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72 왕의 검 =========================================================================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신효진이 놀랄 거라고는 예상했다. 그러나 그녀의 반응은 그가 예상한 것을 뛰어넘었다.
품에 달려들 듯이 두 팔을 움켜잡고는,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눈으로 올려다본다.
“리온, 리온이 박사님 몸으로 깨어난 적이 있다고요? 그게 정말인가요? 어, 언제요?”
“진정하세요, 효진 씨.”
“빨리 말씀해 주세요! 그게 언제예요!”
크게 놀랄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격렬한 반응을 보일 줄은 미처 몰랐다. 순간적으로 괜히 말을 꺼냈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으니까.
“일단 진정부터 해요, 효진 씨. 이렇게 붙잡으시면 제가 말을 하고 싶어도 못해요.”
“……아.”
그제야 신효진은 겨우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어머.”
상황을 의식하니, 자신이 한서진의 품에 뛰어든 채 반쯤 안겨 있는 꼴이었다. 그녀는 후다닥 두 걸음쯤 물러나며, 흐트러지지도 않은 옷매무새를 애써 다듬었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과했죠.”
“괜찮습니다. 다만 앞으로는 좀 주의해주시면…… 효진 씨는 맨손으로 티타늄 합금을 일그러뜨리는 분이잖아요.”
한서진은 가벼운 농담으로 어색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렸다.
신효진은 한손으로 가슴골을 가린 채 거듭 머리를 숙였다.
“정말 죄송해요. 리온, 아니 아서 왕이 현대에 깨어났었던 적이 있다니까 제가 너무 다급해서…….”
“이해합니다. 괜찮아요.”
한서진은 신효진이 이렇게까지 격한 반응을 드러내는 것은 처음 보았다. 그것은 그만큼 아서 왕, 꿈속의 반려가 그녀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리라.
그녀는 하루의 절반은 신효진으로,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스칼린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스칼린 왕비의 삶은 신효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한서진은 조용히 물었다.
“효진 씨는 어디에 살고 있나요?”
언뜻 듣기에는 별 거 아닌 듯한 질문. 그러나 신효진은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렸다.
그녀는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이곳 한국에 살고 있지요.”
드디어 한국에서도 웜홀 설치 및 이용에 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했다.
웜홀을 주파수 대역 같은 공공재로 봐야 하는지, 철저한 사유재로 인정해야 하는지를 놓고 처음에는 첨예한 의견이 엇갈렸다.
공공재파는 웜홀이 공간의 뒤틀림을 이용하는 것을 들어 공공재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고, 사유재파는 오직 한서진만이 만들 수 있는 것을 공공물로 보는 것은 무리한 시각이라고 반박했다.
격론 끝에 웜홀을 공공재로 인정하자는 의견은 한풀 꺾였다.
대신 훗날 웜홀을 누구나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릴 때까지만 한시적인 효력을 지닌 법률이라는 점을 분명히 명시했다.
웜홀 기술이 보편화될 미래에는 공공재로 재규정할 의사를 담은 단서 조항이었다.
―한서진이 살아 있는 한 결코 발동할 리가 없는 단서 조항이 될 것이다.
웜홀 지식이 보편화될 수 있는 그 날이 과연 오기는 할 것인가를 놓고 많은 의견들이 엇갈리긴 했지만, 어쨌든 한국에서도 웜홀 상용화를 위한 법적 기반이 자리를 잡았다.
웜홀 상용화가 초읽기에 들어갔지만, 여론에서 박수만 쏟아진 것은 아니었다.
―광화문은 오늘도 시위대 거리 행진!
―전국 해운업 종사자들, 전격 파업 선언!
―조선업 종사자들도 여기에 가세하다!
웜홀 상용화로 가장 크고, 빠른 타격을 입는 곳은 해운업 부분으로 손꼽히고 있었다. 바다를 이용할 필요가 없이 컨테이너를 직접 화물차로 실어 나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컨테이너를 항구까지 운반했다가 선박에 적재하고, 다시 항구에서 적하하는 과정이 사라지게 되니, 운송 속도의 증가와 운송비용의 절감을 동시에 꾀할 수 있게 된다.
물류 유통의 80% 이상이 해운을 통하는 국제 사회의 흐름이 단숨에 뒤집히게 되고, 그 타격을 해운업 종사자와 조선업 종사자들이 고스란히 덮어쓰게 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 해운 종사 근로자들 및 그 가족의 생계에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국민 전체의 생계가 달린 문제입니다! 웜홀 상용화가 야기할 일자리 소멸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입니다!”
“옳소! 옳소!”
“그런데 현 정부는 급변하는 미래에 관해서 어떤 대책도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힘없는 서민들이 굶어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겠다는 겁니다! 저는 이 같은 처사에 분노합니다!”
시위 주최자가 무대에 서서 마이크를 잡고 열변을 토하자, 광장에 빽빽하게 앉은 시위자들이 일제히 튜브를 두드리며 함성을 내질렀다.
시위는 민간 노조로만 구성된 게 아니었다. 정치인들도 이에 적극적으로 가세했다.
다분히 표심을 의식한 행보이기도 하지만, 운송업계가 입을 타격이 그들 정치 인생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그들에게 있어 한서진은 더 이상 자랑스러운 한국인이 아니었다. 자신들 생계 터전을 짓밟는 악마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여론이 극명하게 갈린 상황에서, 도원패 정부는 마땅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쩔쩔맸다.
“대통령님, 국론 분열 갈등이 너무 심합니다.”
“웜홀 상용화를 반대한다는 비율이 어느 정도나 되나?”
“여론조사 결과 41%의 국민들이 웜홀 상용화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나왔습니다. 수치만 보면 찬성자들보다 훨씬 적지만, 하나같이 열성 반대자들이라는 게 문제입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80% 이상이 웜홀 기술 개발에 열광적으로 반응했었다. 그랬다가 웜홀 도입이 생계에 직접적인 영향력이 있다는 게 널리 알려지면서, 급히 방향을 튼 것이다.
“하여튼 민심이란.”
도원패는 혀를 차며, 보고 내용을 살폈다.
어떻게 된 게 대통령이 되고 나서부터 하루도 발을 뻗고 잘 날이 없었다. 2억 안 되는 연봉 받자고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고 자괴감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역대 대통령들은 국가 돈을 조 단위로 교묘하게 많이 해먹었는데, 재정감시 TF팀이 눈에 불을 켜고 국가 재정 흐름을 감시하고 있어서 그러지도 못한다.
단돈 백만 원이라도 올바른 흐름을 벗어나면 귀신같이 알아내서 검찰에 고발이 들어간다.
덕분에 여의도를 제 집 드나들듯이 하던 대기업 대관작업 팀은 이미 철수한 지 오래다. 정치인들은 기업인들과 식사 한 번 하기는커녕, 통화 한 번 하기도 어려운 처지다.
지금 시기에 대통령을 한다는 건 미친 짓이라는 것을, 도원패는 매 시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해운업계와 조선업계가 입을 피해는 어느 정도나 되나?”
“당장 추산된 타격 수치를 금전으로 환산했을 때 총합 98조 원 규모입니다.”
98조 원이라는 액수에 도원패는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놀랐다. 심지어 ‘당장’이라고 했다.
“중요한 것은 당장 입게 될 타격과 미래까지 누적될 타격이 아닙니다. 머지않아 산업 자체가 사라져 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설마 조선업까지?”
“군함, 유람선, 어선 같은 국한된 종류를 제외하면 더 이상 배를 만들 필요가 없으니까요. 화물선 제조라인은 이미 철수를 준비 중입니다.”
전 세계적인 흐름이고, 돌이킬 수 없는 변화였다.
도원패는 지금이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라는 것을 느꼈다. 여기서 어떤 선택을 하든 자신은 두고두고 대한민국의 역사에 회자된다.
“당장은 피해를 입게 될 업계에 손해를 보전해주면서, 웜홀 관련 차세대 산업을 국가적으로 육성하는 정책을 펼쳐야겠어. 전문가들 닥치는 대로 불러서 정책 논의해.”
“하지만 그러려면 예산이…….”
“국회에 추경 예산 제출하고, 그리고…….”
도원패는 입을 잠시 굳게 다물었다가 이를 갈듯이 떼었다.
“법인세 올린다.”
“예?”
비서실장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고, 도원패는 이를 바드득 갈듯이 덧붙였다.
“법인세 증가 정책을 시행해야겠어.”
“대통령님. 그건…….”
“예산이 부족하다며? 그럼 세금을 더 거둬야지. 지금 세금 더 걷을 데가 유보금 쌓아두고 돈 잘 버는 대기업들 말고 더 있나?”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본래 친기업적인 성향의 대통령이 이런 선택을 할 줄은 몰랐다.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굴던 재벌 총수놈들, 내가 한서진 박사하고 틀어지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등 싹 돌리지 않았나? 근데 내가 왜 그놈들 편의를 봐줘야 하지?”
“…….”
“예산이 모자라서 돈 있는 놈들한테 세금 더 걷겠다는데, TF팀이 뭐라고 할 명분이 있나? 거긴 신경도 안 쓸 걸?”
도원패의 눈동자는 오랜 굶주림 끝에 먹이를 발견한 독사처럼 날카롭게 번들거렸다.
회장에 취임한 후, 이서나는 진성그룹을 완전히 장악하고 경영을 정상화하는 데에 온힘을 쏟았다.
특히 후계자에서 밀려난 남동생, 이용무가 호시탐탐 경영권을 노리는 것을 방어하는데 애를 써야 했다.
한때 100조 원대의 비자금 때문에 그룹이 둘로 나뉠 뻔했으나, 사회에 모두 환원하는 과정에서 그것만큼은 막았다.
100조 원의 비자금을 송두리째 날린 것은 뼈아픈 일이지만, 그룹의 분열을 막고 경영권을 지킨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소득이었다.
진성그룹은 이제 명실공히 한국의 2인자 재벌이었다. 그것도 1인자인 H그룹과는 아득한 격차가 벌어진.
물론 그 위에는 SJ그룹이 있지만, 애초에 SJ그룹은 기업 서열에서 논외로 친다. 말 그대로 구름 위의 천상계에 존재하는, 인간을 초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날도 업무를 보느라 정신이 없던 이서나는 반가운 손님을 맞이했다.
“어머, 하나 왔니?”
“네, 바쁘신가 봐요. 제가 방해된 건 아니죠?”
“아무리 바빠도 우리 송하나 사모님 접대할 시간은 감사히 내드려야지. 잘 왔어.”
이서나는 결재 중이던 서류를 모두 내려놓고 일어섰다. 송하나는 책상을 흘끗 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언니, 보실 서류 많으신 것 같은데요.”
“이런 건 그냥 비서한테 도장 주고 대신 찍으라고 하면 돼.”
그리고 이서나는 정말로 그 자리에서 비서를 불러다가 결재 도장을 찍으라고 시켰다.
몇 천억짜리 결재 서류를 검토하는 것보다는 송하나를 상대하는 것이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행동으로 직접 보여주는 것이다.
“신부 수업은 어때? 잘 하고 있니?”
“그럭저럭이요.”
“한지혜 양하고 아주 죽이 잘 맞는다는데. 이 바닥에 소문이 자자하더구나.”
“지혜 언니가 저랑 하는 일이 비슷하잖아요. 언니는 가문 명예 관리, 저는 오빠 명예 관리.”
한서진 개인의 명예와 한씨 가문의 명예는 사실 떼어놓고 볼 수 없는 것이다. 둘이 하는 일은 비슷하다기보다는 거의 같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늦었지만 웜홀 상용화 축하해.”
“감사해요. 오빠한테도 전해드릴게요.”
“우리 그룹도 어떻게…… 안 될까?”
“진성그룹이 할 수 있는 일도 분명 있을 거예요. 오빠는 특정 기업을 일부러 배제하진 않거든요. 아, 미국 거대 금융 자본 같은 건 빼고요.”
“마음 같아서는 회사 기둥뿌리를 뽑아서라도 투자하고 싶은데…… 요즘 회사가 너무 힘들어서.”
“하긴, 세금 때문에 이제 많이 힘드시겠구나.”
아무렇지 않게 흘리듯이 던진 말, 그러나 이서나는 대번에 표정이 굳었다.
“그게 무슨 말이니?”
“모르셨어요? 이번에 세금 오른대요.”
============================ 작품 후기 ============================
편히 잠드소서, 세금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