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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476화 (476/609)

00476  왕의 검  =========================================================================

가볍게 뒤척이던 신효진은 부스스 눈을 떴다.

몇 번 눈꺼풀을 깜빡거려 본다. 창을 내다보니 아직 한창 어두웠다.

지금이 깊은 밤인가, 아니면 새벽인가.

힘들게 몸을 일으킨 그녀는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3시, 아침이 되려면 한참 남았다.

상체를 일으킨 채 무릎에 두 손을 가지런하게 놓은 그녀는 한참 동안 우두커니 앉아 있기만 했다. 그러다가 문득 곱씹듯이 조용히 내뱉었다.

“그건 내 꿈이 아니야.”

가볍게 쥔 주먹에 조금씩 힘이 들어간다.

“다른 사람, 다른 누군가의 꿈이야. 내 꿈이 아니야.”

몇 번이고 거듭하여 확인했다.

그 결과 그녀는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처음 그녀를 일깨운 단서, 용 석상뿐만이 아니다.

눈에 잘 띄지 않는 소소한 부분에서, 이번 꿈은 예전의 꿈과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단순히 시간이 훌쩍 지나서 생긴 변화라고 볼 수 없는 차이점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본래 부서진 이빨을 갖고 있어야 할 용 석상의 이빨이 모두 건재 한다던가.

저번 꿈에서는 오래 전에 베여나간 고목 정원수가 여전히 존재한다던가.

물이 말라서 메워버리고 화단으로 꾸민 연못에 아직도 맑은 물과 잉어가 가득하다던가…….

크게 두드러지지 않은 소소한 부분에서 그런 차이점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 차이점들을 낱낱이 확인한 신효진은 단단한 확신을 품었다.

이건 자신의 꿈이 아니라고. 전혀 다른 꿈이라고.

똑같은 인물들이 나오는 똑같은 스토리의 영화라 해도, 각색이 가미되었다면 그건 본래의 것은 아니지 않은가.

‘누구지? 누구의 꿈이지?’

처음에는 자신이 꾸던 꿈의 내용이 일부 변화한 게 아닐까 하는 상상도 해봤다. 하지만 그것은 아닐 것이라는 예감이 강하게 그녀를 사로잡았다.

설명할 순 없지만, 꿈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이 그녀에게 분명히 속삭였다.

이건 자신의 꿈이 아니라고.

다른 누군가의 꿈속이라고.

신효진은 다시 잠을 이루지 못한 채, 그렇게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신기하게도 피곤하지 않았다. 스칼린 왕비의 힘을 각성한 이후, 그녀는 육체적인 피곤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애초에 신체적 스펙 자체가 다르지 않은가.

어둠이 어느 정도 걷히자마자 그녀는 벌떡 일어나서 씻고 출근 준비를 마쳤다.

급히 현관문을 나서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는데, 누군가가 옆에 와서 서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출근하시나 봐요?”

흘끗 돌아보니 옆집 사는 젊은 청년이었다. 이런 고급 아파트에 살 정도면 집안이 얼마나 좋은 걸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신효진은 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네, 출근해요.”

“저, 혹시…….”

“안 타시나요?”

신효진은 어느덧 열린 엘리베이터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청년은 멋쩍어 하다가 물었다.

“그쪽은 안 타세요?”

“전 두고 온 게 있어서 다시 들어갔다 나오려고요.”

신효진은 방긋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청년은 어어 하면서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을 지켜봐야 했다.

엘리베이터는 지하 주차장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고, 아무도 타고 있지 않았다.

신효진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차를 타고 회사로 출근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사무실에 들어서자 직원들이 눈을 마주치며 인사했다. 신효진도 겉으로는 미소 띤 얼굴로 인사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태연한 표정과 달리, 그녀는 속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내 꿈이 아니라면…… 누구의 꿈이지?’

왕?

아니면 아버지?

혹은 그 외의 제3자?

전혀 짚이는 바가 없는 신효진은 가슴이 바짝바짝 메말랐다. 그나마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코르비우스 대마도사……. 아버지…….’

그는 꿈속에서는 스칼린 왕비의 친부지만, 신효진에게는 아버지라 부르기 어색한 존재였다. 예전 왕성에서 생활했을 때에도 친밀한 교류를 나눈 것은 아니었으니.

‘왜 아버지만 보이지 않는 걸까?’

진리의 깨달음을 혼자 다듬기 위해 수행을 하러 떠났다?

겉보기에는 그럴싸하지만, 왠지 다른 뭔가가 숨어 있을 듯한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반드시 아버지를 찾아야 해. 아버지라면 분명히 뭔가를 알고 있을지도 몰라.’

그녀는 손가락을 물어뜯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얼마 전, 멀리서 바라보던 왕의 뒷모습이 일그러져 보이던 것이 생각났다.

당시에는 잘못 봤거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다른 이의 꿈인 것과 연관이 있다면?

생각의 정리를 마친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

“박사님께 말씀드려야겠어!”

그녀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한서진의 사무실로 향했다. 불이 들어온 것을 보니 안에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녀는 노크를 한다는 것도 잊어버린 채 문을 벌컥 열었다.

“꺄악! 죄송해요!”

사무실 풍경을 본 그녀는 저도 모르게 놀라서 얼른 문을 닫아버렸다. 한서진이 무릎 위에 송하나를 앉힌 채 서로 끌어안고 있었던 것이다. 그 둘도 신효진 못지않게 당황했다.

등을 돌린 채 문에 기댄 신효진은 가쁜 숨을 토했다. 그녀는 그제야 발견했다.

‘아, 블라인더가 내려가 있었구나.’

급한 마음에 그런 줄도 모르고 벌컥 열어버렸으니.

그녀는 귀밑이 조금 빨개진 채 자리로 돌아왔다. 상황을 눈치 챈 다른 직원들이 말없이 묘한 웃음만 보냈다.

‘잘 어울려. 두 사람…….’

자리에 앉은 신효진은 멍하니 아까 봤던 사무실 광경만 생각했다. 둘은 약혼 사이고, 둘만 있는 공간에서 껴안고 있는 게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하물며 한서진은 이 회사의 유일한 오너인데.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쓰린 걸까?

한서진의 모습 위로 아서 왕이 겹쳐 보인다. 신효진은 턱을 괸 채 괜히 손가락으로 탁자만 톡톡 두드렸다.

“효진 씨, 아깐 제가 방해했죠?”

송하나의 목소리에 신효진은 화들짝 사색에서 깨어났다. 코앞에서 송하나가 난감한 미소를 띤 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한테 하실 말씀 있으면 이제 들어가 봐요. 오빠도 효진 씨 기다리고 있어요.”

“아, 네. 아까는 미안했어요. 급한 마음에 그만.”

“괜찮아요. 오히려 제가 미안하죠.”

송하나는 몸을 돌리기 전 한쪽 눈을 찡긋했다.

“저녁에 같이 스포츠 센터 가기로 한 거, 잊지 말아요.”

“아, 그럼요. 기억하고 있어요.”

“그럼 이따 봐요.”

송하나는 다른 직원들에게까지 친절하게 인사를 건네고는, 경호원들과 함께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신효진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사무실로 향했다. 블라인더가 올라가 있었지만, 그녀는 굳이 문 앞에서 노크를 했다. 그리고 들어오라는 말에 문을 열고 들어섰다.

한서진이 조금 민망한 웃음으로 그녀를 맞이했다.

“효진 씨, 아까는 많이 놀랐죠? 그게…….”

“괜찮아요. 두 분은 곧 결혼할 사이잖아요. 괜히 좋은 시간을 방해한 제가 죄송하죠.”

신효진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서 왕’이 아닌 한서진 옆에 있는 게 신효진이라면 어떨까? 그런 현실이 가능하다면, 스칼린 왕비의 인생을 완전히 포기할 수 있을까?

‘모르겠어…….’

그녀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억지로 씹어 삼키며, 조용히 말을 꺼냈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꿈에 관한 이야기예요.”

“뭔가요?”

“제가 다시 꿈을 시작했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아무래도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그것도 아주 큰 거요.”

“큰 문제요?”

한서진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는 신효진을 향해 상체를 가까이 내밀며,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그 꿈이 아무래도…… 제 꿈이 아닌 것 같아요.”

“효진 씨의 꿈이 아니라고요?”

한서진은 당장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신효진은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적시며, 설명을 덧붙였다.

“저, 아니 스칼린 왕비 말고 레노지안의 다른 인물…… 그 사람의 꿈속에 들어온 것 같아요.”

“그게 가능합니까?”

한서진은 무척 놀라워하며 반문했다. 선뜻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효진 씨는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여러 가지…… 제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른 것들이 널려 있어요. 그걸 보고 확신했어요. 이건 제 꿈이 아니라는 걸.”

“…….”

“설명할 순 없지만,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어요. 이건 다른 누군가의 꿈이라고, 제가 그 사람의 꿈속에 들어온 거라고.”

“증거는 없다는 거군요…….”

“네, 그래요. 하지만 저는 확신해요.”

“코르비우스 대마도사는 찾았습니까?”

“아직요. 지금 한창 찾고 있는 중이에요.”

“일단 그를 찾아야 뭐라도 진행될 것 같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버지라면 분명히 뭔가 단서를 알고 있을 거예요. 그런데 만에 하나…….”

신효진이 뭔가 마음에 걸린다는 듯이 머뭇거리자 한서진은 애가 탔다.

“뭐 때문에 그러시나요?”

“다른 누군가의 꿈이라면, 이번에는 누가 리미트리스 드림에 걸린 거죠?”

“…….”

“아서 왕일까요, 아니면 아버지일까요?”

이것은 노신하 대마도사가 깨달음과 수행을 명분으로 왕성을 떠나기 몇 년 전의 일이다.

어느 오후, 노신하와 왕은 정원을 한가하게 거닐며 모처럼 기분 좋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저주의 극복이 멀지 않았소. 모두 경의 노고 때문이오. 정말 고맙소.”

“그것이 어찌 신 혼자만의 공이겠습니까. 저주의 해소를 위한 마법사들과 사제들의 단합 덕분입니다. 아무쪼록 그들에게 큰 상을 내리소서.”

“걱정 마시구려. 짐은 그들뿐만 아니라 경에게도 부족하지 않을 상을 내릴 거요.”

“상…… 혹시 소신이 받을 상을 정해도 되겠습니까?”

“경이 갖고 싶은 게 있었소?”

왕은 놀랍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그 표정에는 반가운 마음이 가득했다.

욕심 없는 것으로 유명한 노신하가 자신에게 먼저 상을 청하다니. 왕은 값진 생일 선물을 눈앞에 둔 소년처럼 마음이 급했다.

“망설이지 말고 말해 보시오. 경이 원하는 거라면 내가 무엇이든 들어주리라.”

“조용한 곳으로 수행을 떠나고 싶습니다.”

“……경. 그 무슨…….”

“신이 리미트리스 드림의 해소를 연구하며, 우주의 진리에 관해 몇 가지 얻은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것을 신의 것으로 소화하기에 왕성은 너무 번잡하고, 소란스럽습니다. 조용히 머리를 식히고 사색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

“폐하, 부디 신의 간청을 들어주소서.”

“……그것이 정녕, 경이 진정으로 원하는 상이오?”

“그러하옵니다.”

왕은 물끄러미 노신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한숨을 쉬며 끄덕였다.

“할 수 없지. 경이 원하는 상을 내리리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그래서…… 언제 떠날 생각이오?”

“바로 지금 떠나겠습니다.”

“뭐요, 지금 떠나겠다고?”

왕은 깜짝 놀라서 반문했고, 노신하는 그럴수록 더욱 허리를 숙여 보였다.

“오래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폐하께서 허락하셨으니 더는 지체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저주를 완전히 이겨낸 것도 아닌데…….”

“이 이상은 소신이 없어도 되옵니다. 다른 신하들이 무탈 없이 마무리를 지을 것입니다.”

왕은 한참의 번뇌 끝에 할 수 없다는 듯이 끄덕였다.

“좋소. 그 대신!”

“…….”

“오늘은 안 되고, 모레 떠나시오. 내일 경을 위한 연회를 열어야겠소.”

“폐하.”

“이것마저 거부한다면 경에게 내리기로 한 상 자체를 취소해버릴 거요.”

주군의 친근한 협박에 노신하는 할 수 없다는 듯이 허리를 펴며 고개를 숙였다.

“하해와 같은 성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짐은 이만 들어가 보겠소. 연회를 준비해야 할 테니.”

노신하는 멀어지는 왕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 왕의 뒷모습이 크게 일그러져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시공간이 왜곡되며 굴절하는 것처럼 보였다.

찰나의 변화였지만 노신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탄식을 내뱉었다.

“폐하께서 이처럼 급격히 깨어나시려 한 적이 없었거늘……. 린아, 설마 너냐?”

노신하는 주먹을 으스러지게 세게 쥐었다.

“윤회의 굴레에 들어간 네가…… 설마 폐하의 꿈에 다시 돌아온 것이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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