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485화 (485/609)

00485  재편  =========================================================================

강력히 전개될 예상되던 재계의 반발은, 진성그룹의 지지 선언으로 싱겁게 무마되었다.

H그룹이야 원래 그렇다 치고, 진성그룹까지 백기를 들고 투항하자 다른 재벌들은 항거할 의욕을 완전히 상실했다.

표결을 앞두고 물밑에서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벌이던 로비 작업도 전격적으로 철회했다.

이미 뒤집을 수 없는 대세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 상황에서 되지도 않는 반항을 해봤자, 더욱 더 현 정부와 한서진에게 찍힐 뿐이다.

한서진이 정치와 사회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는다 해도, 그에게 좋지 않게 보일 가능성도 높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법인세 인상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렇게 세법 개정안은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었고, 일정의 공포 기간을 가진 후 바로 발효되는 수순을 밟았다.

최고 세율은 35%로, 미국과 동등한 수준으로 결정되었다.

정부의 강경한 의지, 그리고 진성그룹의 발 빠른 조기 항복 선언으로 재계는 어쩔 도리 없이 지지하고 나섰다.

진성그룹의 지지 선언 이후, 오히려 다른 그룹에 뒤쳐질 것을 두려워하며 앞을 다투어 인상안을 지지하고 나섰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요.”

검은 양복을 입은 60대 남자가 씁쓸한 음색으로 말했다. 감색 원피스를 입은 60대 여자가 미간을 가볍게 찡그리며 그의 말을 받았다.

“이건 절대 도원패 대통령 본인 의지가 아니에요. 한서진, 그 자의 입김이 적용된 거죠.”

“세금을 올리면 자기한테도 피해가 올 텐데.”

“어차피 국세청이 그 자가 세금 신고 안 한다고 세무 조사를 하는 것도 아니죠. 청장은 그럴 용기도 없을 걸요? 기재부도 마찬가지고.”

만약 한서진이 세금 신고를 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러나 그것을 지적하고, 세금 신고를 요구할 수 있는 공무원은 없다. 국세청은 모르쇠를 택할 것이다.

공식적으로 명시된 것은 아니지만, 이미 그는 공권력으로 감히 터치할 수 없는 초법률적인 존재였다.

미군을 끌고 와서 청와대를 박살내도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할 판에, 세금 신고 좀 안 한다고 공권력을 행사하는 게 가당키나 할까.

물론 그는 지금까지 세무 신고를 불법적으로 한 적이 없다. 어디까지나 만약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세금을 인상한다고 그 자가 무슨 피해를 봅니까? 사업 기반이 거의 미국에 있는데.”

“처음에는 그랬지만 최근에는 국내에도 조금…….”

“국내에 있는 게 그 자의 재산 중 얼마나 비율을 차지할 것 같아요? 그리고 세수가 늘어나면 오히려 더 좋겠지요. 그 자는 이 나라 재정 자체에 지분이 있으니까.”

반박할 수 없는 말이다.

그가 특별 국채 형태로 국가에 큰 빚을 지우고 있는 걸 생각하면, 세율을 높이는 건 그에게 일단 손해는 아니다.

“무엇보다 진성이 배신한 게 컸습니다.”

“이창용 회장을 이해할 수 없어요. 이서나, 그런 나약한 애한테 회장 자리를 물려주다니…….”

“이용무 부회장이 회장직에 있었다면 그런 어리석은 결정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다 같이 뭉쳐야 할 때에 혼자서 단독 행동을, 그것도 그저 정부에 잘 보이려고만…….”

“굴욕이에요, 굴욕.”

그렇지 않아도 몇 몇 재벌 오너 가문이 사유 재산을 모조리 잃고, 경제사범으로 중형을 선고받으며 몰락했다. 그렇게 갈 곳을 잃은 계열사들은 H그룹이 모조리 인수했다.

다들 쉬쉬하지만, 한서진이 해킹으로 그들의 금융 자산을 압류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여기에 검찰과 행정부의 칼날, 그리고 법인세 인상까지 더해졌다.

재벌들은 그야말로 사면초가에 몰린 상황이었다.

“더러워서 이 나라에서 기업 못 해먹겠어. 본사를 유럽으로 옮기든가 해야지, 원.”

80대의 노인이 푸념했다. 그는 재계 10위권 밖의 그룹을 거느리고 있는 총수였다.

“온 국토가 폐허가 된 와중에도 허리띠를 졸라매고 열심히 일했어! 그래서 지금의 그룹을 키웠고, 이 나라를 먹여 살렸어!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런 대접이라니!”

노인은 진심으로 분노를 담아서 터트렸다.

“싹 다 파내서 해외로 옮겨버려야지! 우리 BK그룹은 더 이상 이 나라에서 장사 안 할 거요! 더러워서 안 해!”

“하지 말라고 그래.”

한서진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듯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안 그래도 더 이상 금융 계좌 터는 거, 너무 눈에 띄어서 부담스러웠는데 잘 됐네. 본사 파서 해외로 뜨든 말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그래. 유럽 가서 사업 참 잘 되겠네.”

국내 유통망에 기반을 두고 있는 대기업이 유럽으로 회사를 옮겨서 얼마나 흥할지 궁금하긴 했다.

“그럼 이것도 우리 H컨설턴트에서 알아서 처리해도 되지?”

“마음대로. 언제는 물어보고 일 처리 했었냐? 지혜 너 하고 싶은 대로 했지.”

한지혜는 어깨만 가볍게 으쓱해 보였다.

“그냥 오빠가 해킹으로 금융 재산 다 털어버리는 게 나을 거 같은데. 그게 더 효과적일 수도?”

“GK그룹은 방산비리 때문에 그런 거고, 걔들은 당장 아무 혐의도 없잖아. 검찰도 가만히 있는데 나까지 나서긴 그래.”

“외도하느라 바빠서는 아니고?”

한서진은 하마터면 뿜을 뻔했다.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동생을 째려봤다.

“너,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농담 한 번 찔러봤는데 반응이 생각보다 격렬하시다?”

“효진 씨하고 절대 그런 사이 아니거든?”

“난 효진 씨 이름 말한 적도 없는데?”

“…….”

“그냥 오빠가 요즘 효진 씨와 너무 붙어 있는 거 같아서 걱정 돼서 한 마디 해봤어. 아무리 하나가 인내심이 하해와 같다지만, 같은 여자가 보기에 좀 걱정돼서.”

“그런 사이 아니다.”

“알아. 노파심에 미리 하는 소리야. 어련히 오빠가 알아서 잘하겠지.”

한지혜는 사뿐히 일어나며 가방을 정리했다. 천천히 돌아서자 늘씬한 뒤태가 살랑거리며 드러난다.

적당한 힙 아래로 쭉 뻗은 맨다리는 남자의 마음을 녹일 듯이 날씬하다. 물론 친오빠 눈에는 무와 동가치성을 띤 라인이지만.

“갈게. 하나도 신경 좀 써 줘.”

“빨리 사라져.”

한지혜는 히죽 웃고는 밖으로 나갔다.

한서진은 골치 아프다는 듯이 이마를 짚었다.

‘외도는 무슨, 얼어 죽을…….’

아주 틀린 것은 아닌가? 물론 지구가 아닌, 다른 차원에서 부부로 살고 있는 것이지만.

신효진과 레노지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보면, 가끔씩 둘이 말이 없어질 때가 있다. 아무 이유 없이.

그럴 때 그녀는 서글픈 눈빛으로 자신을 보곤 했다.

그 눈망울이 투영하는 게 누구인지 알기에, 한서진도 가슴이 먹먹해지며 말이 없어진다.

차라리 송하나가 스칼린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솟을 때마다 가벼운 자괴감을 느끼곤 한다.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 놈이었나 하는 마음에.

‘이럴 때가 아니지.’

그는 머리를 흔들어서 상념을 떨쳐 냈다.

보안문을 열고, 작업실에 들어선 그는 BII 접속장치를 오픈하고 자리에 앉았다.

장치를 가동시키자 시야가 지워지며 주변의 모든 감각이 사라진다. 그리고 전혀 다른 감각으로 완벽하게 대체되었다.

눈을 뜨자 허공에 둥 뜬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발밑에는 BII 접속장치에 앉은 채 신경 접속 중인 자신의 몸이 보였다.

꼭 유체 이탈을 한 듯한 느낌이다.

그가 가진 전용 접속 장치, 타르타로스 2의 시스템 리소스를 온전히 사용하는 장치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이었다.

정말로 유체이탈을 하는 게 아니라, 실제 현실의 시각 정보를 감각 신호로 구체화해서 그의 의식에 전달하는 것이다.

즉 유체이탈을 하는 듯한 경험을 가상으로 구현하는 것일 뿐, 실제로 그의 의식은 몸 안에 머물러 있다.

‘가보자.’

한서진은 훌쩍 날아서 저택을 빠져 나왔다.

익숙한 정원의 모습, 그리고 한창 잔디를 정비 중인 집사 최수한과 가정직원들이 보였다.

물론 저들은 실제 인물이 아니라, 가상으로 재현해서 그가 느끼게끔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이 순간 실제로도 똑같이 잔디 정비 작업 중이다.

타르타로스는 에테르 파동을 통해, 지금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실시간으로 재현해서 그가 느끼고, 보고, 겪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하나는 뭐하고 있지?’

문득 궁금해져서 그는 백철중의 저택으로 향했다.

수km 떨어진 곳이지만, 가상의 의식 세계 속에서는 시간적 의미는 없다. 로딩 속도만이 중요할 뿐.

그가 마음을 먹자마자 곧바로 백철중 저택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런, 샤워 중이었네.’

뿌연 수증기 아래로 보이는 늘씬한 라인에 한서진은 얼른 그 자리를 떠났다. 아무리 약혼녀라지만 이건 예의가 아니다.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정신을 집중했다.

다음 순간 눈앞의 모든 풍경이 거짓말처럼 변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컴컴한 어둠이 주변을 차지한 것이다.

‘좌표는…… 잘 찾아 왔군.’

이곳은 태평양 심해.

신살검이 지구를 뒤흔들 때마다, 그 파동 에너지가 흘러나오는 근원이 있는 곳이다.

빛이 들어오지 못하는 어두운 심해이다 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모든 것이 암흑이었다. 이런 곳에도 생명이 존재한다는 게 그저 경이로울 뿐이었다.

빛이 없다고 해서 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타르타로스는 에테르를 매개체로 이 지역의 모든 풍경을 3D 지도로 바꾸듯 정밀하게 읽어낼 수 있고, 그것은 얼마든지 영상 신호로 바꿀 수 있는 것이니.

한서진은 감각 신호를 조절했다.

주변의 풍경이 곧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각 신호로 변환되어 뇌에 전달되었다.

암흑만이 존재했던 해저가 실제 색상마저 갖춘, 완벽하고 선명한 풍경으로 변했다.

‘아…….’

해저 1,000 이상의 심해를 이렇게 정확한 색상으로 본 사람은 아마 그가 처음일 것이다. 그는 장엄하기 그지없는 풍경이 놀라워서,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얼핏 보면 바다 속이 아니라 마치 어느 들판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다. 저 먼 곳에는 마치 겨울을 맞이한 듯 벌거벗은 산맥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어디 있지?’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히 타르타로스가 발견한 에테르 파동의 흔적 좌표를 정확히 쫓아서 왔다. 그리고 지금 수km 밖의 조그만 심해어도 정확히 판별할 수 있는 시각 정보를 누리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

분명히 이곳 어딘가에 무언가가 있을 텐데,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통찰안은…….’

그는 정신을 집중하고, 통찰안을 개방해서 훑어보았다. 하지만 역시 특별한 게 눈에 띄지 않는다.

‘타르타로스도 못 찾고 있어.’

타르타로스는 에테르의 파동을 읽어낸 것이지, 그 파동을 뿜어내는 주체를 탐지한 것은 아니다. 그만큼 이곳에 있는 무언가는 완벽하게 자신을 위장하고 있었다.

그는 할 수 없이 신효진에게 도움을 청했다.

‘효진 씨.’

―네, 박사님.

그의 의사는 전자 신호로 신효진의 전화기에 전달되었고, 둘은 통화를 하듯이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금 신살검을 자극해 보세요.’

―알겠어요.

미리 약속한 대로 신효진은 신살검과 대화를 시도했고, 그 순간 저 먼 곳에서 거대한 에테르 파동이 동심원을 그리며 지구 전체로 뻗어나갔다.

‘저기다!’

한서진은 그곳을 향해 재빠르게 이동했다. 그는 곧 심해의 뻘에 뒤덮인, 거대한 잔해를 발견했다.

통찰안을 통해, 그리고 타르타로스를 통해 낱낱이 스캔했지만, 그저 침몰선의 잔해 이상으로 보이진 않았다. 뻘에 묻혀 있어 그나마 본모습의 대부분이 가려져 있었다.

‘이걸 어떻게 건진다……?’

그는 무심코 손을 가져다 댔다. 그 순간, 잔해에서 눈부신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잔해를 덮고 있던 뻘이 순식간에 걷혔고, 잔해는 급속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한서진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이 굳은 채, 수면을 향해 떠오르는 잔해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놀라운 감정이 의식을 헝클어뜨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저건……!’

칼끝에서부터 중간이 부러진, 거대한 칼날이었다.

============================ 작품 후기 ============================

“내가 치사해서 진짜 해외로 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