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77 왕의 검 =========================================================================
“신살검은 어떤가요?”
신효진은 화제를 가볍게 돌렸다.
한서진은 암갈색 원목 책상에 비스듬하게 걸터앉은 채, 두 팔로 체중을 지탱하며 대답했다.
“열심히 조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유일한 레노지안의 단서니까요.”
“신살검에 정말 레노지안으로 가는 비밀이 담겨 있을까요?”
“Table A는 신살검을 조금 연구한 것만으로도 미국이 세계 헤게모니를 주름잡을 수 있는 성과를 냈습니다. 검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놀라운 비밀들이 담겨 있어요. 분명 레노지안으로 가는 길도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조금의 의심도 없이 강한 확신에 찬 음성에, 신효진은 조금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생각이요?”
“박사님과 저, 우리가 지금 헛되이 수고하는 것은 아닌지……. 레노지안은 이미 멸망해 버렸을 수도 있고, 신살검이 아무런 길도 제시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우리 그런 생각은 하지 맙시다.”
“레노지안에 관해 너무 아는 게 없잖아요. 그걸 생각하면 마음이 괜히 불안해져요.”
“…….”
한서진은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다가 조용히 물었다.
“지금 효진 씨가 있는 꿈속이, 원래 효진 씨가 알던 꿈이 아니라서 그러시는 겁니까?”
“……모르겠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한서진은 웃는 낯으로 그녀를 안심시켜 주었다.
“신살검 해독만 끝나면 모든 게 다 잘 될 겁니다.”
진성그룹 회장 이서나가 김철민 당대표를 만나 설득한 것처럼, 정계를 향한 재계의 로비는 보이지 않는 물밑에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여러 재벌 그룹 총수들은 회사의 사활에 달렸다는 심정으로 정치권 설득에 나섰다.
불법 정치 자금 제공 등의 로비가 불가능한 터라, 정치권 설득 작업은 더욱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합법의 경계선을 넘지 않는 아슬아슬함을 항상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재정 감시 TF팀이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고 있고, 검찰을 이끄는 김시형이 칼날을 세우고 있으며, 대통령은 사정의 칼날을 무참히 휘두르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시국에서 불법 로비가 잘못 걸리기라도 하면, 그 기업은 끝장난다고 봐도 좋다.
김철민 당대표는 어렵사리 대통령 비서실장과 독대 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아무리 여당의 대표라지만 대통령과 독대하는 것은 어려웠다.
게다가 대통령과 당이 서로 거리를 두고 있는 지금, 여당 대표라는 것을 내세우는 것도 우스웠고.
약속 장소에서 비서실장을 기다리며, 김철민은 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을 정리했다.
‘대통령은 자기를 외면한 재벌들에게 분노를 품었고, 그것은 김시형 검사측에 유리한 상황이 되었다.’
‘한서진 박사가 대통령에게 든든한 노후 보장을 약속한 것은 틀림없다. 아마 백철중 회장이 메신저 역할을 했겠지. 아니면 대리인일 수도 있고.’
‘한서진 박사가 원하는 건 대체 뭐지? 이 나라를 지배하는 것? 하지만 그의 행보를 보면 별로 납득이 되지 않아.’
‘웜홀 관련 산업 육성. 반드시 해야 할 정책이지만, 현재 행정부는 굳이 법인세를 올리지 않아도 관련 예산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 역시 대통령은 재계에 보복을 하려는 목적이었던 건가?’
여러 상념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복잡하게 얽혔다.
그러나 이 자리에 나온 목적 하나만큼은 확고했다.
대통령과 재계가 갈등하고 반목하는 이 상황을 탄압받는 정치권에 유리하게 이끌어야 한다는 것, 나아가 자신의 정치 생명을 연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늦어서 미안하네, 김 대표.”
“아닙니다. 어서 오십시오, 최 실장님.”
대통령 비서실장이 들어서자 김철민 당대표는 벌떡 일어나서 꾸벅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여당의 대표이지만 정치적 연배는 비서실장이 더 높았기 때문이다. 수뇌부가 줄줄이 구속되고 운신의 폭이 좁아진 지금, 김철민은 임시로 대표 자리를 지키는 바지 사장이나 마찬가지 신세였으니까.
“그래, 대통령님을 뵙고 싶다고?”
“현재 당이 처한 입장을 대통령님께 꼭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당이 처한 입장이라는 게 뭔가?”
비서실장은 느긋하게 반문했다.
현재 검찰이 여의도를 들쑤시며 여야를 가리지 않고 중진 의원들을 줄줄이 잡아가는 것을 알 텐데, 저런 태도라니.
“최 실장님, 미우나 고우나 우리 당은 한식구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건 아네. 하지만 한 식구라는 점이 불법사실을 덮을 수 있는 면죄부가 되는 건 아니지.”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김철민은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털어서 먼지가 가장 많이 날 사람을 꼽으라면, 바로 현직 대통령과 그 측근들 아닌가? 눈앞의 비서실장도 당연히 그 안에 포함되고 말이다.
그런데 저런 느긋한 얼굴로 버젓이 그런 말을 입에 담다니.
“너무 염려할 것 없네. 내가 알기로 김 대표 자네는 검찰이 큰 혐의를 두고 있지 않아. 별 일 없을 테니 안심하게.”
“……대통령님은 정녕 우리 당을 버리실 작정이십니까?”
대통령 단임제 하에서 작정하고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당을 저버릴 수도 있다. 그것을 감수할 만한 노후 보장이 확고히 되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은 아마 한서진이 준 보증 수표이리라. 아마 숫자는 적혀 있지 않겠지.
“당을 버리는 게 아니야. 적폐를 청산하는 것뿐이지.”
“……적폐라니요. 우리 당은…….”
“우리 당뿐만이 아닐세. 여의도 전체가 대상이야. 비리가 있는 자라면 누구든 조사를 받을 걸세. 성역 없는 수사, 그것이 대통령님이 원하시는 과거 청산 작업이지.”
김철민은 묻고 싶었다.
대통령이 한서진으로부터 백지 수표를 약속받은 게 사실이냐고. 그렇게 따지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필사적으로 꾹 눌러 참았다.
“재벌들이 대통령님을 설득해달라고 속삭이던가?”
“……!”
속마음을 들켜버린 김철민은 순간적으로 표정이 흔들릴 뻔했다. 애써 표정을 감췄지만, 비서실장은 다 안다는 듯이 느긋한 눈빛이었다.
“어느 그룹인가? 진성? 미래? 아마 H그룹은 아닐 테고.”
“…….”
“어차피 조금만 알아보면 금방 나올 거니, 시간 낭비하지 말고 속 시원하게 말하게.”
김철민은 입술을 살짝 악문 채 주시하다가,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진성그룹입니다.”
“지금 시국에 재벌 돈 함부로 받아먹었다가 제대로 탈이 난다는 건 알고 있나?”
“받은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중재를 부탁받았을 뿐입니다.”
“대통령을 배출한 여당 대표가 기껏해야 재벌 중재나 떠맡으려고 대통령을 만나겠다는 건 아니겠지?”
“지금 정부가 추진하는 법인세 인상안……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기에는 표가 모자랄 겁니다.”
찬성표를 던져줄 국회의원 중 상당수가 검찰 신세를 지고 있어서, 라는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지금 300명의 의원 중 무려 165명이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었고, 그 중 61명은 검찰에 구속된 상태였다. 심지어 정부는 여당과도 사이가 좋지 않다.
이 상황에서 정부가 원하는 세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는 것은 터무니없는 기대일 뿐이다.
그러나 비서실장의 반응은 김철민의 기대를 보기 좋게 무너뜨렸다.
“설마 대통령님이, 우리가 그걸 모를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 그 말씀은…….”
“자네는 3선이나 했으면서 여전하군. 그렇게 둔해서야 어디 바지 사장 노릇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나?”
비서실장은 한심하다는 듯이 김철민을 노려보았다.
애초에 당대표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지금 같은 시국이 아니었으면, 그가 당대표 자리에 떠밀리듯 앉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서나 회장한테 전해주게. 조만간 청와대에서 초청장이 갈 것이라고.”
본래 재정감시 TF팀은 송하나의 주도로 만들어진 팀이다. 그것도 임시팀이다.
한서진이 총 3조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자금으로 북한 재건에 관한 특별 국채를 사들였을 때, 그의 돈이 눈먼 곳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감사하기 위해 만든 민간 기구였다.
국채로 조달하는 자금 흐름만 감시해서야 근본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 없기에, 대한민국 정부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모든 돈의 흐름을 철저히 지켜보고 있다.
단 한 푼의 예산도 허투루 쓰이는 일이 없게, 왜냐면 다 한서진이 받아내야 할 빚이니까, 이것이 바로 TF팀이 추구하는 목적의 근원이다.
그리고 TF팀은 지금까지 해낸 무수한 업적을 뒤로 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제부터 TF팀과 H컨설턴트는 한 몸입니다. 앞으로 힘을 합쳐 잘해 봅시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라진 게 아니고, H컨설턴트와 하나로 합쳐졌다.
H컨설턴트 김범석 부사장은 오래 전부터 TF팀과 H컨설턴트의 합병 작업을 추진해왔고, 마침내 그 결실을 맺었다.
“재정감시 TF팀과 우리 H컨설턴트가 하는 일, 목적, 그리고 업무 수단은 매우 비슷하거나 겹칩니다. 굳이 두 개로 나눠진 형태로 두는 것보다는 하나로 합치는 게 업무 이행에 훨씬 효율적입니다.”
송하나와 한지혜는 그런 김범석의 제안을 받아들여, TF팀을 흡수 형태로 H컨설턴트에 받아들인 것이다.
회사 합병을 기념하는 자리에는 한서진도 참석했다.
그를 위해 일하는 수족 같은 조직이니만큼, 그가 모습을 드러내고 격려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송하나의 강력한 제안을 못 이겨 합병 기념식을 참가한 한서진은 조금 떨떠름했다.
“이게 지금까지 H컨설턴트에서 한 일이라고?”
“응, 오빠.”
한지혜가 가슴을 펴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보고서 내용을 간단히 훑어보던 한서진은 조금 기가 차다는 웃음을 지으며 여동생을 돌아봤다.
“취지는 좋은데, 가끔 살짝 유치한 내용도 좀 있는 것 같다?”
“취지가 좋으면 다 된 거지. 뭐가 유치한데? 인터넷에 오빠 욕한 사람 칼라폰 못 사게 금지시킨 거? 블랙리스트에 올랐으니까 당연한 일이야.”
“아니, 그거 말고.”
“그럼 뭐? 오빠 욕한 사람 H팰리스 건설 지역에서 일자리 못 구하게 한 거? 아니면 우리 하나한테 패륜 욕설 올린 사람이 알고 보니 H반도체 거래처 기업에서 일하기에 거래 관계 끊었더니 거래처 사장이 그거 알고 그 사람 퇴사시킨 거? 아니면 뒤에서 오빠 욕하고 다닌 국회의원 녹취해서 여의도에 뿌려서 임기 끝날 때까지 왕따 당하게 만든 거? 아니면…….”
“……그만해도 될 것 같다.”
한서진은 살짝 질린 듯이 말을 잘랐다. 아니, 뭐가 저렇게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와?
“그냥 내가 보기에 대응이 어린아이처럼 살짝 유치해 보이기도 해서 그렇게 말한 것뿐이야. 특별히 뭘 꼬집어서 말한 게 아니라.”
“오빠, 원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대응이 살짝 유치해보일 수도 있어. 하지만 무엇보다 효과가 확실하지.”
한지혜는 팔짱을 낀 채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그를 흘겨보았다.
“그리고 오빠가 그런 말할 입장은 아니잖아? 옛날 일 기억 안 나?”
“내가 뭘?”
“인터넷에 누가 익명으로 오빠 비방글 올리니까 실시간으로 그 사람 신상 죄다 찾아내서, 그 사람 글과 댓글마다 답글 달았었잖아. 어디 살고 이름 뭐고 나이 뭐고 어디 직장 다니는 누구누구씨, 이렇게 말이야. 스토킹하듯이.”
“…….”
“그래서 그 인간 기겁해서 1분도 안 돼서 자기 글 다 지우고 잠수 탔잖아. 기억 안 나?”
한서진은 조금 억울했다. 대체 언제적 흑역사를 저렇게 자세히 기억하고 들춰낸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