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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487화 (487/609)

00487  재편  =========================================================================

“부디 너의 세상으로 돌아가 다오.”

주문처럼 그 말을 읊고, 마법진에서 터져 나온 섬광이 주변을 새하얗게 물들였다. 스칼린조차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강렬한 빛이었다.

‘안 돼!’

그녀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저항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한 마디도 듣지 못하고 이대로 당할 수는 없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어째서?

대체 자신이 모르는 어떤 비밀이 존재하기에?

“왜 이러시는 거예요!”

무거운 중력이 온몸을 압박하며, 그녀를 그 자리에 단단히 붙들어 매었다. 손끝 하나 움직이기 힘든 중압감 속에서, 그녀는 필사적으로 앞으로 나아가려고 애썼다.

“저항하지 말거라.”

코르비우스가 부드럽게, 하지만 단호함을 담은 음성으로 말했다. 마법진이 뿜어내는 힘이 더욱 강해졌다.

‘제발!’

온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그녀는 힘껏 저항하며, 어떻게든 움직이려고 애썼다.

그러나 마법진이 뿜어내는 압박감은, 대륙 최강의 여기사인 그녀조차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이제야 깨달았다.

그는 처음부터 이곳에 준비해두고, 자신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처음 꿈을 시작한 곳에서 모든 것을 끝내려고 안배해두었던 것이다.

“아아악!”

참을 수 없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주변의 모든 풍경이 일그러지며, 번쩍거리는 광휘가 사방을 잠식했다.

몸이 허공으로 떠오른다. 아니, 떠오른다기보다는 하늘에서 무형의 힘이 잡아당기는 것만 같다.

일그러진 시공간의 균열을 향해, 뽑혀나가듯이 끝없이 빨려 올라간다.

레노지안의 풍경이 어지럽게 찌그러지며, 시야에서 빠르게 멀어져간다.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건만, 마치 바닥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끝없이 추락하는 것 같다.

―사랑하는 딸아, 이곳은 네가 머물 곳이 아니다.

아스라이 부서지는 목소리가 아련하게 의식을 더듬어 온다.

―이곳에서 너의 존재는 너에게도, 그에게도,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도 불행한 일이다.

그녀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왜죠?’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대답 대신, 한편의 장편 영화 같은 파노라마가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문명이 생겨나고, 발전하고, 투쟁하고, 번창하고, 싸우고, 그 모든 것을 반복하고, 그리고 무너지고…….

수만, 수십 만 년의 역사가 단 몇 개의 그림에 압축되듯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대는 세상에서 가장 고결한 여인이오.

―반드시 신좌를 되찾고 말겠소!

―사랑스러운 아이들…… 고맙소.

―그대에게는 그저 고마울 뿐이오.

―나와 함께…… 싸워주겠소?

어느덧 파노라마는 현재에 접어들었다. 바로 그녀가 알고, 겪고 있는 시간축.

인간의 정신이 인식하지 못할 만큼, 모든 장면이 빠르게 추월해간다. 그러나 스칼린은 그 장면 하나하나가 모두 의식의 필름에 또렷이 현상되는 것을 느꼈다.

―그대에게는 그저 미안할 뿐이오. 부디 용서하시오. 백성들을, 그대를 지키지 못한 이 나약한 왕을…….

풍경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또렷하리만치 선명한, 괴로움에 젖은 음성이 가슴에 와서 박힌다.

스칼린은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어느덧 암흑만이 시야를 뒤덮고 있지만, 그가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지 눈에 잡힐 듯이 보였다.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어둠이 걷히며, 주변의 풍경이 변했다.

얼어붙은 적막만이 가득한, 무생명의 공간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곳곳에 드리워진 어둠, 그리고 끝없이 이어진 뼈의 무덤이 온 땅을 뒤덮고 있다.

무수히 많은 인골, 그리고 그 인골로 쌓아올린 거대한 산.

그 산의 정점에는 두 개의 백골이 보인다.

그중 가늘어 보이는 백골이, 그녀의 시선에 낙인처럼 와서 박혔다. 오랜 풍파에 삭은 발목뼈에는 녹슨 갑옷 조각이 추억처럼 감겨 있다.

‘저것은…… 나?’

그 뼈는 빛바랜 왕관을 쓴 백골의 다리를 끌어안듯이 몸을 숙이고 있다. 마치 잠이 든 듯이 평화로운 자세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또다시 눈물이 흘렀다.

‘리온…….’

금관을 쓴 백골, 그게 누군지 모를 리가 없다. 모를 수가 없다.

스칼린 왕비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

대륙을 지배하는 현명한 군주, 그러나 신에게 패배해 왕국과 백성, 그리고 목숨까지 모든 것을 잃어버린 비운의 왕.

―윤회의 고리 속에 들어간 내 딸아. 더 이상 죽은 자들의 세상에 찾아오지 말거라.

딱딱한 목소리가 안개처럼 귓가에 울린다. 뒤를 돌아보자 붉은 안개를 거느리고, 코르비우스가 생전의 모습 그대로 나타났다.

그녀는 겨우 입을 열었다.

‘레노지안은 정말…… 멸망했던 거군요.’

―그렇단다. 아주 오래 전 일이지.

그녀는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이 처음 꾸었던 꿈은, 전생의 기억을 토대로 스스로가 만들어낸 허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 속에서 스스로를 신효진이라 생각하면서, 잊어버린 과거를 반복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곳은 자신의 꿈이 아니다. 그래서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던 것이다.

‘리온은? 리온도 환생했나요?’

―딸아, 네가 잘 알고 있지 않느냐.

‘…….’

―생자들만의 행복을 찾아 누리거라. 더 이상 망자의 세상에 발을 들이지 말거라. 그것은 모두를 불행하게 할 것이다.

그녀의 몸이 다시금 허공으로 떠올랐다.

아까처럼 풍경이 일그러지지 않는다. 그저 천천히 멀어지기만 할 뿐.

문득 저 높은 곳에서 눈부신 빛이 느껴져, 그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아…….’

은빛 금속 조각이 높은 곳에서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빛은 바로 금속 조각이 뿜어내는 것이었다.

‘신살검…….’

부러진 신살검, 그것이 천천히 백골 무덤을 향해 내려앉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금관을 쓴 백골의 모습이 담겼다. 사랑했던 남자의 흔적이자, 사모하는 남자의 과거.

무거운 책임을 짊어진 듯 조금의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모습에서는 어떤 생명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때였다.

백골이 미미하게 떨렸다. 마치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처럼.

그녀는 숨을 멈추고 자세히 살폈다. 지금 내가 잘못 본 건가? 금방이라도 일어나서 걸을 것만 같은데?

바로 그 순간, 부러진 검의 조각이 백골의 옆에 강하게 내리꽂혔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녀가 조금 전 느꼈던 모든 이질감이 흔적도 없이 지워졌다.

서글픔과 그리움, 그리고 엄격함을 담은 목소리가 멀어지는 그녀의 뇌리에 울렸다.

―가라. 이곳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

신효진은 잠에서 깼다.

등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창문 밖은 아직 어두웠고, 실내 온도가 낮지 않은데도 춥게 느껴졌다.

시도하기도 전에, 그녀는 이미 깨달았다.

이번의 꿈 역시 닫혔음을.

차이가 있다면 예전의 꿈은 오롯한 자신의 것이었고, 이번에는 다른 이의 꿈이라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꿈이 아닌 전혀 다른 공간일지도 몰랐다.

그녀는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었다.

반신반의하면서도 끝내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현실, 바로 레노지안은 이미 멸망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무수히 널린 뼈의 무덤을 떠올렸음에도,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감당할 수 없는 장면이었기에 오히려 슬픈 감정이 놀라 눌려버린 것이다.

그녀는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한참이나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벽시계의 초침 움직이는 소리만이 나지막하게 울리던 중, 차가운 고요에 흐느끼는 듯한 울음소리가 섞였다.

고개를 떨어뜨린 그녀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은 채, 날이 밝을 때까지 오열했다.

거짓말처럼 빛이 사그라지며, 주변의 모든 풍경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노신하는 수정 지팡이를 든 채, 물끄러미 마법진을 바라보기만 했다.

직경 수십 미터가 넘는 거대한 마법진은 서서히 빛을 잃으며, 땅속으로 그 흔적을 지워 나갔다.

마침내 그곳에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어떤 흔적도 남지 않았다. 마법진을 형성하던 에테르 에너지도 대자연으로 다시 돌아갔다.

“이곳은 그 아이가 모든 것을 출발한 지점…… 이곳을 막았으니 이제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겠지.”

노신하는 어두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용서하거라. 이것만이…….”

잔잔한 중얼거림은 뒤로 갈수록 작아져, 그 다음 말이 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조금 전까지 자리 잡았던 수척함이 완전히 지워지고 없었다. 여유롭고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그는 어느덧 대륙 최고 마법사의 풍모를 되찾은 뒤였다.

그는 왕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왕은 땅에 그려진 마법진의 흔적을 유심히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가 노신하의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노신하를 발견한 왕의 얼굴에 반가움이 서렸다.

“경! 와줬구려.”

“폐하께서 이 먼 곳까지 보잘것없는 소신을 손수 찾으셨으니, 어찌 계속 숨어서 수행만 하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 수행의 성과는 있었소? 경이 얻은 깨달음이 대관절 무엇이기에 이 무명의 산자락에 틀어박혀 시간을 보냈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소.”

“감히 폐하께 자랑할 바가 못 됩니다. 나중에 혹 정리되면 고할 기회가 있을 듯합니다.”

노신하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고, 왕은 만족스러운 듯이 웃음을 짓다가 문득 표정을 바꿨다.

“그런데 경, 왕비는 보지 못했소? 분명 함께 왔다가 내가 잠시 정신을 판 사이 경을 찾으러…….”

왕의 말이 점점 자신감을 잃었다. 동시에 그의 표정도 기분 나쁜 듯이 일그러졌다. 뒤틀어진 기억에 혼란스러워하듯, 왕은 미간을 찡그리며 이마를 짚었다.

“폐하, 무슨 말씀이신지요?”

“왕비가 분명히 먼저…….”

“폐하, 왕비는 스스로를 제물로 바쳐 폐하께 저주를 걸었습니다. 그 결과 의식이 저주의 꿈에 갇혔습니다. 지금 왕비의 사가에서 잠든 채로 감시받고 있지 않습니까.”

“……그랬던가.”

왕의 눈빛이 흐려졌다. 탁한 색채가 눈동자 속의 총기를 덧씌우며 덮었다.

미간에 통증이 밀려왔다. 모든 것이 헝클어지는 듯한 느낌은 잠시, 왕의 눈빛을 덮은 흐릿함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지워졌다.

왕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경, 혹시 이곳에서…….”

“저주를 극복할 해석문을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성과는 있었소?”

“흡족한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헛걸음을 한 것은 아닌 것 같아 다행입니다.”

“잘 되었구려…….”

왕의 표정이 어딘지 무겁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왕은 걸어왔던 방향을 향해 등을 돌렸다. 가만히 응시하던 노신하가 조용히 물었다.

“폐하, 아직도 왕비를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으신 겁니까?”

“……군주의 책무를 저버릴 마음은 없소. 스칼린 왕비는 반역자일 뿐이오.”

“송구하옵니다. 용서하소서, 폐하.”

왕은 멀어졌고, 희미한 빛을 발하던 마법전은 그 힘을 잃으며 땅에 녹듯이 사라졌다.

마침내 왕의 모습이 사라지자, 그는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되었다. 이것으로…….”

군주의 발자취를 바라보는 눈빛은 무거운 서글픔이 묻어났다.

“폐하께서 깨어나실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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