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75 왕의 검 =========================================================================
여당은 더 이상 여당이 아니었다.
정치권에서 행정부와 같은 편, 즉 대통령을 배출하여 정권을 창출한 당을 무릇 여당이라 한다. 그러나 현재 정계 상황을 가만히 짚어 보면, 누구라도 대통령과 여당이 같은 편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대통령은 아직까지 당적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적일 뿐이다. 근래 청와대가 해온 일들을 보면, 마치 여당이 아니라 정적을 대하는 것만 같다.
야당보다 더 가혹하고 철저하게, 당과 국회의원들의 비리를 들춰내고 있었으니까.
정재계를 향한 청와대의 칼날은 신분의 고하나 인물을 가리지 않고 사정없는 예기를 발하고 있었다.
성역 없는 비리 수사에 국민들도 환호하고 있었고, 보수언론은 한서진을 등에 업은(것으로 추정되는) 대통령을 감히 비난할 엄두도 못 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진성그룹과 여당 지도부의 회담이 기분 좋게 치러질 리가 없었다.
한적한 한정식 집에서 마주한 여당의 새 당대표, 김철민 의원은 시종일관 딱딱한 표정이었다.
“청와대 취임식 때나 얼굴을 비추시는 분을 이렇게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말에 은근한 가시가 느껴져서, 이서나는 속으로 보이지 않게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은 무의미한 신경전을 해봐야 소용없을 텐데.
아마도 진성그룹 회장이 평소 공식석상에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을 비꼬는 것이리라. 하긴, 대통령이 불러도 취임식 외에는 나가지 않는 직위 아닌가.
“다 한때 일이고, 선대의 일입니다.”
“본인과는 상관없다고 선을 그으시는 건가요. 뭐, 어찌 되었든 중요한 일은 아닌 것 같군요.”
이서나는 김철민 당대표를 차분히 응시했다.
평소라면 자신 앞에서 감히 눈도 제대로 못 쳐다볼, 아니 겸상 자체를 못해볼 인물이다. 진성그룹 회장의 이름은 이 나라에서 그만한 파워가 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불편함을 숨기지 않은 채,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
그는 이 상황이 자신과 당에 유리한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요즘 당의 운영 상황이 쉽지 않다고 들었어요. 당대표로 선출되신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고초가 많으시겠어요.”
“거대 여당을 운영하는 일인데 어디 쉽습니까. 수월할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그리고 진성그룹 회장님 앞에서 당 운영 업무가 어렵다고 호소해봐야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꼴 아니겠습니까.”
노련한 웃음으로 받아친다.
그 말에 담긴 가시는, ‘너희 그룹이 우리 당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할 처지는 아닌데?’ 라고 비웃는 듯이 느껴졌다.
“피차 무의미한 시간 낭비를 할 필요가 없을 것 같군요, 김철민 당대표님.”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이 만남을 청한 이유는 짐작하고 계실 텐데요?”
“짚이는 게 너무 많아서 오히려 어떤 것인지 선뜻 알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그룹을 운영하시는 분이니 고민거리가 워낙 다망하시지 않겠습니까?”
이미 서로 다 알고 있으면서, 능글맞게 말을 돌린다. 이서나는 그런 정치적 어법에 신물이 났다.
“현 정부의 갑작스러운 경제 정책 변경 때문에 지금 많은 기업들이 신음하고 있어요.”
“도원패 정부가 경제 정책에만 변화를 준 게 아니죠. 그보다 더 큰 건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정치인 입장에서야 검찰을 움직여 자신들에게 칼을 들이댄 게 가장 큰 수난이라 할 수 있으리라. 이런 상황에서 법인세 증가는 그들에게는 강 건너 불이나 마찬가지다.
“직접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그룹, 아니 많은 기업들이 여당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이서나 회장님께서는 그럼 그런 기업들을 대표로 저를 만나시려고 한 겁니까?”
“그렇게 말하기에는 거창합니다만, 많은 기업 오너와 임원들이 저와 다른 생각을 하진 않을 거예요.”
어느덧 코스 요리가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김철민은 말없이 술병을 들었다. 이서나는 두 손으로 내밀어 공손히 받았다.
사회적 신분은 현저한 격차가 있지만, 어쨌든 상대는 여당의 당대표이고 삼촌뻘 되는 연륜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술을 단숨에 마셔버린 뒤, 김철민은 조금 전과 달리 진지한 눈빛으로 이서나를 응시했다. 그것은 노려보는 쪽에 가까웠다.
“도원패 대통령은 지금 인기몰이식 정책을 펼치고 있죠. 국가와 국민이 어떻게 되든 간에, 자기 한 몸만 인기를 누리면 상관없다 식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덕분에 나라 전체가 안팎으로 경직되고 있고요.”
“법인세 증가…… 돌이킬 수 없는 자충수라고 생각합니다. 이 나라가 어떤 나라입니까? 땅을 파도 기름 한 방울 안 나오는 나라입니다. 오로지 인재와 수출만이 살 길입니다. 그런데 법인 소득세를 늘리면 당연히 기업 경쟁력이 죽고, 나라 경쟁력도 덩달아 죽습니다.”
진성그룹 회장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듣기에 달콤한 말이다. 그러나 이서나 입장에서는 너무 혀끝이 달아서 살짝 거북하기까지 했다.
“우리 여당은 이번 법인 소득세 증가 정책이 나라를 망칠 거라고 생각합니다. 경쟁력 있는 기업은 외국으로 떠나거나, 혹은 조세회피처에 자금을 돌리겠지요. 결국 안 그래도 힘든 내수 시장은 더욱 죽어버리고, 수출도 줄어들 겁니다.”
“그렇게 우려스럽게 보고 계시다면, 정치권에서 뭔가 나서 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마음만은 굴뚝같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이미 청와대는 여의도를 조준하고 쏴 갈기고 있는 상황입니다. 문제라는 것을 인식해도 어떻게 우리가 쉽게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요약하자면 자신들의 처우가 우선순위라는 것이다.
이서나는 조금 안심했다. 이 정도 반응은 충분히 예상했던 범위 안이다.
“도원패 대통령도 천년만년 모두와 싸우면서 척을 질 마음은 없을 거예요. 지금도 어느 정도 부담을 느끼고 있으리라 믿어요.”
“이서나 회장님,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만.”
“그래도 대화는 시도해주실 수 있지 않나요?”
“…….”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겨우 그 정도입니다. 한 번의 대화, 그 이상도 이하도 바라지 않습니다.”
성공이 아닌, 시도를 원한다는 것.
그 말뜻을 속으로 음미하던 김철민은 조금 풀어진 눈빛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그리고 대통령은 재계가 우리와 함께 하기로 했다고 받아들이겠군요.”
“충분히 그럴 수 있겠죠.”
“최종적으로 원하는 건 역시 법인세 증가를 막는 겁니까?”
“증가폭을 조금 완화하거나 시행 도입을 조금 늦추기만 해도 대만족입니다. 혹 실패로 돌아가더라도, 여당은 물론이고 누구도 원망하지 않아요. 모든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겠어요.”
“흠……. 의외인데요. 천하의 진성그룹 회장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실 줄이야.”
“아버지와 저는 달라요.”
이서나는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쐐기를 박았다.
“딱 한 번의 대화 시도, 제가 김철민 당대표님께 바라는 건 그것뿐입니다.”
한서진은 모처럼 백철중 회장과 만났다.
한강의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어느 특급 호텔의 펜트하우스 스위트 객실이었다.
거실에서 주문한 룸서비스를 사이에 놓고, 둘은 편안한 옷차림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돌솥비빔밥에 레드 와인이라니…… 뭔가 신기한 조합이군요.”
“자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이 호텔은 한식이 맛있네. 특히 비빔밥이 최고지.”
“비빔밥 한 그릇에 4만원 가까이 하는 건 좀 무서운데요. 제가 알던 비빔밥 가격이 아닙니다.”
“엄살도 심하군. 지구 최대의 화폐 은행을 소유한 자네가 고작 4만원에 무서워해서야 되겠나?”
지구 최대의 화폐 은행. 지구를 위성처럼 돌고 있는 금 소행성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런데 AU은 실물 화폐는 발행하지 않을 건가? 그래도 차세대 기축화폐인데.”
AU는 실물 화폐권이 무기명 증서 형태로 존재한다. 크게 1AU, 5AU, 10AU, 20AU, 50AU, 100AU 이렇게 다섯 종류가 있다.
1AU은 금 0.02g의 가치를 지니며, 원화로 환산하면 약 1,000원 정도가 된다.
그러나 무기명 증서는 상징적으로만 존재하며, 실제로 종이 증서가 발행된 적이 없다. AU는 보통 국가나 대형 은행, 다국적 기업 위주로 거래를 하기에 주로 100AU 단위만 발행했고, 유통되고 있다.
게다가 채권 증서로는 거의 발행하지 않고, 100% 전자 화폐 형태로만 거래되고 있었다.
“실물 화폐를 발행하면 어떤 식으로든 테러리스트와 암거래에서 쓰이게 됩니다. 추적도 번거롭고요. 그냥 지금처럼 전자 화폐로만 쓰려고 합니다.”
“전자 화폐는 안전한가?”
“절대로 안전합니다.”
타르타로스가 감시하는 한, 전자화폐로 발행된 AU는 불법 유통에서 철저히 안전하다.
“그나저나 이 나라는 언제나 시끄럽구만. 도무지 조용할 날이 없어.”
한서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받았다.
“저 때문이라는 건가요.”
“자네가 그 중심에 있긴 하지만, 자네 때문은 아니지. 자네 때문이라고 하면 부정적인 이미지가 연상되잖은가. 적당한 표현이 아니야.”
“H그룹도 이번에 제법 피해를 입겠습니다.”
“전혀 개의치 않네. 도원패 그놈이 설마하니 법인세 인상이라는 카드를 내놓을 줄은 몰랐지만, 결과적으로는 잘 된 일이지. 기업 소득세는 좀 더 거둬도 돼.”
H그룹에는 타격이 오지만, 국가 입장에서는 유리한 일이다. 그리고 그 과실은 궁극적으로 한서진에게 귀속된다. 그는 국가 그 자체에 지분이 있는 인물이니까.
“다만 서나가 조금 난처하긴 한 모양이야.”
“이서나 회장님이요?”
“진성그룹 경영이 정상화가 된지 얼마 안 됐잖나. 몇 년 전에는 비자금도 100조 원 이상 뜯겼고, 이리저리 그룹 내부 개혁도 많이 했고. 아마 인건비 지출이 상당히 늘었을 텐데, 크리티컬을 맞은 거지.”
“진성그룹이 그 정도면 다른 기업들은 두말할 나위도 없겠군요.”
“아마 머지않아 경영 악화로 휘청거릴 재벌 기업들이 하나둘씩 나올 걸세. 망하진 않겠지만 경영 정상화를 꾀하려면 알짜 계열사 몇 개 정도는 정리해야 할 거야.”
“누군가는 그 계열사들을 인수해야겠군요.”
“한 박사 자네가 나서주면 좋지만…… 자네가 나서기에는 규모가 너무 작지?”
SJ그룹이라 칭해지는, 한서진 직속 기업들이 나서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규모다. SJ그룹은 오래 전부터 국내 시장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언제나 세계를 눈높이에 두고 움직이곤 했으니.
“회장님이 나서 보시는 건?”
“내가, 아니 H그룹이 그럴 돈이 어디 있나.”
“제가 빌려드릴까요?”
“그래주겠나? 그럼 나야 정말 좋고.”
백철중 회장은 반색을 하며 좋아했다.
“명의는 하나 이름으로 할 테니까 아무 걱정 말게. 인수 장사가 잘 되면 나중에 태어날 자네와 하나 아이 탄생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렇지 않나?”
“탄생 선물…… 뭔가 회장님 스케일이 이상한 것 같습니다만.”
“이게 다 자네 닮아가느라고 그러는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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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잉태되기도 전에 계열사 몇 개가 생일 선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