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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480화 (480/609)

00480  재편  =========================================================================

한서진은 신살검을 조금도 들어 올리지 못했다. 단 1mm조차.

마치 수 톤이 넘는 철근처럼 느껴진다. 바닥에 붙어버린 듯이 무거워, 아무리 힘을 줘도 꼼짝도 하지 않는다.

몇 번이나 쥐어 보려고 시도하던 한서진은 포기했다.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신효진이 손을 뻗어 검 손잡이를 쥐고는 가볍게 들어올렸다.

“이거 별로 안 무거운데…….”

“…….”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박사님은 당연히 들 수 있을 줄 알았거든요.”

처음에는 미군 병사들이 꼼짝도 못한 것 때문에, 지구에서 레노지안에 관련된 이들만 들 수 있는 걸로 생각했다. 하지만 한서진이 들지 못하는 걸 보니 다른 조건이 있는 모양이다.

“효진 씨만 들 수 있는 건 아닐까요?”

“그럴 리가요. 본래 레노지안에서 제 검도 아닌 걸요. 원래는 카드리안 가문의 검이에요.”

한서진은 인상을 쓴 채 팔짱을 꼈다.

“그럼 뭐죠? 혹시 고결한 자만 들 수 있다, 뭐 그런? 미국 히어로 영화에서 그런 설정 자주 나오잖습니까.”

“에이, 말도 안 돼요.”

신효진은 풀썩 웃으며 거세게 손사래를 쳤다.

“세상에서 제일 고결한 분이 아마 박사님일 텐데, 그렇다면 너무 말이 안 되잖아요. 그냥 제가 레노지안과 꿈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

“…….”

한서진은 신효진이 신살검을 책상에 내려놓는 것을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효진 씨, 지금 우리가 배에 타고 있잖아요.”

“네, 그렇죠. 근데 왜요?”

“그럼 이 배는 어떻게 신살검을 들 수 있는 걸까요?”

신효진은 조용히 침묵하며, 처음으로 그의 앞에서 얼굴을 찡그렸다. 아주 살짝이지만.

박사님이 이상해.

신살검의 행방불명은 제주도 미군 기지와 연방 정부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선박과 항공기, 병력을 동원해서 신살검 수색에 나섰다.

그러나 Table A는 발칵 뒤집힌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본래 Table A의 설립 자체가 신살검을 연구하고 해명하여 우주의 과학적 진리를 밝히기 위함이다. 조직의 생명 자체가 적힌 바이블을 잃어버린 셈이다.

스탠포드의 종신 교수이자, Table A의 수장인 니트론은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신살검을 찾는 작업에 나섰다.

“대체 없어진 게 뭔데?”

“몰라, 무슨 연방 기밀연구팀이 한서진 박사하고 비밀리에 공동으로 연구하던 기밀 자료인가 봐.”

“직경 40미터짜리 금속 구조물? 대체 한서진 박사하고 기밀연구팀이 뭘 만들고 있었던 거야?”

“몰래 데스 스타라도 만들고 있었나 보지, 뭐.”

“대체 어떡하면 그렇게 큰 걸 도둑맞을 수 있는 거야? 그것도 연구선박 내부 격납고에 있었다면서?”

수색을 맡은 미군 부대 사령부는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뭘 만들고 있었는지도 의문이지만, 그렇게 큰 구조물을 어떡하면 도둑맞을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갔다.

차라리 구조물을 탑재 중인 선박째로 사라졌다면 납득이 될 것이다. 구조물만 쏙 하고 사라지는 게 말이 되는가?

제주도 미군 기지를 중심으로 500km 해역 내에 즉시 감시 초계망이 펼쳐졌다. 하늘과 땅, 바다로부터 펼쳐진 감시의 눈이 모든 해역을 샅샅이 뒤졌다.

함대 승무원, 조기경보기 파일럿 및 항공 레이더 관제사 등 수색 임무를 맡은 이들은 밤낮의 구분 없이 비상 상태로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 했다.

공개할 수 없는 연방 기밀연구팀이 한서진 박사와 공동으로 추진하던 연구, 어떻게든 그 분실된 국가 기밀 물건을 찾아내야만 한다. 그것도 아무런 단서도, 힌트도, 심지어 분실한 기밀 물건이 정확히 어떤 건지도 알지 못한 채.

“이 일을 대체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한 박사.”

한서진을 찾은 니트론은 얼굴을 보자마자 통곡부터 시작했다.

며칠 사이에 그의 얼굴은 완전히 반쪽이 되어 있었다.

“미국 전체를 팔아도 살 수 없는 귀중한 보물을 잃어버렸으니…… 대관절 어떤 놈들이 그걸 훔쳐갔단 말입니까.”

신살검이 사라진 당시 신효진이 현장에 있었지만, 그녀는 아무런 혐의를 받지 않았다.

한서진이 그녀의 신분을 보증하고, 범행 동기도 없고, 무엇보다 단독으로 그런 대담한 범죄를 실행할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교수님은 누가 아카식 블레이드를 훔쳐 갔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하루아침에 그게 사라질 수 있겠소? 더군다나 당시 현장 기록을 보면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미군 기지의 모든 기능을 차단한 게 틀림없어요. 2번 연구함을 중심으로 반경 500미터 내의 모든 전력 장치가 나가버렸으니까.”

“반경 500미터라고요?”

옆에서 듣고 있던 신효진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당시 격납고가 신살검이 뿜어낸 충격파로 전기가 완전히 나가버린 건 기억하고 있다. 근데 격납고만 나간 게 아니라, 배 전체는 물론이고 반경 수백 미터가 모조리 전기가 나갔었다니.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EMP 쇼크였어요. 철저히 비공개로 붙이고 있지만, 지금 미군 사령부는 큰 충격을 받은 상태입니다. 우리 Table A의 7인 위원들 역시 그 어느 때보다 크게 긴장하고 있습니다.”

“큰 충격이라니요?”

이번에는 한서진이 물었고, 니트론은 심각한 목소리로 낮게 대답했다.

“정황을 보면 EMP 쇼크로 미군 기지와 그 주변을 마비시킨 게 틀림없소. 모든 동력 장치가 나가버렸으니까.”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큰 충격을 받았다는 건지…….”

“대전자전을 위해 철저한 전자 보호 장치를 갖춘 전력 시스템까지 모조리 정지되었어요. 미국이 몇 십 년 동안 피땀으로 구축한 대전자전 시스템이 한 번에 먹통이 된 겁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게 뭔지 압니까?”

“뭔가요?”

니트론은 사방에 침을 튀길 듯한 기세로 흥분해서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한 박사, 놀라지 마세요. 전자 시스템에 아무런 손상이 없었습니다.”

“손상이 없었다고요?”

“그래요.”

니트론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욱 목소리에 힘을 불어 넣었다.

“그토록 막강한 EMP 공격이라면 분명히 대부분의 전자 시스템이 엉망이 되었을 텐데, 전혀 손상된 곳이 없었어요! 조그마한 실리콘 회로 하나 타지 않았습니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한 박사라면 알 겁니다!”

“…….”

“이걸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지. 맞아요! 마치 그 일대의 전력 스위치를 일시적으로 내렸다고 봐도 좋을 겁니다! 이게 대체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교수님. 그건…….”

“이건 정말 예술, 아트의 경지라고요! 한 박사도 알겠지만 무식하게 파괴하는 것보다 손상 없이 섬세한 컨트롤을 발휘하는 게 몇 백 배는 어려워요! 도대체 어떤 류의 EMP 공격인지 지금으로서는 짐작조차 안 갑니다!”

그게 바로 미군 사령부가 충격을 받고 패닉에 빠진 원인이었나 보다.

니트론의 눈빛이 결연해졌다.

“아카식 블레이드를 연구함으로써 우리 미국은 세계 과학을 선도할 수 있는 지식을 얻었습니다. 그것으로 지금의 미국 헤게모니를 구축했지요. 하지만 이번 공작은 도대체 어떤 식으로 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습니다.”

“교수님.”

“어쩌면 범인들은 한 박사처럼 에테르, 제5의 힘에 자기들 나름대로의 실적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마 한 박사가 공표한 이론을 통해 자기들만의 접근로를 찾았을지도 모르지요. 이번 특수 EMP 습격이 만약 그 결과물이라면, 우리 미국은 앞으로…….”

“아카식 블레이드, 여기 있습니다.”

“잠시의 방심도 늦추지 않고 온 사방을 경계…… 네?”

“……아카식 블레이드 여기 있습니다, 교수님.”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한 박사?”

“죄송합니다. 아카식 블레이드는 여기 있습니다. 너무 늦게 말씀을 드렸네요.”

한서진이 눈짓하자 신효진은 얼른 신살검을 꺼내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니트론은 멍한 눈으로 신살검을 한 번 쳐다보다가 신효진을, 그리고 다시 한서진의 얼굴로 눈을 옮겼다.

“재미없는 농담입니다.”

그의 눈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하긴, 80cm짜리 부러진 칼 모형을 갖다 놓고 신살검이라고 하면 누가 믿어주겠는가.

한서진은 다시 한 번, 진지함을 가득 담아 말했다.

“이게 바로 아카식 블레이드입니다.”

“…….”

“저도 처음에는 믿지 못해서 혼자서 나름대로 조사를 했었습니다. 그리고 확신을 얻었기에 이제야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게 아카식 블레이드가 맞습니다.”

“한 박사, 그 말은…….”

“아마도 아카식 블레이드가 어떤 원인으로 작아진 것 같습니다. 효진 씨가 마침 그 자리에 있었고요. 당시 효진 씨가 겪은 상황을 들어보니, 아카식 블레이드가 작아지는 과정에서 뿜어진 충격파가 그 일대의 전력 장치를 오프한 게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일반 EMP와 달리 전자 시스템이 멀쩡한 거라고 생각 되고요.”

니트론은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시금 신살검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물었다.

“지금 그 말을 믿으란 말입니까?”

니트론을 완전히 믿게 하는 데는 꽤 시간이 걸렸다.

에테르의 존재와 효력을 인정하는 그로서도, 40미터짜리 금속 물체가 고작 80cm 크기로 줄어드는 것은 쉽사리 인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한 박사가 그럴 사람이 아닌 것은 아닌데…… 처음에는 축소 모형을 가져 와서 나한테 장난을 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미안하게 됐어요.”

“이해합니다.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이게, 이게 바로 아카식 블레이드…….”

니트론은 혼란이 가득한 눈빛으로, 탁자 위에 올려진 아카식 블레이드를 샅샅이 훑었다. 그리고 물었다.

“크기가 작아지면서 무게까지 줄어든 겁니까?”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무게를 측정해보니 대충 450g 정도로 나오더군요.”

“허허, 나 같은 노인네도 한손으로 쉽게 들 수 있을 만한 무게로군요.”

그 말을 하면서 니트론은 무심코 손을 뻗어 손잡이를 쥐었고, 옆에서 신효진이 조용히 키득거렸다. 한서진도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릴 뻔했다.

니트론은 아무 생각 없이 검을 들어 올리려고 했고, 그 결과는 모두가 예상한 바와 같았다.

“으윽! 이거 지금 본드로 붙여놓은 겁니까? 전혀 들리지가 않는데요?”

니트론이 아무리 힘을 써도, 신살검은 단단히 고정된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느덧 그의 얼굴이 빨개졌고,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솟았다.

과학자로서 납득하지 못한 것이리라. 이렇게 꼼짝도 않는데 겨우 450g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니.

신효진은 그의 빠른 이해를 돕기 위해, 그리고 그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기 위한 설명을 택했다. 바로 탁자를 그대로 기울여 버린 것이다.

탁자가 기울어지자 신살검은 지구의 중력에 이끌리듯이 경사를 따라 미끄러지며 바닥에 떨어졌다.

쨍강 소리를 내며 몇 번 흔들리다가 움직임을 멈추는 모습을, 니트론은 멍한 눈으로 바라봤다.

너무 우습게도, 지금 신효진이 보인 간단한 퍼포먼스가 그가 직관적인 이해를 할 수 있도록 도운 것이다.

“아카식 블레이드를 발견했을 당시, 몇 대의 기중기로 들어 올려서 항모 갑판에 실었었는데…….”

“교수님이 기중기보다 고결하지 않아서 그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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