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95 꿈의 건너편 =========================================================================
신살검을 손에 쥔 채, 한서진은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딱딱하고 뜨거운 손잡이의 감촉이 기분 좋은 일체감을 전해오고 있었다. 검이 자신의 일부가 된 듯한 자연스러움은 무어라 설명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검이 간직하고 있는 어마어마한 잠재력이 느껴졌다. 그중 아주 일부만 방출한다 해도, 세상 모든 것을 쓸어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절대적인 힘, 그 자체.
지구 전체를 태워버릴 수도 있는 에너지.
그 경이로운 기적이 지금 자신의 손에 온전히 쥐어져 있다. 흥분으로 몸이 떨리고, 아무리 참으려 해도 자꾸만 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한다.
검을 쥐었을 뿐인데, 온몸에서 힘이 흘러넘친다. 일찍이 그가 느껴본 적 없는 힘의 충만함이다. 아니, 지구상에서 이런 활력을 느낄 수 있는 이는 없으리라.
있다면 그는 이미 인간이 아닐 테니.
“신살검……. 이제 날 인정하는 거냐?”
본래 신효진만 쥘 수 있던 신살검, 하지만 이제는 자신도 쥘 수 있게 되었다.
연구소에 있어야 할 검이 왜 침실에 있고, 그리고 자신이 쥘 수 있게 된 것일까.
여러 가지 의문점이 샘솟았지만, 짚이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왕명.’
아마 자신이 왕명의 권능을 발현한 것을 감지한 녀석이 어떤 식으로든 응답을 한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 이제 부러진 반쪽만 찾으면 돼.’
순간 검의 떨림이 느껴졌다.
아주 깊은 곳에서 퍼져 나오듯, 크고 느린 울림이 손끝을 타고 머릿속까지 침투해왔다.
마르지 않는 물감이 흘러내리듯, 눈앞의 시야가 어지럽게 번지기 시작했다.
풍경이 헝클어지며, 의식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감각이 온몸을 뒤덮었다.
완전히 버무려진 시야 위로, 흐려진 공간감이 뒤섞인다. 둘러싼 모든 것이 부서진 글자처럼 끝없는 무저갱 속으로 떨어진다.
종결점이 보이지 않는 추락. 한서진은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지만 자신의 귓가에조차 닿지 않았다.
끝나지 않을 듯한 추락이 마침내 멎었다.
일그러졌던 풍경이 조금씩 형상을 갖춰 나가며, 어두운 공간이 보이기 시작했다.
“…….”
한서진은 창백한 안색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죽음의 땅, 그곳에는 무수한 백골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그 끝을 가늠할 수가 없다.
거대한 백골들 사이에서, 한서진은 한참이나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문득 그는 두 손을 들어 확인했다. 그리고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만져 보았다.
다행이다. 자신의 몸은 온전했다.
적어도 죽은 아서의 몸에 들어온 것은 아닌 듯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먼 곳을 주시했다.
죽은 뼈들은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하나의 흐름으로 모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중앙에는 거대한 인골산이 솟아 있었다.
무수한 뼈가 모이고 뭉치고 쌓여서 만들어진, 뼈의 무덤.
한서진은 그곳을 향해 걸었다.
좌우에 널브러져 있는 거인들의 뼈가 금방이라도 일어날 듯한 착각을 받았지만, 그는 꿋꿋이 걸음을 재촉했다.
마침내 뼈의 산 아래에 도착했다.
잠시 멈춘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이…… 어둡네.’
검은 구름이 수평선 끝에서 끝까지 전부 가려버린 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자그마한 별빛 하나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천천히, 인골산을 올랐다.
자신보다 훨씬 거대한 인간의 정강이뼈를 밟고, 척추 뼈에 올라서고, 갈비뼈를 도약하며, 거듭 위로 향했다.
드디어 인골산의 정상에 오른 그는, 눈앞의 풍경에 저도 모르게 호흡이 굳어버렸다.
‘……아서?’
낡고 헤진 망토를 두르고, 머리에는 금관을 쓴 백골이 기진맥진한 듯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여자의 것으로 보이는 가느다란 뼈가 손등에 입맞춤을 하듯 소중히 감싸고 있었다.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서로를 위로했을 두 사람, 오랜 세월에 퇴색된 아련함에 한서진은 목이 메는 걸 느꼈다.
저도 모르게 발을 뻗어, 둘을 향해 다가갔다.
바로 그 순간, 그의 접근에 반응하듯이 눈부신 섬광이 번쩍 빛났다. 한서진은 깜짝 놀라 멈췄고, 곧이어 빛이 사그라진 후 바닥에 박혀 있는 쇳조각을 볼 수 있었다.
쇳조각은 왕의 바로 옆에 박혀 있었다.
‘부러진 신살검 조각!’
잿빛 색채가 가득한 세상 속에서, 오로지 검날만이 고요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이곳에서 홀로 유리된 존재라는 것을 과시라도 하듯이.
한서진은 검날을 향해 저벅저벅 다가갔다.
검날은 무척이나 크고 높았다. 어림잡아도 수십 미터는 되어 보였다.
왕과 왕비의 거대한 백골 사이에 홀로 선 채, 한서진은 우두커니 검날을 올려다보았다.
무엇이 이들을 멸망케 했을까.
이들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이 차디찬 공간에서 이렇게 얼어붙어 있었을까.
한서진은 검날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바로 그때였다.
―안 됩니다, 폐하!
날카로운 비명과도 같은 울림이 환청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그는 멈칫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을씨년스러운 바람만이 끝도 없이 널린 백골들 위를 스쳐갈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잘못 들었나?’
떨쳐내기 힘든 불길함을 억지로 누르고, 그는 다시 검날을 향해 마저 손을 뻗었다.
차가운 금속 표면에 손끝이 닿는 순간, 짜릿한 전기가 온몸을 타고 흘렀다. 보이지 않는 폭풍이 일어나며 눈앞의 모든 풍경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시간의 태엽을 거꾸로 감듯이, 모든 것이 역주행을 일으키고 있었다.
평화로운 레노지안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진다. 세월의 흐름이 빠르게 지나간다.
군주가 이끄는 인간의 군대가 나타났다. 군대는 하늘을 향해 침공했고, 몇 번이고 거듭 실패했다. 그때마다 인간은 몰락했으나, 다시금 힘을 쌓아 번영을 일궈냈다.
그리고 마침내 아서 왕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가 이끄는 군대가 하늘을 향해 최후의 침공을 펼친다. 여기까지는 이미 기억 속에 있는 장면이다.
천장처럼 대륙을 덮은 하늘이 크게 열리기 시작한다. 이미 알고 있는, 멸망을 알리는 징조다.
이제 저 뚫린 구멍에서 신의 힘이 쏟아져 내리며, 대륙의 모든 것을 죽음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 뒤를 아는 한서진은 안타까운 마음에 저도 모르게 외치려다가, 뚫린 구멍의 건너편을 보고 굳어버렸다.
‘저게…… 신계?’
하늘 위에 존재하는 신들의 세상.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엿보지 못했던 차원, 그 건너편을 들여다본 한서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광활한 대지가 끝없이 펼쳐진 세상. 풀 한 포기는커녕 생명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널린 그저 단단한 암석뿐.
고요한 하늘에는 홀로 떠올라 암석의 대지를 비추는 둥근 별의 모습이 보인다.
바로 보름달이었다.
‘이건……!’
신계의 힘이 쏟아지는 차원의 구멍, 그 틈으로 보이는 어렴풋한 건너편의 세상. 그리고 그곳에 존재하는 달.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은가?
‘크윽!’
비명마저 삼켜버리는 어지러움이 통증처럼 온몸을 뒤덮었다. 아까처럼 주변의 시야가 일그러지며 무언가가 자신을 빨아들일 듯이 빠르게 당기고 있었다.
아까는 끝없는 무저갱 속으로 추락하는 느낌이었다면, 이번에는 쉼 없이 강제로 상승하는 감각이었다.
토할 것 같은 어지러움이 마침내 끝났다.
한서진은 어느덧 자신의 침실에 돌아와 있었다. 손에는 신살검을 쥔 채로.
“…….”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린다. 송하나는 아직 샤워 중이었다.
그녀가 보통 샤워에 20분 정도 걸리는 것을 생각하면, 방금의 기묘한 경험은 2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적어도 몇 시간은 되는 것처럼 느껴졌었는데.
한서진은 홀린 듯이 손에 쥔 신살검을 내려다봤다.
여전히 부러진 채 낮은 공명음을 울리는 녀석은, 잃어버린 절반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듯이 보였다.
“지구 내부에…… 레노지안으로 가는 차원문이 있던 게 아니었어.”
그는 입술을 깨물며,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레노지안은 바로 지구 내부에 있었던 거야! 아니아니!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그는 미친 사람처럼 거칠게 머리를 긁으며, 원치 않는 진실을 기어이 인정했다.
“레노지안이 지구 내부에 있던 게 아니라…….”
그는 고개를 들어 창밖 너머 하늘을 바라봤다. 밤하늘에는 찬란한 보름달이 걸려 있었다.
최후의 순간, 아서 왕이 추락하기 직전 보았던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아마 보름달이 빛나는 찬란한 우주, 그 끝없이 방대한 자유의 공간을 보고 있었으리라.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저것을.
닿을 수 없는 그곳을 향해 손을 뻗으며, 아끼는 초룡과 사랑하는 왕비와 함께 추락했겠지.
“지구 표면이…… 레노지안 행성을 가둔 감옥이었던 거야.”
“……!”
왕은 멈칫해서 굳었다가, 서서히 뒤를 돌아보았다. 마치 무언가 이상한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말없이 그를 따르던 수행원 중 시종장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폐하, 무엇이 불편하신지요?”
“……방금 이상한 소리를 듣지 못했느냐?”
“죄송합니다. 소인은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습니다.”
“이상하도다. 분명히 무언가 들렸는데…….”
왕은 찜찜한 표정을 거두지 못한 채, 연신 소리가 느껴진 방향을 자세히 살폈다. 보다 못한 시종장이 재촉했다.
“어서 가시지요. 시간이 없습니다. 대소신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음…….”
왕은 시종장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걸음을 떼지 않았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푸른 광휘가 지평선 끝에서 끝까지 펼쳐진 공간, 그러나 저것은 신계와 인간계를 가르고 있는 장벽일 뿐이다.
“저 결계 너머에는…… 우리 레노지안과 같은 땅이 대륙의 모래알처럼 무수하게 널려 있다 했던가.”
“레노지안인이라면 어린아이도 모두 아는 사실 아닙니까. 갑자기 그 말씀은 왜…….”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는구나. 굳이 신좌를 탈환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이곳 레노지안에서도 이미 우리 왕국은 충분히 번창하고 있거늘…….”
말을 하다 말고 왕은 멈칫했다.
방금 자신이 뱉은 말에서 무언가 기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이건 진정 나의 신념인가?
그때였다. 하늘의 한쪽이 아주 조금 열리는가 싶더니, 그 틈 사이로 무언가 찬란한 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왕은 눈을 크게 뜨고, 그 부분을 자세히 살폈다. 그러나 반짝거림은 곧 사라지고, 창공이 다시 뒤덮었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레노지안, 모든 것이 멸망한 죽음의 세상.
끝없이 널린 백골들은 자신들이 뭉쳐 만들어낸 해골 왕좌에 군주를 모시고 있었다.
금관을 쓴 백골, 그리고 그의 손등에 키스하듯이 쓰러져 있는 가녀린 여인의 뼈.
그들의 사이에 수직으로 박혀 있는 은색 검날이 찬란한 빛을 발했다. 마치 이곳 죽음의 세상에서 홀로 생명을 띠고 있음을 널리 알리듯이.
왕과 조금 떨어진 곳에 시립하듯 서 있는 백골이 있었다.
낡고 헤진 로브를 쓴 백골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한 톨의 생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빛을 뿜는 검날은 계속 흔들리며, 조금씩 조금씩 바닥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로브를 쓴 백골이 끼기긱거리며 움직였다.
느릿한 움직임으로 걸어간 백골은 상승을 준비하며 흔들리는 검날 위에, 살점 하나 없는 손가락을 지그시 올렸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검날은 진동을 멈추고, 빛을 잃었다.
백골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처음부터 움직인 적 없는 듯이 그곳을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