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98 또 하나의 땅 =========================================================================
지구 문명의 기준으로 봤을 때, 신살검은 신화 속에 등장하는 전능한 신의 도구나 마찬가지였다. 가늠할 수 없는 막강한 힘이 안에 깃들어 있다.
‘본래는 레노지안을 가둔 감옥을 부수기 위해 만들어진 무기였겠지.’
행성을 파괴할 수 있는 힘을 신의 무기. 그것은 레노지안을 가둔 껍질, 지상을 걷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한서진은 검의 기억에서 분명히 보았다.
지구 내부에 레노지안이라는 땅이 존재하는 게 아니다. 본래 레노지안이 존재했으며, 차후에 지각이라는 껍질이 뒤덮어 가둬버린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인류, 아니 생명이 해저에서부터 지표면에 걸쳐 유기물의 번영을 이뤄냈다.
그것이 검의 기억에 담겨 있던, 지구의 진실.
‘레노지안은 껍질을 뚫고 밖으로 나오려고 했어. 하지만 실패했고, 결국 멸망했다.’
한서진은 그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신살검과 마법, 에테르 문명.
그 경이로운 문명은 신이라 불러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데 고작 그 껍질을 부수지 못하고, 멸망당해야 했다니.
‘껍질…… 상부 맨틀…… 거기에 대체 뭐가 있는 거야?’
신계라 칭해도 부족할 것 없는 세상. 그들이 항거하지 못하고 멸망당해야 했다면, 대체 어떤 존재가 그것을 행한 것일까?
그 힘의 잔재가 지금도 ‘껍질’에 남아 있을까?
“상부 맨틀에 뭔가 있다.”
송하나를 만난 건 무려 일주일 만이었다.
절대적으로 긴 시간은 아니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나던 사이에서 일주일은 참 긴 시간이다.
“오빠, 왜 이렇게 바빴어요?”
“미안, 수퍼컴퓨터 새로 설계하느라고. 학교는 잘 다니고 있어?”
“그럭저럭이요. 저도 그 수퍼컴퓨터 보여주면 안 돼요?”
한서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피식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그럼 지금 보러 갈래? 아직 만드는 중이지만.”
“네, 보고 싶어요.”
“너도 소문 들었구나?”
“시중에서 미스릴 동난 거요?”
“어, 그거.”
“네, 들었어요. 오빠가 얼마나 대단한 수퍼컴퓨터를 만드시려고 그러는지 진짜 궁금했어요.”
“보여줄게.”
한서진은 수직이착륙기를 타고 곧바로 옛 평양 인근에 있는 제2연구소 신사옥으로 향했다. 아직 공단 전체가 완공된 것은 아니지만, 주요 시설은 이미 들어선 뒤였다.
원래는 서울 외곽에 있는 연구소 사옥에 타르타로스 3를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한 번 완공하면 이동 설치가 무척 까다롭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장기적인 미래를 고려하여, 한창 건설 중이라 어수선한 H팰리스 연구소 신사옥에 굳이 두기로 한 것이다.
저 멀리 건설 중인 H팰리스가 보이기 시작했다.
서울의 몇 배에 달하는 면적을 자랑하는 종합과학연구 타운은 이제 그 뼈대가 잡히고 있었다. 아마 몇 년 지나지 않아 완성될 것이다.
“오빠, 그럼 우리 나중에 여기로 이사 와서 사는 거예요?”
“그래야겠지? 걱정하지 마. 세연동 저택하고 여기 저택 사이에 전용 웜홀 뚫어둘 거니까.”
두 저택 간에 전용 웜홀이 생기면, 마치 저택 하나처럼 활용할 수 있게 된다. 거리의 제약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아니면 아예 장인어른 댁하고도 웜홀 하나 뚫어놓을까? 왕래하기 편하게?”
“안 돼요. 그럼 엄마 아빠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올 거란 말이에요.”
“그, 그래?”
“나중에 엄마 아빠가 아무리 부탁해도 절대로 들어주면 안 돼요. 거절하기 난감하시면 제 이름 대세요.”
“알았어.”
완공 중인 새 저택 상공을 지나, 연구소 신사옥에 도착했다. 부지 대부분은 건설 크레인이 한창 공사 중이었지만, 겉모습이 대충 완성된 시설도 있었다.
한서진은 송하나를 데리고, 완공된 중앙시설로 향했다. 곳곳에서 마주친 경비원이 꾸벅 인사했다.
인증 장치를 통과하고 티타늄 합금문을 들어서자, 황금색으로 빛나는 거대한 원반이 모습을 드러냈다. 직경이 200미터가 넘어가는 거대한 크기에 송하나는 눈을 크게 뜨며 놀라서 돌아봤다.
“우와, 엄청나요. 이게 전부 다 미스릴이에요?”
“응. 지구상에서 긁어모을 수 있는 모든 미스릴을 다 긁어모으고 있는 중이야.”
“진짜 대단해요.”
황금 쟁반에 투입된 미스릴 재료비 원가만 해도 천문학적인 액수다. 그리고 재료비 그 자체가 아닌, 미스릴을 확보하기 위해 부수적으로 투입한 자금(위약금 대납, 업체 인수 비용 등)까지 합치면, 그야말로 입이 쩍 벌어질 액수가 된다.
‘1, 2조 달러 정도 되던가? 아니, 그 이상이던가?’
구체적인 액수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자신이 각오했던 것보다는 훨씬 적은 액수가 들었다고 했다. 아니면 자신이 처음부터 예산을 너무 크게 잡은 것인지도…….
“이거 구하는데 얼마 들었어요?”
“잘 모르겠어. 한국 몇 년치 국가 예산은 썼다고 하던데.”
“……세상에서 제일 비싼 수퍼컴퓨터네요.”
“완성됐을 때 이야기지. 아직은 미완성이야.”
한서진은 중심부의 홈을 가리키며 설명을 이었다.
“저기 홈이 보이지? 저기가 바로 중앙 코어를 꽂을 자리야. 코어를 꽂으면 완성돼.”
“코어는 어딨어요? 아직 만드는 중인가요?”
“이미 존재하고 있어. 다만 시스템을 융합하는데 시간이 걸려. 교류신호를 해독하는 작업이 상당히 난해하거든.”
“아직 호환이 안 되나 봐요?”
“응. 이 미스릴 원반은 코어의 에너지 연산 및 적용을 돕는 일종의 메인보드 같은 거야. 하지만 코어의 내부 언어가 해독되지 않은 이상, 아직 슬롯에 꽂을 수가 없어.”
“그럼 이제 미스릴은 필요 없는 거예요?”
“아니, 그렇진 않아.”
한서진은 거대한 황금 원반을 눈으로 훑으며 대답했다.
“코어의 파워가 워낙에 측정불가라서……. 그걸 받쳐주는 보드의 성능이 높으면 높을수록 좋지. 코어 해독 작업이 끝나더라도 보드 확장은 쉬지 않고 계속할 거야. 코어의 성능을 보드 성능이 따라잡을 때까지.”
“아, 그렇구나.”
신살검이 1천만의 파워를 지니고 있다 치자. 그리고 원반 보드의 성능이 1 정도라고 가정하자.
그럼 신살검의 파워 중에서 1 정도만 낼 수 있을 뿐이다. 나머지 9,999,9999의 파워는 그저 가만히 잔류할 뿐이다.
‘1천만 대 1 정도라도 되면 좋겠네.’
현재 원반 보드와 신살검의 성능 비율은 어느 정도나 되는지, 한서진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일단 한 번 꽂아보고 사용하면 견적이 나올까?
테스트를 하기에는 아직 신살검 해독이 덜 끝났다.
지금 이 순간에도 타르타로스 2는 모든 시스템 리소스를 신살검 파동 해석에 쏟아 붓고 있는 중이다. 그 작업이 언제쯤 끝나려는지 아득하기만 했다.
지금은 겨우 직경 200미터에 지나지 않지만, 확장을 계속하다 보면 수km가 넘어갈지도 모른다. 나중에는 LHC(대형 강입자 충돌기)를 넘어서는 크기가 될 수도 있으리라.
때문에 연구소 시설 중에서도 가장 외진 곳에 동떨어진 곳을 선택한 것이다. 충분한 확장성을 염두에 둬야 했으니.
“근데 아까부터 말씀하시는 그 코어라는 건 뭐예요? 이미 완성하셨는데 오빠도 잘 모르시는 거예요?”
“……아. 그게.”
한서진은 순간 망설였다. 정지원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지만, 순진무구한 눈으로 바라보는 그녀를 보자 괜히 마음이 찔렸다.
“비밀인가요? 저한테도?”
“그러니까…….”
“그럼 말씀 안 해주셔도 돼요. 전 괜찮아요.”
송하나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조금도 서운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아, 한서진은 더욱 미안함을 느꼈다.
하지만 레노지안을 모르는 이에게 레노지안의 지식을 전할 수는 없었다. 그게 약혼녀라 해도.
정말 괜찮다는 듯이 그녀가 팔짱을 껴왔다.
따뜻하고 뭉클한 체온을 느끼며, 그는 거대한 황금 원반을 가만히 주시했다.
그 모습은 마치 천문학적인 잠재력을 조용히 가둔 채, 한꺼번에 터트릴 날을 기다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웜홀 산업 구축을 위한 추경 예산안이 마침내 통과되었다. 세수 인상에 힘입어 추 한국은 본격적인 웜홀망 구축을 위한 기본 작업을 드디어 마쳤다.
만반의 준비를 모두 갖춰놓고 기다려주던 미국도 적극적으로 화답했다. 미국은 자기들이 먼저 시작할 수도 있지만, 한국을 생각해서 기다려주었던 것이다.
“미국과 한국은 멀지만 그 어떤 나라보다 가까운 사이가 될 것입니다. 웜홀망이 그렇게 만들어줄 겁니다.”
양국은 최초의 상업적 영구 웜홀, 평성―캘리포니아 웜홀 기점으로 하여 본격적인 웜홀망 구축 작업에 들어갔다.
국가와 국가를 잇는 3번대 넘버링 웜홀은 일단 평성―캘리포니아 웜홀 하나만 유지하기로 했다. 훗날 이동 수요를 고려해서 추가로 확장하기로 잠정 합의를 보았다.
양국은 자국 내 도시와 도시를 잇는 2번대 넘버링 웜홀을 우선적으로 구축하기로 했다.
도시가 몇 개 되지 않는 한국은 비교적 쉽게 연결 계획을 짤 수 있었다.
국제 웜홀이 있는 평성을 중심으로 10대 도시와 그 외 고양시, 용인시, 성남시, 부천시를 거미줄처럼 이으면 됐으니.
그러나 미국은 각 주가 연합된 연방제국의 형태를 띤 만큼, 2.5번대 넘버링을 설정해서 각 주를 연결하는 웜홀 게이트망을 추가 산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미국이 비록 연방국이긴 하지만 어차피 하나 된 국가다. 각 주를 연결하는 웜홀망을 따로 두는 것은 불필요한 낭비다. 굳이 그럴 필요 없이 그냥 2번대 넘버링은 뉴욕, 워싱턴 같은 주요 대도시를 연결하는 데 할당하면 충분하다.”
2.5번대 넘버링을 도입하느냐 마느냐에 따라서 천문학적인 이익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다 보니, 입장 대립을 피할 수는 없었다.
결국 미국은 상당한 진통을 겪은 끝에 2.5번대 넘버링 도입은 없던 것으로 하고, 각 주를 구분하지 않고 한국처럼 각 대도시끼리 직접 잇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SJ게이트는 내부적으로 상당한 진통을 앓고 있었다. 바로 H컨설턴트의 권고 때문이었다.
“서울을 웜홀 설치 지역에서 제외하라고요? 이제 와서요?”
“네. 인구 분산을 위해서입니다. 지금 수도권, 아니 서울에는 너무 많은 인구가 몰려 있어요. 그 좁은 지역에 대체 전체 인구의 몇 퍼센트가 몰려 있습니까?”
“…….”
“각 지역의 균형 있는 발전 도모를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 핸디캡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일부러 웜홀 설치를 안 해준다는 건 도리어 역차별 논란을 불러올 수 있는데요.”
“어차피 민간설비니까 상관없습니다. SJ게이트 대표이사를 시민 투표로 뽑는 것도 아니고요.”
“그래도 납득시킬 수 있을 만한 최소한의 명분은 있어야 합니다. 서울 인구만 천만입니다. 적어도 천만 명이 비난을 퍼부을 텐데, 나라가 시끄러워지지 않을까요?”
“어차피 2기의 웜홀 설치장치 중 우리나라에서 운용 가능한 웜홀 건 1기뿐입니다. 웜홀 하나 설치하는데 몇 달은 훌쩍 넘길 테고, 국내에 설치해야 할 웜홀만 수백 개입니다. 서울은 그냥 제일 후순위로 미루면 됩니다. 지금 상황에서 서울에 웜홀이 설치되면 집중 현상은 더욱 심해질 뿐이에요.”
“서울에 직장이 있는 이들이 지방으로 이사를 갈 테니, 인구 집중 현상이 완화되지 않을까요?”
“그런 효과도 분명 있겠습니다만, 전체적으로는 집중 현상이 더 심해질 거라는 예측을 얻었습니다.”
그렇게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지역은 웜홀 설치 계획에서 최하위 순위로 밀려났다.
============================ 작품 후기 ============================
“보드 성능을 1로 가정하자. 그리고 CPU 성능을 1천만으로 가정하면…….”
“저기요. 최소 세제곱은 하셔야지 겨우 1천만이 뭡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