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89 꿈의 건너편 =========================================================================
레노지안은 멸망했다.
그들이 꾼 꿈은 현재나 미래가 아닌, 과거에 일어난 일을 복기한 것이었다. 더 이상 부정해봤자 의미가 없는, 이미 종결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게 하나 있어요.”
“뭔가요?”
“한 번 꿈이 닫혔다가 다시 들어간 꿈…… 그건 제 꿈이 아닌 것 같아요. 다른 누군가의 꿈이 틀림없어요.”
신효진이 이미 전에 말했던 사실이다. 그러나 그녀는 단순히 이야기를 반복하기 위해서 말을 꺼낸 게 아니었다.
“처음 제가 꾸었던 꿈은 스칼린 왕비…… 그러니까 제 전생이 맞는 것 같아요. 하지만 두 번째로 꾸었던 꿈은 달랐어요. 제가 누군가의 꿈으로 들어간 게 틀림없어요.”
“…….”
“그건 대체 누구의 꿈일까요?”
이미 멸망한 레노지안, 하지만 그 꿈이 존재한다면 누군가가 살아있다는 뜻일까? 아니면 어딘가에 환생했다는 뜻일까?
“그리고 아버지가 말씀하신 것도 마음에 걸려요.”
신효진은 가슴에 살며시 손을 얹은 채 말을 이었다.
“저 때문에 모든 게 헝클어졌다느니, 저의 세상으로 돌아가라느니 하는 말이요. 저는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돼요.”
“혹시 코르비우스 대마도사의 꿈일까요?”
“그건 아닌 것 같아요. 근거는 없지만, 아버지의 꿈은 절대 아닌 것 같아요.”
“그럼 아서 왕의 꿈?”
“……하지만 아서 왕은 죽었, 아니 제 눈앞에 있잖아요.”
한서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와 시선을 부딪쳤다.
“효진 씨는 정말로 제가 아서 왕의 환생이라고 확신하시나 봅니다.”
“환생이 아니고서야 그렇게 똑같을 수가 있나요? 그리고 박사님은 리온, 아니 아서 왕의 권능을 사용하시잖아요. 통찰안, 그리고 왕명까지…….”
“제약이 커서 제대로 쓰지도 못해요. 그나마 통찰안은 쓸 만하지만 왕명은 한 번 썼다가는 며칠을 앓아누워야 합니다.”
“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박사님이 아서 왕의 환생이라는 증거잖아요.”
“제가 환생이라고 칩시다. 그럼 아서 왕은 죽었다는 건데, 어떻게 그의 꿈에 들어갈 수 있겠어요?”
“……모르겠어요. 모르겠어.”
신효진은 혼란에 빠진 듯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자신의 추론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틀림없을 텐데. 그 꿈, 리온의 꿈이 틀림없을 텐데. 근데 리온은 오래 전에 죽었고, 박사님으로 환생했고, 그럼 대체 그 꿈을 꾸는 것은 누구죠…….”
“…….”
다른 누군가가 꾸는 꿈이라면, 그건 대체 누군가.
답을 찾을 수 없는 물음에, 한서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신효진이 넋이 나간 듯이 멍하게 중얼거렸다.
“우리는 여태 헛짓을 한 거예요. 이미 레노지안은 멸망했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는데…….”
“효진 씨.”
그녀의 눈가에 비친 눈물을 본 한서진은 목이 멨다.
그녀에게 레노지안은 그저 꿈이 아닌, 또 하나의 현실이었다. 삶의 절반을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희망이란 처음부터 없었던 것보다 빼앗겼을 때 더욱 아픈 법.
레노지안을 비극에서 구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이 무너지면서, 가슴도 함께 무너졌다.
한서진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신효진의 소리 없는 흐느낌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던 그는 퍼뜩 어떤 생각이 들었다.
“저, 그런데 효진 씨.”
“네.”
“마지막에 봤다는 장면, 다시 한 번 설명해 주시겠어요?”
“레노지안이 죽음의 땅으로 변한 거요? 그건…….”
“아니, 그거 말고요.”
신효진의 얼굴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그는 무엇을 알고 싶어하는 걸까?
“한 명도 남김없이 모두 죽어서 백골이 되었다고 했죠. 아서 왕도, 스칼린 왕비도…….”
“네, 맞아요.”
그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괴로운지, 신효진의 음성이 잠겨 들어갔다.
“부러진 신살검이 하늘에서 떨어졌다고 했죠? 그리고 아서 왕의 백골 옆에 박혔다고…….”
“네, 그랬…….”
무심코 대답하던 신효진은 그제야 한서진이 무엇을 짚어내고 있는지 깨달았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둘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혹시 해저 아래에……?”
“레노지안과 연결된 웜홀이 있는 건지도 몰라요! 신살검은 그걸 타고 지구에 떨어진 겁니다!”
서울, C대형종합몰.
몇 개나 되는 블록을 홀로 집어삼킨, 번화가의 중심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 종합몰이었다. 영화, 쇼핑, 공연, 전시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오락거리를 하나의 건물 안에 구축한, 서울 시민들의 자랑거리.
여느 때라면 서울에서도 손꼽히는 높은 몸값과 그 위용을 마음껏 뽐내고 있었을 놈이다.
그러나 지금 건물은 불타고 있었다.
「C-35 구역, 붕괴 전조입니다! 화재로 연기가 가득 차서 시야 확보가 어렵습니다!」
「K-21 구역, 십여 명의 중상자 발생! 구조가 시급합니다!」
「S-7구역,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생존 가능성은 절망적입니다!」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자이언트 빌딩은 곳곳에 불이 붙은 채 고통스러운 비명을 토해내고 있었다. 수십 개가 넘는 출입문과 비상구를 통해 사람들이 끝없이 쏟아져 나온다.
급히 조성된 컨트롤 타워는 난리도 아니었다.
“대체 뭐야? 테러인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쩔쩔매는 직원의 목소리에 조한규 장관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저 꼴을 봐! 설마 저게 가스 폭발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죄, 죄송합니다!”
“빨리 뒤져! 분명히 테러가 틀림없어!”
컨트롤 타워 내부에서부터 현장까지, 모든 것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마치 지옥이 강림한 듯했다.
“마력 칩셋! 칩셋은 대체 어디 있나!”
어떤 화재든지 완벽하게 진압하는 마력 칩셋, 소화 작업에 있어서 절대 없어서는 안 될 보물이다.
현재 물량이 한정되어 있어 현재 미국과 한국에서만 공급되고 있는 중이었다. 타국 재해부서에서도 군침을 흘리며, 외교 시장에서 매번 읍소하며 공급해 달라고 조르는 물건이다.
마력 칩셋만 있으면 아무리 C몰을 뒤덮은 화재가 크다 해도 손쉽게 진압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수원에서 급히 소방 헬기로 공수해오고 있는 중입니다.”
“뭐? 수원에서?”
조한규 장관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눈을 치켜떴다. 팔이 부르르 떨리는 게, 금방이라도 직원을 한 대 칠 기세였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칩셋을 왜 수원에서 공수해 와? 서울 소방부서에 있는 재고는 어떡하고?”
“그게, 확인을 해보니 이틀 전에 재고가 전부 소진 되었다고…….”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직원이 쩔쩔 맬수록 장관의 목소리가 커져만 갔다. 매뉴얼상으로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
마력 칩셋은 화재가 발생했을 때 완벽하게 불을 진압할 수 있는 물건이다. 수도 서울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당연히 상시 배치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틀 전에 서울 재고분이 모두 떨어졌다? 그럼 그 이틀 동안 대체 바로 채워 넣지 않고 뭘 했단 말인가? 이것이 장관이 분노하는 이유였다.
“아시다시피 소방 칩셋은 물량이 많지 않습니다. 다음 재고가 출하되는 날까지 기다려야 하니,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럼 미리 주변 도시에 요청을 해서라도 상시 재고를 확보해두고 있어야지!”
“물론 몇 번 양해를 구하긴 했으나 다른 도시들도 비상상황을 위해 자기들 보유량을 미리 내어줄 순 없다고…….”
답답하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지자체들은 자기들 창고에 있는 소화 칩셋을 다른 도시에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랬다가 정작 필요할 때 쓰지 못하면 원통할 것 아닌가.
“대체 어떻게 된 건가? 원래 서울 재고분이 빠듯하게 운용되긴 했지만 이런 적은 없었잖나?”
“그게…….”
직원이 목소리를 낮춰 설명하자, 장관의 안색이 점점 새파랗게 질려갔다.
그는 충격을 받은 채 더듬더듬 되물었다.
“그게 정말인가?”
“예, 사실입니다. 차후 감사가 나오면 반드시 이 문제가 불거질 겁니다.”
“허어…… 야단났군.”
흙빛이 된 채 안절부절 못하던 장관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태도를 고쳤다. 그는 엄한 표정으로 컨트롤 타워 상재 직원들에게 불호령을 내렸다.
“다들 뭐 하고 있어! 빨리 빨리 상황 분석하고 보고서 만들어!”
“예!”
“경찰과 국정원 놈들은 대체 일을 어떻게 했길래 국민들이 이따위 피해를 입게 만들어? 아오, 진짜…….”
직원들은 눈이 마주칠세라 얼른 자기들 업무에 몰두했다.
사실 컨트롤 타워가 특별히 하는 일은 없었다.
내부 진입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외곽에서 간신히 구조 활동을 펼치는 중이었다. 급히 달려온 소방차들이 포위하듯 에워싸며 물을 뿜어내고 있지만, 화재는 쉬이 잡히기는커녕 더욱 거세게 타오르고 있었다.
현장 수습은 거의, 탈출 과정에서 부상을 입은 이들을 응급처치하거나 긴급 후송하는 식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근데 진짜 테러 맞을까?”
“대충 확실할 걸. 이거 봐, 가스 폭발 따위가 아니야. 어떤 놈들이 작정하고 폭탄 여러 개 설치해서 터트린 거라고.”
“대체 누가?”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 하지만 이건 확실해. 미국이 테러 단체들에 가진 어그로를 우리나라가 나눠 가졌다는 거.”
한서진의 영향력이 한국에 안 좋은 방향으로 작용한 유일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었다. 미국을 노리던 테러집단들이 한국도 표적에 넣기 시작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고 정황상 테러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어떻게 했길래 소방 칩셋 재고분이 다 떨어진 거야? 웬만해서는 재고분 떨어뜨리지 않게 운용할 텐데.”
물량이 한정된 귀중한 물품인 관계로, 소방 칩셋은 엄격한 매뉴얼을 따라 사용해야 한다.
손쉽게 진압할 수 있는 화재까지 일일이 소방 칩셋을 사용한다면, 심각한 낭비이기 때문이다. 칩셋이 남아도는 상황이 되면 모를까, 그 전까지는 아껴서 운용해야 했다.
그래서 칩셋은 일정한 조건을 충족하는 중대한 상황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당장 사람의 목숨이 달린 경우, 막대한 재산 피해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 화재 진압 및 구조 활동에서 소방관의 목숨이 위험할 경우, 국보 박물관 등 매우 중요한 물건이 소실될 것으로 우려되는 경우 등이다.
예컨대 약간의 재산 피해만 발생하고, 인명 피해 염려가 전혀 없는 화재는 그냥 일선 소방차가 나서서 진압한다.
“그게 말이야. 원래 이틀 전까지만 해도 딱 하나가 남아 있었어.”
“그게 어떻게 됐는데? 아!”
질문을 한 직원은 순간적으로 이틀 전 발생한 어떤 화재를 떠올리고 입을 손으로 막았다.
“시청에 불이 좀 크게 났었잖아.”
“그거 별로 위험한 건 아니었다던데. 잘 피해서 경상자도 거의 없었다고 들었는데. 소방 칩셋을 써서 그런 거 아니야?”
“소방 칩셋이 도착하기도 전에 사람들은 이미 다 대피했었어. 불길도 어느 정도 잡혔었고.”
소방 칩셋의 투입은 엄격히 제한되지만, 일단 불이 나면 현장으로 즉시 이동한다. 그 후에 상황을 봐서 화재 진압에 쓸지 아니면 철수할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철준 시장이 아끼는 애완조가 시장 집무실에 있었대. 시장이 그걸 깜박하고 나온 거지.”
“아…… 이 시장이 암탉 한 마리 애지중지 키웠었지. 달걀일 때부터 길렀다던가? 잠깐, 설마?”
“그 애완조 구하려고 칩셋을 썼다던데.”
동료 직원은 모니터에서 활활 불타오르고 있는 C몰과 화상과 타박상을 입은 사람들을 확인하고, 조용히 묵념했다.
============================ 작품 후기 ============================
“억울합니다!”
“떽! 너 때문에 지금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크게 다쳤어! 어디 변명이라도 해보시지!”
“나중에 양념해먹으려고 키운 거예요! 그런 걸 구하려고 그랬을 리가 없잖아요!”
진실은 다음 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