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497화 (497/609)

00497  또 하나의 땅  =========================================================================

계열 수장들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한서진이 개인적으로 운용하는 초고성능 수퍼컴퓨터에 관해서.

정확한 모델명이나 자세한 스펙, 위치 등은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실체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SJ사이트의 재해 예측 모듈, H컨설턴트의 재무 감시 시스템과 인적 정보 파악 모듈 등.

그 방대한 시스템 작업을 해내려면 SJ인더스트리에서 시판 중인 메인프레인형 수퍼컴퓨터 Z시리즈로는 터무니없이 모자랐다.

그래서 한서진과 사업적으로 깊은 연관을 맺은 이들은 그가 매우 특별한 개인 수퍼컴퓨터를 개발해서 운용한다고 여겼다.

―미 국방부도 한서진한테는 그냥 자기 앞마당이나 다름없다. 털려면 언제든 털 수 있을 거다. 아마 미 국방부는 절대로 흔적이나 증거를 못 찾겠지만, 그래도 인지하고는 있을 거야.

―전산에 기록된 횡령 회계 흔적 귀신같이 찾아내는 것 봐. 진짜 엄청난 알파고를 갖고 있는 게 틀림없어.

―쉿, 그가 지켜보고 있으니 조심해. 절대 인터넷에 그를 비난하는 말을 올리지 마.

한서진은 에테르 반도체의 선구자이자, 유일한 지식인이다.

다른 이들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에테르 반도체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었다. 복제하기는커녕 아주 약간의 원리를 흉내 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런 인물이 자신의 모든 능력을 총동원해서, 전용 수퍼컴퓨터를 만들어 운용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특히 BII 프로젝트 팀에 코드네임 T2라는 컴퓨터가 제공되었다는 소문이 돌면서, 그 추정은 더욱 확고해졌다.

‘타르타로스 3?’

‘그게 박사님이 운용하시는 전용 수퍼컴퓨터 모델 네임인가?’

‘3를 제조한다는 것은…… 이미 1과 2는 존재한다는 거구나.’

계열 수장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한서진이 방금 내린 지시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무게감을 느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미스릴을 몽땅 확보하라.

시중에 풀린 물량 매입, 생산업체 인수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지주회사 에스코너가 보유한 모든 금융 자산을 털어 넣는 한이 있더라도.

‘이미 판매 중인 반도체 제품까지 회수해서 녹이라니…….’

대관절 얼마나 많은 미스릴을 털어 넣으려고 그러는 것인가?

미스릴의 학명은 스코브리아늄, 물질 발견자인 니트론 교수가 붙인 이름이다.

하지만 시중에서는 스코브리아늄보다 미스릴이라는 이름으로 주로 불린다. 니트론은 스코브리아늄을 발견한 것에서 그쳤지만, 한서진은 사용 방안을 개발하고 에테르의 시대를 여는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현재 미스릴의 생산특허는 한서진이 보유하고 있다. 니트론도 다른 생산특허를 갖고 있지만, 그 방식은 대량생산에 적합하지 않아 시중에서 사용되지 않는다.

미스릴은 반도체 외에 산업 다방면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그 무지막지한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미국의 많은 업체들이 라이선스를 받아 생산하고 있었다.

그 생산업체들과 SJ인더스트리는 미스릴을 생산할 때마다 에스코너에 막대한 로열티를 지불하고, 그것은 고스란히 한서진의 통장 잔고를 늘려준다.

“죄송합니다. 잠시 급한 통화 하나만 하겠습니다. 판매 중인 모든 반도체 제품을 즉시 회수하라고 지시하고 오겠습니다.”

“그러세요.”

한서진은 흔쾌히 양해해주었고, 칼 루이스 부사장은 전화기를 들고 서둘러 일어났다. 저런 즉각적인 반응이 무척 흡족했다.

“그럼 바로 움직여 주십시오.”

에스코너를 중심으로, ‘한서진 그룹’이 시작한 갑작스러운 행보에 국제 반도체 시장은 큰 충격에 빠졌다.

첫 변화는 바로 미스릴 시장이었다.

“미스릴이 없다고?”

“예, 아주 씨가 말랐어요. SJ인더스트리에서 전부 탈탈 긁어갔습니다.”

“아니, SJ인더스트리가 왜? 거기는 자체적으로 미스릴을 생산해서 반도체 찍어내잖아? 걔네가 가진 미스릴 생산 물량만 해도 어마어마할 텐데?”

“모르죠. 어마어마한 차세대 반도체를 이미 개발해서 융단 폭격이라도 하려는지.”

“허참. 미스릴이 씨가 말라서 이걸 어떡하냐.”

“이참에 SJ인더스트리 주식이나 좀 사둬야겠네요.”

“비상장 회사 주식을 무슨 재주로?”

SJ인더스트리는 세계 최고의 규모를 자랑하는 그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비상장 회사였다. 주주도 단 네 명뿐, 다른 이들이 주식을 산다는 건 불가능했다.

미스릴 물량의 씨 몰살은 시작에 불과했다.

“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미스릴 공급을 못하겠다니.”

“죄송합니다만 일이 그렇게 됐습니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한 거래처로부터 계약한 미스릴 물량을 공급받기 위해 찾아온 K사 임원은 황당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바로 미스릴을 공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니, 귀사와 버젓이 계약한 내용이 있고 약속한 물량이 있는데, 공급을 못하겠다는 게 말이 됩니까? 혹시 생산에 무슨 차질이 있었나요? 그렇다면 유예를 드릴 수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생산에 차질은 없습니다만, 다른 곳에 우선 제공해야 하기 때문에 당분간 귀사에 미스릴 공급을 해드릴 수 없게 됐습니다.”

“그건 명백한 계약 위반입니다! 위약금이 얼만지나 알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위약금은 방금 귀사 계좌로 송금해드렸습니다.”

“위약금 그거 얼마나 된다고! 그걸로 우리 회사가 입을 타격이 갈음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좀 넉넉히 넣어드렸으니, 손해는 안 보실 겁니다. 더 이득일 수도 있고요.”

“……?”

K사 임원은 급히 송금 내역을 확인하고 안색이 변했다.

원래 계약서에 책정된 위약금은 거래 대금의 3배다. 물론 갑작스러운 계약 파기에 따른 손해가 겨우 3배로 감당될 리가 없다.

하지만 30배에 달하는 거액이 송금되었다. 이 정도면 거래 파기로 손해를 볼 일은 없다. 오히려 남는 장사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귀사에 이 정도 자금 여력이 있었습니까?”

거래처는 라이선스를 받아 미스릴을 생산하는 중견 업체였다. 거래 대금의 30배에 달하는 위약금을 줄 만한 여유가 있었나?

“실은 저희 회사가 SJ인더스트리에 납품을 하게 돼서요. 그래서 SJ인더스트리가 위약금도 대납해준 겁니다.”

“아, 그래서…….”

“기존 거래처들에 손해를 끼칠 순 없다면서 무조건 본래 위약금의 10배를 주기로 했답니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저희도 어쩔 수 없었어요.”

“아니,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이 바닥에서 SJ인더스트리에 밉보이고 미스릴 장사할 생각은 버려야지요.”

미스릴 라이선스를 받아먹고 사는 업체가 SJ인더스트리에 밉보였다가는 다음 라이선스 갱신 때 어찌 될지 모른다. 하물며 위약금도 넉넉하게 대신 챙겨주지 않았나.

K사 임원은 다른 화제로 방향을 돌렸다.

“SJ인더스트리가 미스릴을 긁어모으고 있다는 말은 들었습니다만,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네요.”

“말도 마십시오. 원래는 우리 업체를 인수하려고 했습니다. 오너가 절대 그럴 수 없다며 완강한 거부 반응을 보여서 결국 타협을 한 거지요.”

“인수요?”

임원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지금도 SJ인더스트리의 미스릴 생산 능력은 2위가 무의미할 만큼 엄청난 수준인데, 타생산업체까지 인수를 하려고 한다?

‘대체 얼마나 미스릴 반도체 물량이 얼마나 많이 필요한 건지…….’

SJ인더스트리의 행보는 미스릴 물량을 싹쓸이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시중에 슈나우저와 코카 스패니얼, 칼라칩 물량이 싸그리 메말라 버렸다.

SJ인더스트리에서 반도체 공급을 중단하니, 해당 반도체를 탑재하는 완제품들도 생산라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모바일기기, 컴퓨터 완제품 조립 업체 등은 비명을 질러댔다.

“시중에 미스릴 물량이 씨가 말랐어!”

“미스릴만 마른 게 아니야! 미스릴 반도체도 씨가 말랐어!”

“대체 SJ인더스트리는 무슨 짓을 벌이려고 그러는 거지?”

시장에 가해진 충격은 상상 그 이상이었지만, 패닉이 전부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SJ인더스트리가 ‘준비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큰 기대를 품기 시작했다. 그 기대 심리가 반영돼서인지, 관련 증시는 오히려 껑충 뛰어올랐다.

“국제 시장에 유통되고 있는 물량의 99% 이상은 긁어모았어.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사들이고 있다.”

트레일러 차량이 쉴 새 없이 실어 나른 컨테이너가 차곡차곡 쌓인다.

“SJ인더스트리뿐만 아니라 전 계열사들이 모두 달려들어서 물량을 확보하고 있는 중이야. 지금 전자제품 시장은 비명을 지르고 있다. 잘못하다가는 쇼크사할 수도 있어.”

“설마요.”

“그만큼 미스릴 반도체가 전자제품 시장에서 절대적이라는 뜻이지. 실리콘 반도체 제품은 이제 안 팔려. 실리콘밸리도 미스릴밸리로 이름을 바꿔야 하는 거 아닌가 고민 중이라던데? 다행히 SJ인더스트리가 여기 실리콘밸리에 있어서 천운이지.”

SJ인더스트리가 정작 다른 지역에 있는데, 미스릴밸리로 지역명을 바꾼다면 참 우습기도 하겠다.

“대체 얼마나 무시무시한 괴물을 만들려고 이런 큰일을 벌이는 건지 궁금하다. 타르타로스 2만 해도 내가 보기에는 충분히 무서운 괴물이었는데.”

“괴물을 만들려는 게 아닙니다.”

“타르타로스 시리즈 자체가 결국 괴물 수퍼컴 아니냐. 그런 겸손은 안 해도 돼.”

한서진은 피식거리며 정지원을 돌아봤다. 차분히 바라보는 눈길에 담긴 고요함, 정지원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긴장감을 가다듬었다.

“괴물을 만들려는 게 아닙니다.”

“그럼……?”

“신을 만들어볼까 해서요.”

“…….”

농담처럼 쾌활한 어조,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절대 가볍지 않다.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린 정지원은 정신을 바로잡고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사람들이 신으로 오해할 만큼의 성능을 가진 수퍼컴퓨터를 한번 만들어 보려고요.”

“…….”

정지원은 우뚝 굳었다. 가벼운 전율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기본 설계는 다 됐습니다. 남은 건 섬세한 조율이죠. 중요한 건 미스릴이 얼마나 투입될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는 겁니다. 아무리 많아도 부족해요.”

한서진이 안내한 곳은, 거대한 돔형 시설이었다.

출입 인증을 통과하자 티타늄 합금제 자동문이 열리며, 넓은 내부 공간이 나타났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듯이 휘황찬란한 빛이 둘을 반겼다.

돔의 내부는 마치 거대한 황금 접시처럼 되어 있었다. 직경이 200미터는 족히 넘어 보이는 미완의 황금 접시는, 군데군데 비어 있는 곳이 많았다.

매끄러운 광택이 곳곳에서 반짝인다. 이 거대한 미스릴에 대관절 얼마나 복잡한 에테르 코드가 빡빡하게 새겨져 있을까. 상상만으로도 머릿속이 아득해진다.

정지원은 겨우 입을 열었다.

“이건…….”

“지구 버전 진리의 수정입니다. 당장은 제 능력이 모자란 관계로 이렇게 크게 만들 수밖에 없었네요. 원형은 이렇게 무식하게 크지 않습니다.”

“……진리의 수정?”

“그런 게 있습니다. 나름 흉내를 내봤죠. 성능까지 닮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한서진은 중심부를 가리켰다.

중심부에는 조그마한 홈이 파여 있었다. 그곳에 삽입될 다른 부품을 기다리는 듯이.

“미스릴로 된 원형 회로에는 에테르 코드가 새겨져 있어요. 저기에 꽂히게 될 코어를 제어하기 위한 명령어지요. 코어의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통제하려면, 원형 회로가 크면 클수록 좋아요. 그래서 무제한으로 필요하다는 겁니다.”

“……코어?”

“네, 아쉽게도.”

한서진은 비어 있는 중심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짧게 말을 이었다.

“지금은 반쪽뿐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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