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83 재편 =========================================================================
기업인을 초대하는 청와대 오찬 행사가 열렸다.
대통령이 직접 주도한 이 행사에는 30대 재벌 기업 총수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원래라면 최고 경영자를 보냈을 재벌가도 회장인 오너가 직접 참석했다.
오너가 아닌, 최고경영자가 참석한 기업은 H그룹이 유일했다. H홀딩스 사장, 최석이었다.
그는 재벌가와 전혀 상관이 없는, 미국 유학파 출신이었다. 하버드를 나온 경영 및 경제 전문가로 그 실력을 인정받아 사장 자리에 오른 것이다.
다른 재벌가와 마찬가지로 지분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던 H그룹은 몇 년에 걸친 계열사 정리 과정을 완전히 마쳤다.
지금은 지주회사인 H홀딩스를 중심으로 전 계열사가 수직 복속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최석은 백철중의 신임을 사서 그 지주회사의 최고경영자를 맡은 것이다.
“대통령님 나오십니다.”
다들 귀빈실 원형 탁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으니, 이윽고 대통령이 나왔다.
도원패 대통령은 당당한 태도로 기업 총수들 한 명, 한 명과 전부 악수를 나누었다.
밝은 웃음을 띤 얼굴을 보고 이서나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쉽지 않겠는데.’
다른 총수들도 억지웃음을 짓고는 있지만, 전혀 편안해 보이지는 않는다.
이 자리가 어떤 의도에서 만들어졌는지는 다들 짐작하고 있었다. 행정부가 제출한 법인세 증가 개정안, 그 채찍에 관해서 대통령이 어떤 식으로든 연설이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지금 매우 중대한 기로에 서 있습니다. 웜홀 산업을 성공적으로 정착시키느냐 마느냐에 국가의 백년대계가 걸려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만한 충분한 예산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
“법인세 증가에 관해 기업인 여러분들의 불만이 많은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이 버는 자가 세금을 많이 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자,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부디 기업인 여러분들의 너그러운 양해를 구합니다.”
“…….”
도원패 대통령은 한때 누구보다 격렬하게 부자 증세를 반대했던 기득권층의 선동대장이다. 그런 그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얼굴에 철판을 깔고,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를 바꾸고 있다.
기업 총수들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불편한 심산을 애써 속으로 눌러 삼켜야 했다.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오찬 행사를 마치고, 돌아갈 때가 되었다.
“회장님, 잠시 이쪽으로 오시죠.”
경호실장이 조용히 이서나를 불렀다. 그녀는 의아해하면서도 그를 따라 나섰다.
귀빈실 구석에 있는 조용한 응접실에는 대통령이 먼저 와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만 따로?’
왜, 라는 의문보다 불길한 예감이 먼저 그녀의 뇌리를 파고들었다.
“오늘 오찬은 어떠셨습니까, 이서나 회장?”
“유익하고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대통령님.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웠다니 다행입니다.”
대통령은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대화를 주도해 나갔다.
이서나도 미소를 잃지 않는 한편, 동요를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김철민 당대표와 식사 시간을 가졌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
“그래, 우리 정부와의 중재를 부탁하셨다고요?”
이렇게 훅 들어올 줄이야.
이서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갑작스러운 세금 증가에 대처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해왔지만, 대통령이 직접 불러다가 독대 자리를 만들 줄은 몰랐다.
국회의원 시절에는, 아니 취임 초반까지만 해도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무엇이 그를 변하게 했을까.
“미리 말씀드리지요. 정부가 제출한 세법 개정안을 국회가 거부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것은, 국회의원들이 거수기 역할을 확실히 할 수 있게 만들 명확한 약점을 쥐고 있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실제로 사정의 칼날을 휘두르는 정부는 그만한 힘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지금 나라에 돈이 없습니다. 아, 물론 현 재정을 꾸려나가는 데는 문제없습니다. 다만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큰 투자를 해야 하는데, 그럴 돈이 없습니다.”
“대통령님. 하지만…….”
“세수를 확보할 곳이 부자들뿐이군요. 그러니 이 회장도 사회지도층으로서 이해해주면 좋겠어요.”
웃으며 건네는 비수, 그 안에 담긴 분명한 재촉에 이서나는 낯빛이 흐려졌다.
“우리 진성그룹이 가장 먼저 나서달라는 겁니까?”
“H그룹이 나서봐야 다른 기업들에 미치는 선동 효과는 미미할 테니까요. 진성그룹이 나선다면 분명한 상징이 될 겁니다.”
이서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왜 대통령이 자신을 따로 조용히 불렀는지를.
진성그룹마저 굴복하면 다른 재벌들은 더 이상 항거의 의지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은 그것을 원하는 것인가.
이서나는 대통령을 설득하기 위해 그룹이 총력을 기울여 준비한 수많은 이유와 명분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러나 그 중 어느 것 하나도 쉬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뇌리에서 무분별한 소용돌이를 그리며, 헛되이 맴돌았을 뿐.
그녀는 오히려 자신이 임원들에게 당부했던, 최악의 상황을 떠올렸다.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서 그룹 경영 계획을 전반적으로 다시 조정하세요. 어떤 식으로든 세금은 결국 증가한다 가정하고 준비하세요.’
그녀는 굳은 눈빛으로 대통령을 주시하다가, 힘들게 입을 떼었다.
“대통령님께서 국회의원 시절 추진해왔던 경제 정책과는 상반된 감이 있는 듯합니다.”
“내가 국회의원 시절 재계가 나에 대해 취해왔던 스탠스도, 근래 들어 상당히 상반되게 변했지요?”
감추지 않은 독기를 차분한 웃음에 섞어 드러냈을 때, 이서나는 순간 당황했다.
‘설마, 개인적인 복수? 법인세 증가가?’
“분명히 말해둡니다만, 정책을 변경할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세연동에서도 특별한 반대는 없을 테고요.”
“…….”
“진성그룹의 현명한 선택을 믿습니다.”
그룹의 뛰어난 인재들이 몇날 며칠을 고생하며 만든 무수한 명분, 그것들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모조리 사그라졌다.
사라진 아카식 블레이드 수색 작업은 점점 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인근 수백 미터 해역에 치밀한 감시망을 치고 샅샅이 뒤졌지만,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알 길이 없었다.
수색을 맡은 미군 사령부는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도 모르는 터이니 갑갑하기만 했다.
그건 크리스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Table A인지 뭔지가 2차 대전부터 우리 미국의 기초 과학 발전에 기여해온 것은 알겠는데, 그러니까 그 사라진 물건이 대체 뭐란 말인가?”
“그건 밝힐 수 없다고 합니다.”
“미합중국 대통령에게조차?”
“예, 그런 태도만 고수하고 있습니다.”
“허참.”
크리스 대통령은 기가 막혔다. 한편으로는 괘씸하기까지 했다.
‘민주주의를 대체 뭘로 보고!’
대통령조차 명령을 내릴 수 없고,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그 존재조차 보고받을 수 없는 연구기관. 그런 게 존재한다는 게 불쾌하기까지 했다.
“분실한 물건이 40미터 길이의 금속 물체라고 했던가? 혹시 핵탄두 같은 것은 아니겠지?”
“그런 건 전혀 아니라고 합니다. 분자물질 연구학적으로 매우 귀중한 표본이라고 들은 것 같습니다.”
“좋아, 그럼 이제 그만 해군 비상경계를 해제해야겠어.”
“대통령님.”
“위험한 물체도 아니라며? 언제까지 미 해군이 해역을 샅샅이 뒤지고 다닐 순 없지 않나? 안 그래도 여러 나라에서 우리 미군이 이상한 짓을 하려는 거 아니냐고 항의가 쏟아지고 있는 판국일세.”
“…….”
“해군은 철수시키고, 이제부터는 일반적인 방법으로 수색에 나서게. CIA가 맡으면 좋겠군.”
CIA 국장은 아무 말도 못한 채, 대통령 집무실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힘든 수색에 시달렸던 미 해군 장병들은 드디어 수색 작업을 철수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뒤지고 다녀야 했던지라 그들은 심적으로 많이 지쳐 있었다. 사령부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Table A는 구프게니 키신 부팀장의 리드 하에 7인 위원들 간의 회의를 열었다.
“여러 방향으로 가능성을 열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아카식 블레이드는 스스로 사라져 버린 것 같아요.”
“미 해군의 감시를 뚫고, Table A 연구선박 격납고에 보관된 그 거대한 물체를 훔쳐 갈 수 있는 존재가 있을 리 없죠. 사실 처음부터 말이 안 됐던 거예요.”
“그런데 스스로 사라지는 게 과연 말이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까?”
“아카식 블레이드는 무궁무진한 물체죠. 무엇이 일어나도 이상할 리가 없어요.”
사건이 발생한 당일 일어난 정황, 그리고 자세한 수색 상황을 모두 정리한 끝에, 7인 위원들은 아카식 블레이드가 자체적으로 사라졌다고 결론을 내렸다.
사실 그것 외에는 합리적인 설명이 가능하지 않았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건…… 그날 신효진 씨가 아카식 블레이드가 보관된 격납고에 혼자 있었다는 것 정도인데.”
그리고 의혹의 눈길이 신효진에게 잠깐 머무르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동기가 없어요. 그럴 이유도 없고요.”
“한서진 박사 역시 마찬가지죠. 사실상 아카식 블레이드를 소유한 거나 다름없는데, 굳이 우리와 척을 지는 길을 선택할 리가 없어요.”
말도 안 되는 미약한 가능성, 바로 한서진이 아카식 블레이드를 독점하기 위해 뭔가를 꾸몄으리라는 것.
그러나 제아무리 한서진이라 해도 미군의 감시를 철저히 따돌리고, 그 큰 물체를 훔쳐가는 게 가능할까?
그게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가 그래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럼 수색 작업을 전면 중단할까요?”
“중요한 물건을 분실했다고 호들갑을 떨었는데 이렇게 빨리 중단을 요청하면 크리스 정권이 더 이상하게 생각할 겁니다. 적어도 그들이 알아서 포기할 때까지는 놔두죠.”
“그보다 아카식 블레이드를 잃어버렸으니…… 앞으로 우리 Table A의 정체성이 어떻게 될지 걱정입니다.”
보고서에 누락된 사실이 있다. 바로 건장한 장병들이 전혀 들 수 없었던 기이한 검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7인 위원 중 6인이 그 사실을 알지 못한 덕분에, 아카식 블레이드의 행방은 그렇게 세 사람만 아는 비밀이 되었다.
“어쨌거나 해피엔딩이군요, 효진 씨.”
위원 회의가 끝나고, 한서진은 곧바로 신효진을 찾아서 결론을 말해주었다. 그녀는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그분들을 속이는 거라서 마음이 편치만은 않아요.”
니트론이 손사래를 치며 그녀를 달랬다.
“아카식 블레이드의 선택을 존중하는 길입니다. Table A 위원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아요. 아니, 오히려 우리는 지금까지 무단으로 아카식 블레이드를 점유하면서 그 과실을 취해왔지요.”
옆에서 한서진이 쓴웃음을 짓다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런데 교수님, 며칠 전 우리 셋이 있을 때 잠깐 느꼈던 그 약진 말입니다.”
“그게 왜요? 혹시 에테르 스톰?”
“알아보니 그 시각에 미약한 에테르 반응이 지구 전체에서 감지되었습니다. 인류를 위협할 수준이 아니라 타르타로스 모니터링 시스템도 특별한 경보는 안 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지진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지구 전체에 일어났던 모양입니다.”
“지구 전체? 허어, 그거 참 기이한 일이군요.”
둘의 대화에 신효진은 깜짝 놀라서 신살검을 내려다보았다.
‘혹시 내가 말을 걸어서? 아냐, 그럴 리가 없…….’
그때 신효진은 분명히 느꼈다.
저번과 똑같이, 미미하게 땅이 흔들리는 울림을.
============================ 작품 후기 ============================
“아 왜 자꾸 불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