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492화 (492/609)

00492  꿈의 건너편  =========================================================================

칩셋 무단운용은 범죄가 되지 않아 무죄.

그런 판결이 나오자 여론은 다시 한 번 분노했고, 유가족들은 법원 앞에 돗자리를 깔고 드러누웠다. 언론사들은 그 모습을 낱낱이 보도했고, 애널리스트들은 국민감정과 법률 해석의 차이에 심각한 괴리가 있음을 지적하며 유감을 표했다.

“국민들이 납득하지 못하는 법이 과연 옳다고 할 수 있는가?”

“국민과 법이 대립할 때, 당연히 법이 무릎을 꿇어야 하지 않는가? 모든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소위 지식인들이라는 이들은 이번 사건이 유죄가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검찰이 노리는 것은 어차피 유죄가 안 될 거, 이철준 전 시장을 만신창이로 만드는 거야. 그럼 국민들 속이라도 조금 달래지겠지.”

“정치권은 벌써 칩셋 관리에 관한 행정법 상정안을 준비하고 있다던데.”

“근데 청와대가 의외로 조용하네? 도 대통령 신나서 칼춤 한 번 또 출 줄 알았더니.”

“요새 하도 춰 대서 이 정도는 나설 것도 아니라는 거지. 여론이 알아서 심판해주고 있으니까.”

무죄 선고를 받은 이상 이철준은 더 이상 구치소에 있을 이유가 없었고, 즉시 풀려났다.

그는 국민감정을 고려하여 조용히 사택으로 떠났다. 언론에 얼굴을 비추는 등 국민들을 자극하는 일은 삼갔다.

검찰은 즉각 항소를 준비했고, 이철준 역시 기나긴 법적 투쟁을 예상하며 대응할 준비를 갖췄다.

어차피 범죄가 되지 않는 이상, 검찰의 목적이 자신을 만신창이로 만드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나마 검찰 외에 다른 세력이 나서지 않는 게 그에게는 천운이었다. 이를테면 청와대라든가, 한서진이라든가…….

그러나 무죄 선고를 받은 그날 저녁, 그의 집에 또다시 검찰이 들이닥쳤다.

“뭐, 뭐야! 무슨 짓이야! 난 무죄라고!”

“당신은 현재 정치자금법 위반, 직장 내 성추행, 외환거래법 위반, 공공자금 횡령 혐의로 기소 중입니다. 도주 및 증거 인멸의 우려가 있어 체포, 구속합니다.”

이철준은 칩셋 횡령을 기소하면서 발각된 다른 혐의가 있었다. 검찰은 그것을 근거로 또다시 그를 구속한 것이다.

결국 그는 풀려난 지 하루도 되지 않아 다른 범죄의 도주 및 증거 인멸 우려로 잡혀 와야 했다.

볼썽사나운 꼴로 심야에 끌려가는 그 모습은 여지없이 매스컴을 탔고, 국민들은 눈을 비비며 생중계로 지켜보았다.

“검찰이 작정하고 일부러 노린 거네. 풀려나자마자 다시 잡아오면서 망신 주려고.”

“왠지 계속 풀어주고, 잡아오고, 풀어주고, 잡아오고, 그렇게 반복할 것 같다. 이철준 피가 마르겠어.”

“그런 놈은 피가 말라붙어도 싸! 그놈 하나 때문에 몇 백 명이 죽었는데!”

칩셋 무단운용은 3심까지 가더라도 유죄가 되기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번에 밝혀진 다른 혐의는 충분히 유죄 판결을 이끌어낼 수 있다. 그래봤자 형량 몇 년에 벌금 얼마나 최대의 형벌이지만.

“모든 공판이 끝날 때까지 지독하게 괴롭힘 당하면서 만신창이 되고, 다른 범죄 혐의로 징역 몇 년 살아야겠네. 그게 이철준의 운명이다.”

“그래도 그놈이 저지른 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냐. 대체 왜 법은 항상 그따위인 거야? 누가 봐도 쳐 죽여야 할 놈인데 조항이 없다는 이유로 처벌을 못하다니, 이게 말이 돼?”

“판사들이 이철준이한테 돈 먹은 게 틀림없다. 판사들 재산이나 계좌 내역 낱낱이 확인해라.”

“솔직히 법이 그래서 판사가 처벌 못하는 건 어쩔 수 없는 건데, 너무 판사 탓만 하는 것도 별로다. 욕을 하려면 법을 그따위로 만들어놓은 국회의원을 욕해야지.”

“검찰 응원한다. 어차피 유죄 못 받아낼 거, 최대한 괴롭혀서 이철준 멘탈이나 걸레로 만들어줘라.”

900여 명이 죽고, 천여 명이 넘게 불구가 된 참사.

이철준의 행위가 범죄사실을 형성하지 않는다 해도 도덕적으로는 분명한 책임이다. 국민들은 그를 용서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어디 내가 이대로 무너질 줄 알고.’

수감복을 입은 채 독방에 앉은 이철준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신이 바로 어제까지 썼던 독방은 하루 동안 전혀 변한 게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전혀 손대지 않은 것이다.

―쉽지 않을 겁니다. 세상 모두가 적입니다.

마치 자기 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무미건조했던 변호사의 설명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나마 다행인 건 청와대와 세연동에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거기에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검찰이 이것저것 혐의를 걸고넘어지고 있지만, 실제로 유죄 판결을 끌어내기는 어렵다.

항소심에 들어간 칩셋 무단 운용 사건은 시간과 체력만 소모할 뿐, 결국 2심이든 3심이든 무죄 판결로 끝날 것이다.

압수수색 과정 중 다른 혐의 역시 마찬가지, 정치자금법 위반과 횡령 혐의 등 다양하게 물어뜯고 있지만, 증거 자료를 볼 때 유죄 판결을 끌어내기는 어렵다.

검찰이 철저한 불법을 저지르지 않는 한, 자신을 어떻게 하지는 못한다. 이철준은 굳게 믿고 있었다.

‘기다리고, 참기만 하면 된다.’

구속 수감 생활이 몸에 맞지 않고 고달파서 괴로웠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

떳떳하게 출소하는 즉시 해외로 이민가면 만사 끝이다. 국민 반감이 드세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역시 LA 한인타운이 좋겠지?

“면회다.”

늦은 시가인데 갑자기 교도관이 찾아왔다. 이철준은 조금 의아했다. 이 시간에는 면회 허용이 안 될 텐데?

‘정치권? 아니면 검찰?’

일반적인 면회는 아닐 것이다. 아마 정치권이나 검찰에서 타협을 위해 조용히 찾아온 것이리라.

이철준은 의젓한 표정을 갖추고 일어나서 교도관을 따라갔다. 협상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침착한 태도가 중요하다.

‘누구지?’

면회실 입구에 건장한 두 명의 남자가 서 있었다. 면회자가 데려온 수행비서는 아닌 듯하고, 경호원인가?

‘꽤 중요한 사람인가?’

그는 경호원들을 스치면서 입장했다.

면회실 탁자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좌우에는 백인 경호원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 이철준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전혀 뜻밖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앉으시죠, 이철준 전 시장님.”

“……아. 실례했어요. 저기, 제가 뭐라고 칭해야…….”

“한서진 씨라고 불러도 좋고, 아니면 한 대표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편하신 대로 하세요.”

한서진은 팔짱을 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단순히 고쳐 앉았을 뿐이지만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진다.

“앉으시죠.”

이철준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맞은편에 앉았다.

그의 좌우에 시립한 백인 경호원 둘이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허튼 짓을 했다가는 그대로 바닥에 내던지고 목을 조를 기세였다.

“수감 생활이 많이 힘드시겠습니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처사라 생각합니다. 응당 제가 감내해야 할 일입니다.”

머릿속이 팽글팽글 돌았지만 이철준은 필사적으로 태연함을 유지했다.

‘왜지? 왜 날 찾아왔지?’

좋은 의도로 찾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럴 성향도, 필요도 없는 인물이니까.

차분히 바라보는 시선에 온몸의 세포가 예민하게 반응했다. 마치 천적을 눈앞에 둔 초식동물이 된 기분이다.

“시장님, 아니 이철준 씨가 처한 사건, 저도 개인적으로 검토를 해봤습니다. 물론 법률 지식이 별로 없어 전문가의 의견을 참고했지요.”

이철준 씨, 라고 불린 게 참 얼마만인가.

그러나 이철준은 불쾌한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는 얼마든지 그래도 되는 인물이었다.

“법원의 판단이 맞더군요. 처벌 조항이 없으니 범죄는 안 되고, 정치가로서 도덕적인 책임만 남는 거지요.”

“…….”

“정말 궁금한 게 있는데, 애완계를 구하기 위해 소방 칩셋을 화재 진압에 쓴다는 걸 당시에 전혀 인지 못했습니까? 측근들이 충성심에서 무단으로 행한 일인가요?”

“저는…… 전혀 몰랐습니다.”

이철준은 억지로 쥐어짜내듯이 대답했다.

한서진은 말없이 자신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차가운 시선에 그는 몸 둘 바를 몰랐다. 마치 자신의 속마음이 그대로 투영되는 듯한 불쾌감이 온몸을 긁어댔다.

“거짓말을 하시는군요.”

“……?”

“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거짓말을 하고 계시는군요.”

“한서진 박사님, 어디서 무슨 말씀을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저…….”

“제 말을 먼저 들으세요.”

한서진이 조용히, 하지만 차갑게 일갈하자 이철준은 자동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이철준 씨가 한 게 범죄가 아니라는 건 압니다. 하지만 분명히 잘못은 맞지요. 매뉴얼을 어기고, 하나 밖에 없는 재고분을 허망하게 날려버렸으니까요. 차라리 다른 도시에서 지원받아 하나만이라도 채워 넣었다면, 이틀 뒤 C몰 테러에서 더 많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 겁니다.”

“……죄송합니다. 모두 제 불찰입니다.”

“그 분들에게 죄송한 마음은 있으시다는 거죠?”

“다, 당연합니다. 비록 저의 행위가 범죄사실을 구성하진 않더라도, 저는 시민들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시장으로서 분명한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평생 속죄하면서 살아가겠습니다.”

“그럼 하세요. 속죄. 사죄. 배상.”

이철준은 고개를 들고, 떨리는 눈빛으로 한서진을 응시했다.

그는 덤덤하게 쐐기를 박았다.

“이철준 씨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사죄와 배상을 하세요. 그럼 저도 아무것도 하지 않겠습니다.”

면회가 끝나고, 한서진은 돌아갔다.

수감실로 돌아온 이철준은 어둠 속에 주저앉은 채 복잡한 생각에 휩싸였다.

그가 남긴 차가운 말이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사죄? 배상?’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한서진은 자신이 아무런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죄형법정주의로 따지면 억울하기 그지없는 일 아닌가.

‘법이 무죄라고 했는데, 나더러 책임을 지라고?’

이철준은 이를 악물었다.

발버둥 쳐봤자 소용없다는 걸 안다. 한서진이 눈길을 주지 않았다면 모를까,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으니.

‘해외로 이민이나 가려 했는데…… 이왕 이렇게 된 이상 모양 좋게 사죄하고 한국에 계속 눌러 사는 것도 괜찮겠어.’

이철준은 애써 마음 편한 방향으로 생각했다.

항소심은 의외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철준이 법정에서 순순히 진술을 시작한 것이다.

“……제가 직접 지시한 것은 아니나, 간접적으로는 제가 지시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측근들이 소방팀을 압박하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체 묵인했습니다. 그러니 모든 게 저의 불찰입니다. 시민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법의 근엄한 처벌을 바랍니다.”

갑작스러운 고해성사에 방청석을 가득 메웠던 방청객들도 어리둥절했다. 검찰과 변호인, 심지어는 재판부마저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철준은 항소심에서 모든 게 자신의 잘못이라며 줄줄이 진술을 읊어댔다. 또한 그날 심리가 끝난 후, 호송 중 인터뷰를 요구하는 기자들에게 폭탄선언을 했다.

“사죄의 의미로 피해자 분들께 300억 원을 내어놓겠습니다.”

그의 공식 재산 내역은 350억 원, 무려 6/7을 내놓겠다는 선언에 언론은 혼란에 빠졌다.

생중계로 나오는 호송 장면을 지켜보던 한서진은 천천히 소파에 등을 묻었다.

“고작 그게 최선인가.”

============================ 작품 후기 ============================

“그게 최선입니까? 심장 정도는 기증했어야지!”

“그, 그럼 죽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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