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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473화 (473/609)

00473  왕의 검  =========================================================================

이서나는 창백해지려는 안색을 애써 다잡았다.

“세금이 오른다고? 그게 무슨 말이니?”

대기업은 세금을 포함한 국가 경제 정책에 그 어떤 존재보다 민감하게 반응한다. 하물며 한때 국내 1위에 오래 머물렀던 진성그룹은 말할 것도 없다.

세금에 관련된 정책 변화 같은 것은 항상 눈과 귀를 열어두고 바로바로 반응하게끔 체질을 구성했다. 그러나 이서나는 세금이 오른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못 들었다.

송하나의 말을 미루어 보면 분명 대기업 경제 활동에 관한 세금이 오른다는 것이리라. 왜 전혀 낌새도 못 느꼈지?

“진짜 모르셨구나. 법인세 이번에 오른대요.”

“법인세가 오른다고?”

“네, 최도 소득세율을 30%까지 올린다는 말이 있어요. 2구간 상한선도 150억 이하로 낮춘다는 말이 있고요.”

현재는 2억 초과 200억 이하의 소득에 관해서는 20%를, 그리고 200억 초과분에는 22%를 물리고 있다.

송하나의 말대로라면 2억 초과 150억 이하의 소득이 20%, 150억 초과분에는 최대 30%까지 올라갈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사실이라면 절대 경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전혀 못 들었는데!’

이서나는 표정 관리에 필사적으로 힘을 썼다. 다른 이도 아닌 송하나 입에서 나온 말이라면 신빙성이 매우 높다.

“혹시 한 박사님한테 뭔가 들은 거 있어?”

“아뇨, 오빠가 왜요?”

“……?”

“오빠는 그런 거 일절 신경 안 써요. 에테르학 연구에만 몰두하시는 분인 걸요.”

이서나는 일단 한시름 놓았다. 다행스럽게도 한서진이 경제 정책에 뭔가 개입하기로 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백철중 회장님께서 심경에 변화라도 겪으셨니?”

“아빠가 오빠 눈치 보느라고 착한 경영자 코스프레 하고 계시는 건 사실이지만, 굳이 법인세까지 건드리실 분은 아니에요. 아빠도 매번 세금 내는 거 아까워 죽겠다고 한탄하시는 걸요.”

한서진도, 백철중도 아니다.

그런데 법인세가 오른다는 것을 진성그룹은 전혀 낌새도 채지 못했다. 그렇다면 증세의 주체는 대체 누구지?

곰곰이 생각하던 이서나의 안색이 변했다.

“설마?”

“대통령이 칼을 뽑기로 했나 봐요.”

이서나는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청와대가 얼마 전부터 갑자기 미친 척 사정의 칼을 휘둘러 대는 바람에, 대기업 여럿이 뼈와 살점을 크게 잃었다. 임원들이 줄줄이 구속되고, 심지어 오너 일가가 실형 선고를 받은 기업도 있었다.

정재계에서는 도원패가 미친 것 아니냐는 시각이 우세했고, 여당마저도 청와대와 멀찍이 거리를 둘 정도였다.

자기 당의 국회의원들마저 아랑곳없이 공격해대는 통에, 여의도는 이미 쑥대밭이 된 지 오래였다. 각 기업들의 대관팀이 철수한 것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법인세까지 건드려?

‘진짜 끝까지 가보자, 이거야?’

도원패가 미친 듯이 휘두르는 사정의 칼날은 오히려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가 한서진과 손을 잡고, 국내에 망라한 적폐를 청산하고자 한다는 인식을 받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법인세까지 건드린다?

국민들의 지지는 당연히 올라갈 테지만, 반대로 그를 향한 정재계의 칼날은 더욱 날카로워질 것이다.

한서진이 뒤에 있다는 소문 때문에 당장 어쩌지는 못하지만,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그 칼날은 녹이 슬지 않을 것이다.

“하나야, 부탁이 있어.”

“일단 들어보고 생각할게요.”

“도원패 대통령…… 정말 한서진 박사님과는 아무런 관련 없이 움직이는 거니?”

“그분이 우리 오빠와 어울릴 스타일은 아니시죠. 우리 오빠가 정치에 관심 보일 사람도 아니구요.”

“그럼…….”

“얼마 전에 우리 아빠가 도원패 대통령과 비밀 독대를 했다는 건 사실이에요.”

“…….”

이서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쉽게도 송하나는 속 시원하게 알려주진 않을 모양이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도원패 대통령이 세금 정책을 바꾸면 H그룹도 타격이 클 텐데?”

“제가 조준하고 있는 게 H그룹은 아니잖아요.”

“…….”

당돌한 듯하면서도 납득해버릴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송하나가 한국 전체를 가시권에 두고 움직이고 있는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돈이 책상 위나, 거실, 혹은 부엌에 있든, 결국 내 집안에 있으면 내 돈인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한국이라는 집 그 자체를 원하고 있었다.

“만약 도원패 대통령이 공격당하면, 한 박사님은 불쾌하게 생각하실까?”

“신경도 안 쓸 거예요.”

“그럼 너는?”

“페어플레이만 펼친다면, 제가 뭐라고 말할 건 없죠. 제게 그럴 자격이 어딨어요?”

이서나는 진이 빠진 듯 하얗게 웃어 보였다.

“자격이 중요하니, 힘이 있다는 게 중요하지.”

도원패가 법인세 인상 정책을 고려한다는 소문은 마침내 청와대 밖을 흘러나와 여의도와 재계까지 흘러들어갔다.

이에 화들짝 놀란 이들은 급히 머리를 맞서고 대책 마련에 나섰다. 특히 중심 표적이 된 대기업들은 발등에 불이 난 듯이 뛰어다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조사를 한 결과, 그들은 어떻게 전개되는 흐름인지 대강 맥을 짚을 수 있었다.

“도원패 대통령이 정치인으로서 큰 욕심을 품었습니다. 아마 역사에 자기 이름을 긍정적으로 남기고자 하는 듯합니다.”

“긍정적인 이름을 남긴다? 역사에?”

“웜홀이 실용화 되면 산업 구조에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도 대통령은 그 과정에서 미래를 위한 의미 있는 밑그림을 그리려고 하는 모양입니다. 실업자 등 사회적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동시에 웜홀 관련 산업을 국가적으로 육성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

백철중은 보고를 들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H그룹은 사실 다른 기업들처럼 발등에 불이 떨어진 정도까지는 아니다. 불이 떨어진 건 사실이지만 방화신을 신고 있어서 전혀 뜨겁지는 않다고 할까.

소득세를 좀 더 내면 속이 조금 쓰리기는 하겠지만, 한서진과 그룹 간의 관계를 생각하면 별 거 아니었다.

다만 도원패 정권이 어떤 포지션에서 정책을 추진하고자 하는지 알아두는 것은 중요했다.

“도 대통령이 원래 그런 친구가 아니었을 텐데.”

백철중은 웃기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도원패는 본래 기득권 중의 기득권으로, 친재벌 인사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보수당의 중진으로서 국가가 아닌 기업을 위한 정치를 했다. 그것이 자신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수십 년을 그렇게 정치해온 사람이 이제 와서 자신을 키워준 재벌 기업들에게 총구를 돌릴 줄이야.

그전에도 사정의 칼을 휘두르면서 대기업들에 피해를 입혔지만, 이번 정책은 그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기도 하는 법이지만…….”

백철중은 흐릿하게 웃었다.

도원패의 성향이 갑자기 변한 게 아니다. 다만 그는 자신의 입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합리적인 선택을 했을 뿐이다.

아래에서는 김시형 파벌이 장악하고 있는 검찰이 시시각각 청와대를 노려보고 있고, 위에서는 한서진의 존재가 숨도 쉬지 못하게 짓누른다.

외교는 한서진을 위한 들러리 역할 밖에 수행하지 못하고, 실질적인 국가 운영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가 백철중이 건넨 제안을 받고 조금씩 숨을 쉬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재벌과 여당 등 그전의 인연과 선을 긋는 길을 택했다.

여기에 금 소행성과 웜홀 실용화까지 겹치며, 한국은 혼란의 격동기를 맞이했다.

이런 상황에서 도원패가 정치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길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는 지금까지의 자신을 완전히 버리고, 전혀 새로운 인물이 되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변화의 격동기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그저 임기만 떼운 무능한 대통령으로 남을 것이다. 아니, 그런 대통령이 있었나 하고 후대가 갸웃거릴 것이다.

“잊혀지는 건 어지간히 싫었나 보군, 그 친구.”

“예, 그런 것 같습니다.”

“겸사겸사 자기와 거리를 둔 대기업들도 한 번 밟아주면서, 동시에 지지율도 높이고. 머리를 잘 썼군.”

어딘가에서 세수를 확보해야 한다면, 일단 자신과 사이가 나쁜 쪽부터 칼을 대는 게 순서 아닐까.

마침내 청와대 대변인 입에서 법인세율 증가가 정식으로 공표되고, 한국 사회라는 호수에 다시 한 번 큰 파문이 일었다.

“웜홀 도입은 미래를 생각했을 때 피할 수도, 늦출 수도 없는 중대한 산업입니다. 웜홀을 통해 우리나라의 위상은 더욱 드높아지고, 부유해지게 될 겁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산업 구조의 변화로 많은 국민들이 예기치 못한 손해를 입게 됨은 피할 수 없습니다…….”

연설문을 낭독해가는 청와대 대변인의 눈빛은 강한 힘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그 모든 것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치겠습니다! 일자리를 잃는 분들을 적극 돕고,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겠습니다! 웜홀 산업은 많은 일자리를 사라지게 하겠지만, 동시에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습니다! 우리 정부가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그리고 정점을 찍었다.

“그러기 위해서 많이 버는 자들로부터 더 많은 세금을 거둬야 합니다! 이것은 미래를 지향하기 위해 피할 수 없는 선택입니다!”

부자 감세를 주장했던 이들이 돌연 부자 증세를 주장하고 나섰다. 이에 많은 경제학자들과 국민들이 혼란스러워했다.

아무리 도원패가 한서진의 오더를 받고(국민들은 그 소문을 믿는다) 사정의 칼을 거침없이 휘둘렀다지만, 설마 자충수가 될 대기업 증세까지 주장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왜 하필이면 법인세야?’

도원패의 사심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품은 의문이었다.

국민들은 법인세 증가에 관해서 적극 호응했다. 대기업으로부터 세금을 많이 거둬서 새로운 산업을 육성하고,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겠다는데 누가 반대할까.

실제로 그런 변화가 가능할지 아닐지를 떠나서, 대중의 진심에 호소하기에는 충분한 명분이었다.

여기에 H그룹이 성명 발표를 내면서 불에 기름을 끼얹은 형국이 되었다.

―우리 H그룹은 정부의 법인세 증가 정책에 찬성한다. 솔직히 돈 잘 버는 대기업들은 세금을 좀 더 내도 된다.

그런 취지로 요약될 수 있는 성명 발표에 청와대는 더 큰 힘을 얻고, 적극적으로 여의도를 압박했다.

H그룹이 총대를 메고 그렇게 지원 사격을 해주니, 다른 대기업들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6위에 꼽히는 어느 재벌 그룹이 용기를 내서 힘든 재정 상황을 고하며 호소했지만, 오히려 여론의 반발 폭탄만 얻어맞고 휘청거렸다.

대대적인 불매운동이 벌어지고 그룹 이미지가 최악으로 치닫자 결국 총수가 직접 나서서 허리를 숙이며 사과까지 해야 했다.

유권자들은 도원패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국회의원 시절과 전혀 다른 인물이 되었다며 놀라워했고, 그를 싫어했다가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선 이들도 상당했다.

“도원패가 대통령이 되더니 진짜 사람이 됐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정말이네.”

대통령 노릇을 하기에 최악으로 안 좋은 시대적 상황.

웜홀 때문에 일자리를 잃게 된 많은 사람들의 시위에 시달리다가 얻은 스트레스.

무엇보다 자신이 과거 한서진과 틀어졌을 때 재빠르게 등을 돌린 재벌 총수들에 대한 원망.

그런 복잡한 상황이 맞물려서 저지른 일이라는 것을, 국민들은 전혀 몰랐다.

============================ 작품 후기 ============================

모르는 게 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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