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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471화 (471/609)

00471  왕의 검  =========================================================================

신살검.

한서진은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신을 죽이는 검…….

진리를 담은 칼이라는 아카식 블레이드라는 이름보다, 훨씬 더 ‘저것’에 어울리지 않는가.

그는 가벼운 소름이 돋은 채 아카식 블레이드, 아니 부러진 신살검을 응시했다.

“왕가의 보검이라고요?”

“네.”

“레노지안이 멸망할 때 함께 했었다고요?”

“……네, 그랬어요.”

한서진은 가만히 떠올렸다.

아서 왕에게 육체 통제권을 빼앗겼을 때, 스치듯이 낡은 환영처럼 보았던 광경. 수도 없이 널브러진 백골과 온 사방에서 풍기는 죽음의 악취.

그 정점에, 저것도 함께 있었던 것인가?

신효진은 넋을 잃은 듯이, 신살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어떻게 저게 이곳에…… 아니, 그보다 왜 저렇게 큰 거죠? 제가 아는 신살검은 저렇게 크지 않았어요.”

“레노지안인들이 지구인들보다 거대한 거인족이거나, 아니면 우주나 차원을 넘어오는 과정에서 신살검이 커진 것이겠죠. 저는 전자라고 보고 있습니다만.”

“거인…….”

신효진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홀린 듯이 알아듣지 못할 중얼거림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이쪽을 돌아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건가요?”

“아카식 블레이드, 아니 신살검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태평양에서 갑자기 떠오른 것을 미군이 건진 겁니다.”

“……미군이요?”

“당시 루즈벨트 대통령은 Table A라는 특무기관의 시초를 만들어 신살검을 연구하게 했죠. 맨해튼 프로젝트 등 미국의 특급 기밀 프로젝트가 Table A와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미국은 신살검을 연구해서 얻은 지식으로 수십 년 동안 세계 과학을 선도할 수 있었고요.”

역사에는 결코 언급될 일이 없는 어마어마한 기밀들을, 한서진은 저녁 식사 메뉴를 알려주듯이 덤덤하게 언급했다.

“미국은 신살검을 아카식 블레이드라 부릅니다. 그리고 그 통제는 전적으로 Table A라는, 대통령의 권한마저 벗어난 비밀기관이 독점하고 있지요. 미국 대통령이 알 필요가 없다고 Table A가 판단하면, 현직 대통령도 그 존재를 알지 못합니다.”

“…….”

“우주의 진리에 관한 지식을 간직하고 있는 외우주의 보물, 미국과 Table A는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어요.”

“……정말 이해가 안 돼요. 신살검이 왜 여기에……. 그것도 이렇게 부러진 채로…….”

“효진 씨는 레노지안이 멸망할 때 아서 왕과 마지막까지 함께 했던 검이라고 하셨지요.”

“…….”

그 말에 신효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좁고 가냘픈 어깨가 비 맞은 아기 참새처럼 파르르 떨린다.

“레노지안의 멸망은…… 미래가 아니라 이미 일어났던 일이군요.”

“…….”

“박사님도, 저도…… 둘 다 과거의 환영 속에서 레노지안을 보고 있었던 거네요.”

신효진은 레노지안이 멸망하는 미래를 봤다. 그 순간에 신살검이 부러지는 것도 봤다.

그리고 부러진 신살검의 파편이 이곳 지구에 존재한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자명하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가 아니라, 이미 오래 전에 일어났던 과거라는 것.

“효진 씨, 신살검이 부러졌다고 해서 레노지안이 반드시 멸망했다고는 볼 수 없어요.”

“전 최후의 성전에서 신살검이 부러진 걸 봤어요.”

“하지만 그 뒤는 아직 모르시잖아요.”

“…….”

“섣불리 단정할 순 없어요. 부러진 신살검이 유력한 증거이기는 하나, 아직 우리 눈으로 직접 확인한 건 아닙니다. 생각해봐요. 레노지안의 멸망을 막아달라고 신살검이 우주와 차원을 넘어서 우리를 찾아온 걸 수도 있어요.”

신효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우두커니 서서 신살검을 바라보기만 했다. 침묵에 젖은 그녀의 옆모습이 묘한 매력을 자아낸다.

“우리가 하는 일…… 과연 의미가 있는 걸까요?”

“효진 씨.”

“레노지안은 이미 멸망했는데.”

여기 증거가 눈앞에 있잖아요. 라고 말하는 듯이 그녀가 돌아보았다. 우울함이 가득한 눈빛을 보고, 한서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참 후 그가 표정을 다잡고 다시 말을 꺼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한 채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

“…….”

“그래요. 효진 씨 말대로 부러진 신살검이 오래 전에 레노지안이 멸망했다는 증거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믿고 싶지 않은 걸 부정하는 걸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레노지안을 찾지 않을 겁니까?”

“박사님…….”

“그리고 생각해봐요. 시간으로 구성된 차원은 아직 미지로 넘쳐납니다. 부러진 신살검이 여기에 존재한다 해서, 정말로 그쪽 차원이 멸망했다고는 단정할 수 없어요.”

“시간여행 같은 걸 말씀하시는 거예요?”

“비슷합니다. 시간축은 얼마든지 어긋날 수 있고, 우리 시점에서는 일어난 일이라도 그쪽에서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일 수도 있습니다. 신도 존재하는 세상인데 미래에서 검 하나 뚝 흘러나오는 게 뭐가 이상합니까?”

신효진의 표정이 조금씩 나아졌다. 한서진의 열띤 설득에 어느 정도 믿음을 얻은 것이다.

“신살검은 과거의 유물일 수도 있고, 미래에서 현재로 시간 여행을 해온 걸 수도 있습니다. 후자라면 아직 우리, 아니 레노지안에 기회가 있다는 말이죠.”

한서진의 음성이 차분해졌다. 그러나 눈빛은 더 단단한 힘을 품고 그녀를 주시했다.

“포기하기에는 아직 일러요.”

마침내 신효진도 천천히 끄덕였다.

한서진은 Table A의 기원과 정체에 관해서 자세한 설명을 추가로 해주었다. 신살검을 통해 미국이 어떻게 초강대국이 되었는지 구체적인 배경도 덧붙였다.

미국 대통령도 접근이 제한된 미국 최고의 기밀이다. 당연히 일반인들은 그 존재조차 알 수 없다.

신효진은 모든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었다. 간간이 손뼉을 치고 놀라워하기도 했다. 그녀에게는 그 모든 게 신기하고 흥미로운 주제였다.

“그럼 Table A는 대체 돈이 얼마나 많은 거예요? 박사님보다 더 많아요?”

한서진은 순간 웃음이 터질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자산으로 따지면 지구상에서 저를 이길 수 있는 개인이나 단체는 없죠. 국가라면 모를까요. 100억 톤짜리 금 소행성 하나만 내세워도 모든 게임이 끝납니다.”

“앗, 맞다. 죄송해요.”

“Table A는 회사가 아니라 현대 미국의 정체성을 정립하고 이끄는 곳입니다. 사람으로 치면 뇌하수체 같은 거죠.”

“뇌하수체……. 뭔가 엄청 중요해 보여요.”

“중요하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미국 발전의 길과 질서를 만들어내고 주도하는 곳이니까요. 그렇다고 특별한 이권을 취하는 것도 아닙니다.”

Table A가 그 막대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통제에서마저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정체성에 있었다. 바로 미국을 향한 끝없는 헌신.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기관.

“저도 신살검을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습니다. 지금은 Table A와 공동으로 연구하고 있지만, 사실상 저의 손으로 넘어왔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래도 명목상으로는 미국 소유죠?”

“뭐, 그렇긴 하죠.”

“조금 우습네요. 신살검은 그 태생부터 당연히 박사님 물건인데……. 지금은 남의 물건이라니.”

신효진은 눈으로 쓰다듬듯이 신살검을 올려다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모습이 마치 자신과 아서 왕을 동일시하는 것처럼 느껴져, 한서진은 마음 한구석이 조금 간지러웠다.

“Table A는 당연히 레노지안에 관해서는 모르겠네요?”

“당연하죠. 레노지안 이야기를 털어놓은 것은 효진 씨가 유일합니다.”

“앞으로도 그럴까요?”

“……아마도요.”

“지금 그 말씀,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을 여지가 있다는 말씀처럼 들리는 거 아세요?”

신효진은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봤다. 마치 다 안다는 듯한 눈빛에 한서진은 괜히 시선을 피했다.

‘먼 훗날…… 어쩌면 하나한테만큼은 말할 일이 생길지도 몰라.’

송하나는 물론이고 누구에게도 말할 생각이 없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 않을까. 한서진은 그 점에서는 100% 단정을 할 수 없었다.

“저는 박사님 외에 누구에게도 레노지안 이야기를 하지 않을 생각이거든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여지는 있으시다는 거잖아요. 저처럼 never ever가 아니고요.”

이 분위기, 조금 위험한데.

그녀는 원래 화려한 외모와 달리 있는 듯 없는 듯이 나긋나긋하면서도 조용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스칼린 왕비의 힘을 얻으면서부터 그 미모에 어울리는 자신감까지 덧칠해졌다.

그러고 보니 레노지안에서 그녀와 자신은 세상에 둘도 없는 잉꼬부부가 아니던가.

새삼 그 점을 상기하자 괜히 어색해졌다. 그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아무튼 신살검은 제 통찰안으로도 뚫어볼 수 없어요. 그래서 에테르 수퍼컴퓨터 타르타로스를 이용해서 조사하는 게 유일한 접근 방법입니다. 그 효율을 높이려고 BII를 만들었고요.”

“BII요?”

신효진은 흥미를 보였고, 한서진은 개발 배경에 얽힌 이야기를 간단히 해주었다. 그녀는 소녀처럼 천진하게 반응했다.

“어머, 그런 비사가 있었군요. 전혀 몰랐어요.”

“뭐, 사람들이 겸사겸사 좋은 일이 활용하고 있어서 더 잘 되긴 했지요.”

“전 시각장애인들을 위해서 개발하신 거라고 믿고 있는 쪽이었는데, 전혀 생각도 안 하셨었구나.”

“……인정합니다. 최근 제가 하는 연구는 대부분 레노지안 접근 방법과 연관된 게 대부분이에요.”

조금 전 어색한 분위기가 겨우 걷혔다.

한서진은 신살검을 홀린 듯이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치를 슬쩍 살피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레노지안의 흔적은 사실 하나가 더 있어요.”

“정말이요?”

“아마 효진 씨도 보시면 아실 겁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한서진은 연구함의 다른 장소, 오리할콘 뼈가 보관된 제2구역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거대 공동에 덩그러니 놓인 흰 두개골을 본 순간 신효진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이 굳어버렸다.

“이, 이건……!”

“발견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어요. 얼마 전에 대양 한가운데서 일어났던 14등급 에테르 스톰을 기억하실 겁니다. 인명이나 재산 피해는 일절 없었고, 해프닝으로 끝난 사건이었죠. 하지만 그 직후…….”

“이 뼈가 떠오른 건가요?”

“네, 탄소 검사 결과 10억 년 이상 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신효진은 풀썩 웃어버렸다.

“레노지안이 정말 과거에 멸망했다면, 우리는 10억 년 전 꿈에 연결되었다는 이야기가 되네요.”

“…….”

“차라리 박사님 말대로 미래 시간축에서 흘러들어왔다는 게 더 말이 되는 것 같아요. 이게 뭐야. 진짜 말도 안 돼…….”

“거듭 말씀드리지만, 레노지안이 오래 전 이미 멸망했다는 건 믿지 않아요.”

이 이야기를 꺼내기까지 한서진은 꽤 고민을 했다.

신효진과 자신은 레노지안에서 부부의 인연을 맺은 상태, 그리고 그녀는 그것을 본인의 생생한 경험으로 겪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마저 꺼내면, 둘 사이에 종종 일어나는 어색함이 더욱 짙어지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두 번, 아서 왕이 저의 몸으로 깨어난 적이 있으니까요.”

============================ 작품 후기 ============================

“두 번이라니……. 그 어린 백가 놈을 패준 건 왜 빼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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