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91 꿈의 건너편 =========================================================================
이철준 시장의 정계 은퇴 선언은 온 나라를 분노로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수백 명이 죽은 사건, 심지어 그 장소도 서울 최대 번화가의 대형종합전시몰이다.
수백 명이 죽었고, 천 명이 넘게 다치고 불구가 되었는데, 고작 정계 은퇴로 갈음하겠다?
국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고, 여론은 심판을 요구했다.
검찰은 즉시 수사에 나섰고, 이철준 시장측은 최고 로펌의 유명 변호사들을 고용해서 대응했다.
사정의 칼날 때문에 전관예우가 예전 같지 않다지만, 대법관 출신으로 구성된 굳건한 변호인단층을 형성하면 검찰측도 부담이 될 거라는 계산이었다.
한창 사정의 칼날을 휘두르기 바쁘던 청와대는 의외로 침묵을 고수했다. 이철준 전 시장의 편을 들어서가 아니라, 이미 계산을 마쳤기 때문이었다.
‘결국 무죄로 판결날 사건.’
청와대는 내부적인 법률 요건 검토를 통해 이미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이철준이 소방 칩셋을 시청 화재 진압에 쓰라고 직접 지시한 바는 없다. 그의 최측근들이 애완계(鷄)가 안에 있는 걸 알고, 현장 소방팀을 압박했을 뿐이다.
그리고 칩셋을 투입한 것 자체가 죄를 구성하지도 않는다. 어쨌거나 불을 진압하기 위해서 썼으니까.
인명이나 막대한 재산 피해 등이 우려 될 때만 써야 한다? 그것은 어차피 내부적인 사용 지침일 뿐, 그것을 어긴다고 범죄사실이 되지는 않는다.
즉 법을 아예 뜯어고치거나, 아니면 없는 증거를 만들어내서 무고하게 몰아가지 않는 한, 이철준이 유죄 판결을 받을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국민들에게 백날 설명해봤자, 분노에 빠진 이들이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자칫 그 반감이 행정부와 사법부를 향해 쏟아지면 큰일 난다.
그런 계산이 섰기에 청와대는 이철준 사건을 지켜보기만 할 뿐, 어떤 코멘트도 삼갔던 것이다.
검찰 역시 수사를 진행하면서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이거, 유죄 못 끌어내지?”
“이철준 전 시장이 도덕적, 정치적으로 큰 잘못을 저지르긴 했지만 형사처벌감은 아니야. 어떤 조항을 가져와도 적용이 안 돼.”
“측근들 회유해서 이철준이가 지시했다고 억지로 그림 만들어봤자 소용없겠지? 시청 불 끄는데 마력 칩셋 쓴 게 범죄는 아니니까.”
“이거 기소할 수도 없고, 참.”
피해자와 유가족, 그리고 국민들의 분노를 생각하면 응당 기소를 해서 사형을 수백 번은 구형해도 모자라다.
그러나 검사로서, 단지 국민의 분노 때문에 범죄 요건 형성 자체가 안 되는 사건을 기소한다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해야지, 기소.”
“김검? 진심이야?”
검찰을 이끄는 젊은 폭풍의 핵, 김시형 평검사가 차갑게 말을 이었다.
“그 새끼 처벌을 못하면 구속 수사를 하든 공판으로 질질 끌든 해서 괴롭혀 줘야지. 범죄 요건 안 된다고 그런 큰 잘못을 저지른 놈을 놔둬?”
“하지만…….”
“검사가 범죄 혐의 있다고 조사해서 기소하는 게 잘못은 아니잖아? 정말 죄가 없다면 판사가 무죄 때릴 테고, 그때까지 만이라도 괴롭혀줘야지. 그놈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세상이 널리 까발려져서 한국에 평생 발 못 붙이고 살게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
“그렇게 일을 크게 키우면 정치권에서 어떻게든 나서서 거들어주겠지. 하다못해 칩셋 관리 법안이라도 상정할 수 있잖아. 그런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뭐든 해야지.”
“뭐든 하자?”
“그래, 뭐든.”
차가운 김시형의 눈빛이 동료들을 훑었다.
“미친개처럼 물고 늘어져 보자고.”
C몰, 테러 당일.
당시 한서진은 레노지안으로 이어지는 마법진, 혹은 웜홀 같은 존재가 지구 내부에 있으리라는 추정하고, 수색을 위한 에테르 스캐닝 공식을 다듬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다가 테러 소식을 접하자마자 그는 급히 헬기를 타고 현장으로 향했다.
그의 진단에 따르면 이 나라 행정부의 재난 대응 시스템은 엉망이다. 갑작스러운 테러, 그리고 일일 유동 인구가 10만에 달하는 대형종합전시몰. 어설픈 대응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피해가 야기된다.
“왜 아직도 화재 진압을 못 하고 있습니까? 소방 칩셋 하나면 불길이 완전히 잡힐 텐데요.”
「서울에는 칩셋 재고분이 없습니다! 지금 수원에서 급히 재고분을 가져오는 중입니다!」
“뭐라고요?”
한서진은 어이가 없었다. 서울에 재고분이 없다니?
초기에 그가 칩셋을 일일이 수작업으로 만들 때에는 한 달에 90개 정도가 한계였다. 그나마 그가 열심히 작업에 몰두한다는 전제 하에서다.
그러다가 양산 방식을 개발하면서, 칩셋의 생산량은 대폭 늘어났다. 물론 공장에서 찍혀 나오는 다른 공산품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지만, 수작업 생산에 비하면 양산이라고 할 만하다.
“지금 제가 아는 것만 해도 우리나라 재고분 물량이 200개는 될 텐데요?”
자신이 잘못 알았나 싶어 한국 전체 재고분을 확인한 한서진은 날이 선 목소리로 추궁했다.
화상 통신 화면 속의 장관은 식은땀을 흘리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그것이…… 각 지자체에 분산 배치한 소방 칩셋은 엄연히 그 지자체에 우선 권한이 있는 거라서요. 지금처럼 실제 상황이 벌어진 게 아니면 강제로 가져올 수 있을 권한이 없습니다.」
“서울 재고분이 떨어진 것 자체가 실제 상황 아닌가요? 소화기를 상시 준비하고 있어야지, 불 나오면 빌려주겠다는 건 대체 무슨 발상입니까? 바로 코앞에 비치해두고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죄송합니다.」
이런 것도 소위 말하는 지역 이기주의에 속하는 건가? 한서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나라가 필요로 하는 소방 칩셋의 양은 충분하다.
그러나 그것을 너무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지 않은가. 각 지자체에 나눠주고 알아서 쓰라니.
현재 나라가 필요로 하는 양이 모자란 게 아니다. 효율적인 분배와 운용을 전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이런 사단이 벌써 두 번째지.’
어느덧 헬기는 사고현장에 도착했다. 한서진은 임시 통제센터에 들어서자마자, 들고 있는 태블릿 PC에서 대기 중인 프로그램을 활성화시켰다.
그 순간 통제센터에 있는 모든 컴퓨터 화면이 지직거리는 노이즈로 뒤덮였다가, 곧바로 전혀 다른 화면으로 바뀌었다.
“어엇?”
“이게 뭐야? 해킹당했나?”
통제직원들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가, 그제야 한서진을 발견했다. 장관이 부리나케 달려와서 그의 앞에 머리를 숙였다.
“시간이 없어서 여기 있는 컴퓨터 통제권한을 일단 가져왔습니다. 사고 현장 내부 상태를 실시간으로 띄워드릴 테니, 그에 따라 구조팀을 운용하세요.”
“엇! 부장님! 이것 좀 보세요!”
화면에는 C물 내부가 3D 시뮬레이션 지도로 표시되고 있었다. 안에 갇힌 사람들의 위치, 상태, 구조 필요 의존도가 상세히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최적화된 구조를 위한 동선 및 구조팀 운용 권고안이 별첨되어 있었고, 그것도 실시간으로 대응하여 바뀌고 있었다.
그제야 장관은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뭣들 하나! 빨리 서둘러!”
“네!”
암담하기만 했던 상황에서 한 줄기 희망이 보였다. 그것도 아주 두껍고 굵은 희망이.
통제센터는 아까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소음으로 가득 찼다. 아까는 절망과 암담함으로 가득 찬 소음이었다면, 이번에는 희망으로 물든 소음이었다.
한서진은 통제센터의 중심에 서서 팔짱을 낀 채 구조 지원 활동을 지켜봤다. 그가 외부인이 아닌 이곳의 지휘관이라도 되는 듯한 분위기였다.
통제를 위해 왔던 장관은 마치 그의 보좌관이라도 되는 듯 옆에 딱 붙어서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구조 활동이 끝나고, C몰 내부의 산 사람은 물론이고 죽은 이들까지 완전히 수습을 마치고 나서야 한서진은 통제센터를 나섰다.
대기 중인 헬기에는 신효진이 있었다.
“언제 왔어요?”
“세 시간 전에요.”
“불편하게 왜 여기에서 있었나요? 그냥 퇴근하시지.”
“고용주가 밤샘 비상대기 중인데 비서가 어떻게 마음대로 퇴근해요.”
한서진은 쓴웃음만 지었다. 그녀의 말투에서 묘한 의문이 느껴져서였다.
“박사님이 현장까지 직접 찾으실 필요나 이유가 있나요? 책임자도 아니시잖아요. 사실 우리도 지금 급하잖아요.”
레노지안 연결 통로가 지구 내부 어딘가에 있다는 게 확실해진 지금, 신효진은 어떤 때보다도 초조해하고 있었다.
레노지안이 멸망한 것은 알지만, 그래도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한서진도 마찬가지였고.
“그래도 제가 와서 피해가 이 정도로 그친 겁니다. 아니었으면 몇 배는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걸요.”
“그래요? 그건 몰랐어요.”
한서진이 통제센터에서 무엇을 했는지 몰랐던 신효진은 그렇구나 하고 순순히 수긍했다.
“레노지안을 찾는 것도 중요하죠. 하지만 그건 지금 제가 사는 현실을 더 알차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꿈을 좇자고 현실을 내팽개칠 수는 없죠.”
“…….”
말없이 그를 가만히 응시하던 신효진은 한참 뒤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레노지안이 이미 없어졌다는 이유로, 박사님이 포기하는 일이 없기를 바랄게요.”
“물론이죠. 저는 신살검을 온전한 상태로 다시 돌리고 싶거든요.”
이철준 전 시장의 재판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출국금지 신청을 건 이후 검찰은 구속 신청을 했고, 법원은 기각했다. 증거 인멸이나 도주의 우려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상식적으로 유죄 가능성이 거의 없는 사건인데 도주한다는 게 말이 되나?”
그게 이 사건을 바라보는 법원의 관점이었다.
아직 공판이 열린 건 아니지만, 드러난 정황만 봐도 검찰이 무리한 기소를 진행 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철준을 편들어서가 아니라, 법률적인 판단에서 구속을 허가하는 것은 무리수였다.
그러나 구속 영장이 기각되자 곧 여론이 들고 일어났다. 매일같이 대법원과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시위가 일었다.
검찰은 다시 한 번 구속 영장 신청을 했고, 여론의 포화에 시달린 법원은 어쩔 수 없이 영장을 허가했다. 압수수색영장이 덤으로 따라왔다.
검찰은 영장이 나오자마자 즉시 이철준의 자택을 덮쳤다. 그에게 수갑과 포승줄을 채우고 호송차에 실어서 구치소로 데려갔다.
언론사는 버려진 뼈다귀에 달려드는 하이에나떼처럼 놓치지 않고 끈질기게 호송 장면을 찍어댔다. 이철준의 자택, 사무실, 은행 금고 등 모든 자료가 낱낱이 털렸다.
이철준은 천하의 죽일 놈이 되었고, 검찰은 영웅으로 우뚝 솟아났다.
“국민들의 분노는 이해하지만 이철준 시장의 행위는 범죄 형성이 될 수 없다. 죄형법정주의를 위반할 수는 없지 않나.”
학자들의 그런 우려는 아무런 여론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오히려 마녀 사냥을 당하듯이 털리기만 할 뿐이었다.
마침내 공판이 열렸고, 모든 것을 건 싸움이 시작되었다.
검찰은 압수수색 과정에서 나온 다른 범죄 혐의를 추가로 기소해서 물고 늘어졌고, 변호인단은 치열하게 대응했다.
마침내 칩셋 무단운용 사건에 국한된 첫 선고가 나왔다. 공소사실이 범죄가 되지 않는다는 무죄 판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