때다.

웜홀 너머의 어둠을 응시하며, 한서진은 주먹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제가 먼저 들어갈게요.”

레노지안과 지구를 잇는 웜홀 개척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신효진은 조금도 주저함 없이 말했다. 한서진은 굳이 그녀의 눈빛을 피하거나, 만류하지 않았다.

단지 짧게 말했을 뿐이다.

“위험할 수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세상입니다. 더군다나 오래 전에 죽은 땅이지요.”

“그러니 더욱 제가 먼저 들어가야 해요. 그렇지 않나요?”

신효진은 인간을 초월한 육체를 지녔다. 위험한 곳일수록 그녀가 먼저 나서는 게 효율적이다.

한서진은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애초에 말리고픈 마음도 없었다. 다만 그녀의 의지를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불러주시길 기다릴게요.”

“최대한 안전을 담보해야 하니까요.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웜홀 설치장비 8기가 추가로 투입된다는 소식에 한국과 미국 사회가 크게 술렁였다.

현재는 한국과 미국에서 각각 1기씩 웜홀 설치장비로 웜홀망 건설 작업 중이다.

에너지 충전과 안정성 검증, 그리고 장비 이동 및 재세팅에 걸리는 시간을 모두 고려하면, 통상적으로 웜홀을 한 쌍을 설치하는데 최소 1개월에서 2개월이 걸린다. 그 이상 걸릴 수도 있다.

단순히 생각해서 웜홀 설치장비 3기만 추가로 투입돼도 지금보다 구축 속도가 네 배로 늘어나는 것이다.

8기가 추가로 투입되는 것이니 사이좋게 양국이 4기씩 나눠 가지면 아름다운 그림이 될 것이다.

그러나 2기 밖에 없는 것을 1기씩 나누는 것과, 10기를 5기씩 나누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미국이 6기, 한국이 4기를 가지는 게 어떨까요? 아시다시피 우리 미국은 땅이 워낙 넓어서 설치장비를 가지고 이동하는데 대부분의 소요 시간을 쏟아 붓습니다. 그에 비해 한국은 이동거리가 짧아서 4기만 추가 투입돼도 우리 미국보다 더 빠른 속도를 보일 수 있을 겁니다.”

실제로 지금 동등하게 1기씩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의 구축 속도가 미국보다 더 빠른 건 사실이었다.

미국은 뉴욕, LA 등 초대형 도시를 잇는 웜홀 설치 작업에만 해도 애를 먹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멀어도 오로지 육로로 이동해야 했다. 항공기를 이용했다가 만에 하나 항공사고라도 발생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기 때문이다.

웜홀 설치장비가 1기 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런 무리수를 감수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한서진 박사는 엄연히 우리나라 사람, 당연히 우리나라에 우선권이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나라가 6기를 가질 우선권이 있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한서진 박사는 우리 미국 시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웜홀 설치를 담당하는 SJ게이트는 엄연히 미국 국적의 회사이고요.”

평소 한국을 대할 때 너그럽기 그지없던 미국도 이번만큼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 입장에서는 5기만 도입해도 한국에 비해 손해다. 6기를 도입한다 해도 한국이 미세하게 유리하다.

반면 한국은 국토가 넓어서 불리한 게 무슨 상관이냐, 동등하게 5:5로 나누던가 아니면 자신들이 6기를 가져가겠다는 입장이었다.

양국은 외교석상에서 서로 입씨름을 벌이면서 시간과 인내심을 소모했다. 투입이 결정된 8기는 차일피일 시간만 흘려보내며, 현장에 들어설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을 질질 끌면서도, 양국 중 어느 쪽도 한서진의 중재를 요구하자는 말은 꺼내지 못했다.

‘미국 편을 들면 어떡하지?’

‘어쩌면 한국 편을 들 수도 있어. 그럼 안 된다.’

한서진의 입에서 중재 결정이 나오는 순간, 그것은 매우 강력한 구속력을 가진다. 양국 중 어느 한쪽도 더 이상 끽소리도 하지 못한다.

양국 모두 그 점을 이해하기에, 매일같이 외교 협상 테이블에서 입씨름을 하느라 지쳐 있으면서도, 한서진에게 감히 손을 내밀 마음은 품지 못했다.

지지부진한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끈 것은, 차기 대선 후보로 꼽히는 존 캐롤 상원의원이었다.

현 대통령의 실질적인 임기는 이제 몇 년 남지 않았다. 다음 대통령은 존 캐롤이라는 설은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정론이었다.

캘리포니아 대지진 때 존 캐롤이 몸을 아끼지 않고 보인 리더쉽, 그리고 그의 지난 정치적 행보는 영웅을 원하는 미국 시민들의 기질과 정면으로 부합했다.

그런 존 캐롤 의원은 몇 차례나 양국을 드나들며, 한국과 미국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성공적인 합의를 이끌어냈다.

―한국이 4기, 미국이 6기로 나눌 것.

―대신 미국은 한국의 군 전면 개편 사업을 무제한으로 도울 것.

최근 사정의 칼을 휘두르는데 한창 신이 난 도원패 정권의 최고 골칫거리는 바로 군대였다.

현재 동아시아는 미국과 러시아가 한국과 극도로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북한은 이미 붕괴했으며, 중국도 분열해서 수십 개의 작은 소국으로 쪼개진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60만으로 편성된 육군 위주의 체제는 허공에 돈을 내다버리는 낭비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도원패는 사정의 칼을 휘두르면서 국민들의 응원을 한 몸에 받는 ‘맛’을 알아버렸다.

“대통령님, 적폐 청산은 분명 훌륭한 일이지만 너무 일만 크게 벌려 놓으면 다 마무리도 못하고 대통령님 임기가 끝나 버립니다. 그럼 다음 정권은 혼란을 수습하느라…….”

“알 게 뭔가. 다 때려부수기나 하지.”

한창 사회를 때려 부수는 맛에 심취한 대통령에게 그런 것 따위는 알 바 아니었다.

그저 난장판을 만들어놓다가 임기를 마치기만 해도 3조 AU이라는 거액이 손에 들어온다. 그리고 남은 인생은 북유럽에서 유유자적하게 즐기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도원패 정권은 군부에 대수술을 시행했다. 자칫 수술 도중에 죽을 수도 있는, 크고 위험한 수술이었다.

“수술 도중에 죽는다면 더 잘 됐지. 우량아를 다시 새로 낳으면 되니까.”

미국이 제공한 지난 군 로비 내역.

그 자료를 빌미로 장성들이 대거 체포되었고, 본격적인 군 비리 수사에 들어갔다. 범죄가 확인된 장성들은 불명예 제대 등 강력한 징벌 조치를 받고, 공판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미국이 제공하기로 한 지원이 시작한 것에 불과했다.

사회가 또 한 번 변혁을 맞이하고 있지만, 한서진의 관심에서는 벗어나 있었다.

그는 웜홀 생성에 성공한 후, 본격적인 레노지안 탐사를 위한 안전 확보 준비에 몰두하고 있었다.

타르타로스 3를 통해 레노지안 전역을 곳곳이 살폈지만, 그는 아무런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다.

‘어디에도 생명의 흔적은 없다. 생명이 존재했었던 흔적만 있을 뿐…….’

없는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신이 존재했다는 흔적조차 없다. 얼핏 보기에는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자연재해로 보인다.’

레노지안의 현재 모습을 보고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몇 가지로 국한된다.

먼저 대륙 전체를 강력한 독가스가 뒤덮어서 일시에 생명이 전멸했다는 것. 다른 하나는 방사선 등의 살상광선이 뒤덮어, 미생물을 포함한 모든 생명을 파괴해버렸다는 것.

한서진은 후자와 유사한 형태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었다. 꼭 방사선 같은 살상광선이 아니더라도, 어떤 초월적인 에너지가 하늘에서 쏟아져 레노지안을 전멸시킨 것이리라.

‘만약 효진 씨가 레노지안에 들어갔을 때, 또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그래서 한서진은 레노지안 전역을 샅샅이 뒤졌다. 특히 상부 맨틀 분석에 중점적으로 매달렸다.

의외로 레노지안에서는 별로 특이한 게 없었다. 오히려 상부 맨틀을 파헤칠수록 미궁 속으로 빠져 들었다.

‘이건 대체 뭐지?’

알려지지 않은, 그리고 짐작조차 되지 않는 신물질.

일단 입자 구조를 투시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어렴풋한 형체는 확인할 수 있지만, 아무리 출력을 높여도 흐릿한 수준 이상에서 더 선명해지지 않았다.

‘설마 레노지안의 마법조차 뛰어넘은 건가.’

만약 상부 맨틀이 레노지안의 문명조차 초월한 어떤 미지의 힘으로 만들어진 물질이라면, 모든 게 납득이 된다.

그것이 카드리온 가문을 몰아냈다는 신계의 문명일까?

‘하지만 상부 맨틀에는 아무것도 없다.’

상부 맨틀은 두께 20km 정도다. 지구의 부피를 생각하면 사과의 껍질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얄팍함이다.

상부 맨틀 안에 신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가설이지만, 무언가 중대한 비밀이 있는 것은 확실했다.

‘타르타로스 3로 스캔하는 것 자체는 가능하지만…… 아직 격벽을 완전히 꿰뚫어보기에는 모자라.’

격벽, 한서진이 상부 맨틀에 붙인 이름이었다.

레노지안이 멸망한 비밀은 격벽에 깃들어 있음이 틀림없었다. 따라서 격벽의 정체를 우선 파헤쳐야 했다.

‘외부 자극에 관해 일체의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격벽은 지나치게 안정적인 물질 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어쩌면 태양계에서 가장 단단한 물질인지도 모른다.

“만약 효진 씨가 웜홀 너머로 들어갔을 때, 그 침입에 격벽이 반응을 보인다면…….”

현재로서는 예측 불가능한 일이었다. 신살검의 반쪽을 마저 찾아 훗날 타르타로스 3를 완전하게 만들면 가능할까?

“갑옷이 필요해.”

한서진은 명쾌한 결론을 내렸다.

“이걸 입고 들어가라고요?”

“네. 겉보기에는 잔잔해 보이지만 그것은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 지금 상황에서 그렇다는 겁니다. 만약 외부 생명체인 효진 씨가 내부로 들어갔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으니까요.”

“어차피 사전에 동물 실험을 먼저 한다고 하셨잖아요.”

“레노지안을 멸망시킨 정체불명의 힘이 인간 같은 지성체에 우선 반응을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니까요. 그러니까 동물 실험 후 이걸 입고 들어가 주시면 됩니다.”

신효진은 금속으로 된 육중한 전신 슈트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촌스러운 디자인이었다.

‘박사님 앞에서 스타일 엄청 구기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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