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470화 (470/609)

00470  왕의 검  =========================================================================

아카식 블레이드에 담긴 궁극의 욕망을 확인한 한서진은 들썩이는 호흡을 참기 어려웠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온전한 아카식 블레이드를 쥐고 도심을 종횡무진 쓸고 다니며, 사람들을 죽이고 문명을 파괴하던 자신의 모습이.

그것은 아카식 블레이드에 담긴 파괴의 욕망에 취해 이성을 잃은 자신의 모습이었다.

‘신을 죽이기 위한 검.’

Table A는 어쩌면 검의 이름을 잘못 지은 건지도 모른다.

진리의 지식이 담긴 보물이 아닌, 막대한 파괴력을 감춘 행성병기. 그런 물체에 아카식이라는 단어를 붙이다니.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리며, 한서진은 사라진 검의 끝부분을 떠올렸다.

‘찾을 수 있을까?’

아카식 블레이드는 2차 대전 시절 미군이 태평양에 떠오른 것을 건져 올린 것이다. Table A는 오래 전 우주에서 떨어져 바다에 잠겨 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혹시 바다 어딘가에 아카식 블레이드의 부러진 파편이 잠들어 있지는 않을까?

“시도할 가치는 있겠어.”

서울로 돌아온 한서진은 페이 차일드의 방문을 받았다.

본래 한서진과 미국 사이에서 실무적 메신저 역할을 했던 그는 최근 들어 그 입지가 더욱 강화되고 있었다.

특히 여명의 빛 프로젝트의 존재를 알아내고, 한서진 테러에 얽힌 진실을 밝힘으로써 그는 한서진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중이었다.

한서진의 부탁에 따라 그 사실을 CIA 상부나 워싱턴에 전달하지 않은 점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화폐 자본가들과의 싸움이 절정을 넘어섰습니다. 머지않아 끝이 보이게 될 듯합니다.”

“이 전쟁은 미국과 전 세계의 경제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할 겁니다.”

“저 역시 그렇게 믿습니다.”

페이 차일드가 추구하는 것은 보편적인 국익.

이기적인 소수 자본가들에게 국가 경제의 주도권이 불법적으로 집중되는 것은, 조국을 위해서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한서진 박사는 그럼 괜찮은가?’

페이 차일드는 간혹 그런 의문이 들곤 했다.

로스차일드 같은 소수 자본 가문에 미국의 힘이 집중되는 것은 나쁘고, 한서진에게 집중되는 것은 어째서 괜찮은가?

섣불리 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 그러나 현 상태에서 한서진에게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싫은 결과를 야기할 것이다.

훗날 어떻게 흘러갈지, 그리고 역사가 어떻게 평가할지는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한서진이 미국을 움직이는 게, 미국을 위해서도 좋은 선택이었다.

“적어도 저는 사익을 위해서 경제 질서를 짓밟는 짓은 하지 않을 테니까요.”

“알고 있습니다.”

페이 차일드는 힘 있게 끄덕이면서도, 속으로는 씁쓸함을 지우지 못했다.

과연 시간이 흘러도 그가 변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는가.

그리고 그의 후대마저 변질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는가.

‘그 문제를 해결하는 건 후대의 몫이겠지.’

훗날 한서진이 자본가로서 경제적인 독재와 폭주를 일으킨다면, 그것을 설득하고 해결하는 것은 미래의 백악관이 짊어져야 할 책무가 된다.

지금은 한서진을 중심으로 미국의 진정한 대통합을 이끌어내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혹시 그쪽에서 저를 만나보고 싶어하진 않던가요?”

“예? 당연히 만나보고 싶어 합니다만, 저희 쪽에서 번번이 거절하고 있습니다.”

카이어 등 화폐 자본가들이 한서진을 직접 만나 협의나 중재를 이끌어내고 싶어하는 것이야 너무 당연한 사실이었다.

“한 번 자리를 만드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군요.”

“……진심이십니까?”

“물론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만.”

의아했던 페이 차일드는 그의 뜻을 알아차렸다.

자본가들의 완전한 몰락을 원하지는 않는다는 것, 그들이 평범한 자산가로 전락하는 것에 만족한다면 굳이 잔혹한 공격을 세울 필요는 없다는 것. 아마 그런 뜻에서 빚어진 마음일 것이다.

“참으로 자비로우십니다.”

“돈을 잘 벌 줄 아는 게 죄는 아니잖습니까.”

한서진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리 말했다.

인사를 마치고 돌아선 페이 차일드는 속으로 가만히 생각했다.

‘실바토르는 여명의 빛을 입안했고…… 로베르토는 목표를 완수했음에도 폐기하지 않았다.’

한서진이라는 영웅이 미국에 보금자리를 튼 것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었다. 이제부터 미국은 그를 중심으로 끊이지 않는 무수한 갈등에 시달려야 할 것이다.

화폐 자본가들의 몰락은 그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이야 미국이 그의 보금자리라지만, 훗날에는 그의 도구 중 하나로 전락하지는 않을까.

또각거리는 여자 구두 소리가 멀리서부터 울린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키가 크고 늘씬한 여자가 들어섰다. 전방을 주시하는 눈빛은 단단한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다.

그녀는 신효진이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박사님.”

“어서 오세요, 효진 씨.”

“오늘도 체력 테스트 하나요?”

“오늘은 아닙니다. 에테르 반응 테스트만 할 겁니다.”

“어머, 왜요? 저 잔뜩 기대하고 있었는데.”

“효진 씨 힘을 감당할 만한 측정 장비가 없어서요. 지금 주문을 해놨으니 며칠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신효진은 멋쩍은 듯 배시시 웃었다.

지금까지 힘을 측정한답시고 투입했던 장비는 전부 그녀의 손에서 박살이 났다. 그래서 그녀의 힘이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측정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티타늄 합금을 맨손으로 찢어버리는 인물이니, 정확한 측정이 어려운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합금판 찢는 맛도 쏠쏠했는데. 저 그럼 옷 갈아입고 올까요?”

“네, 그러세요.”

탈의실로 향한 신효진은 실험복으로 갈아입고 왔다. 얼핏 보기에는 환자복을 닮은 디자인이다.

밋밋한 실험복이지만 그녀의 미모가 원체 빛나다 보니 그 단조로운 디자인도 패션쇼의 그것처럼 느껴진다.

언제나처럼, 둘은 테스트를 시작하기 전에 대화를 시작했다.

“어젯밤 꿈은 어땠습니까?”

“아서가 아버지를 찾아주신다고 했어요. 왕국의 모든 힘을 동원해서라도요.”

“부디 대마도사를 찾고 새로운 단서를 얻을 수 있으면 좋겠군요.”

“저기, 그리고…….”

신효진은 말을 하다 말고 망설였고, 한서진은 뭔가 있나 싶어 얼른 자세를 고쳤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제가 잠시 잘못 본 것 같긴 한데…… 뭔가 이상한 것을 봤어요. 갑자기 상이 일그러져 보이는 거예요.”

“잠시 헛것을 본 게 아닌가요?”

“스칼린의 오감은 인간의 몇 십, 아니 몇 백 배 이상으로 확장할 수 있고, 정확해요. 헛것 따위는 웬만해선 보지 않아요.”

“…….”

“처음에는 별 거 아니라고 넘어갔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꿈에 어떤 영향력이 가해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해서요. 박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한서진도 깊이 생각해봤지만, 그 정도만으로는 딱히 의견이랄 게 떠오르지 않았다.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앞으로도 계속 자세히 주시해 주시기를 부탁해요.”

“……알겠어요.”

신효진은 조용히 끄덕이다가 이번에는 자신이 질문을 던졌다.

“박사님은 근래 별다른 일 없으셨나요?”

“아주 큰일이 있었습니다.”

“……레노지안에 관련된 일인가요?”

“그래서 말씀드리는 거지요.”

신효진은 조금 긴장해서 몸을 움츠렸고, 그는 덤덤히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먼저 일어섰다.

“그 이야기를 말씀드리기 전에, 먼저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네?”

“사실은 좀 더 일찍 보여드리려 했는데, 그간 허가 문제가 좀 남아 있었거든요. 아무래도 제 것이 아니다 보니 절차를 무시하기 뭐했습니다. 효진 씨가 괜히 주변 오해를 받지 않게끔 하려고 하다 보니 신경 쓸 것도 많았고요.”

“박사님?”

“따라오시죠.”

한서진은 먼저 앞장을 섰고, 신효진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곧 그를 따라 나섰다.

그는 이륙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수직이착륙기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효진은 직감적으로 꽤 멀리 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근거리라면 간단히 헬기를 이용하지, 수직이착륙기를 대기시켜 두지 않았을 테니. 서울을 벗어나는 건 당연하고 아마 먼 지방까지 내려가는 건지도 모른다.

‘아카식 블레이드의 본질은 파괴에 있어.’

한서진은 며칠 전 BII로 아카식 블레이드를 조사하던 중 봤던 환영을 떠올렸다. 그는 자신의 추측에 강한 확신을 품었다.

레노지안에서도 아주 특별한 무기. 신효진이라면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박사님, 저희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요?”

“제가 알고 있는 레노지안에 관해서는 예전에 효진 씨에게 전부 말씀드렸어요. 적어도 제가 꿈에서 보고 겪었던 일은 전부 알려드렸습니다. 지금은 효진 씨가 오히려 저보다 더 레노지안을 많이 알고 있을 겁니다.”

“…….”

“지금 가는 곳에서 보여드릴 것은, 지구에 있는 레노지안의 흔적입니다.”

“레노지안의 흔적이…… 지구에 있다고요?”

신효진은 당황한 표정을 수습하지 못한 채 되물었다. 그녀 입장에서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였다.

“먼저 그것부터 보여드린 다음에, 제가 겪은 일을 말씀드리려고요. 그게 순서가 깔끔할 듯합니다.”

진지한 어투에 신효진은 더 이상 재촉하지 않았다.

수직이착륙기는 빠르게 날아서 Table A 전용 연구선박이 있는 해역에 도착했다.

하늘에서 연구선박의 거대한 크기를 내려다본 신효진은 저도 모르게 창문을 짚으며 신음했다.

“와, 저렇게 큰 배는 처음 봐요. 그것도 심지어 두 척 씩이나…….”

“아마 지구상에서 가장 크고, 비싼 배일 겁니다.”

“설마 박사님 건가요?”

“제 것은 아닙니다만, 제 것이나 다름없이 쓰고 있죠. 제 친구들은 마음이 너그럽거든요.”

수직이착륙기는 거대한 연구선박의 후미 갑판에 안정적으로 착지했다.

한서진을 따라 내린 신효진은 신기한 듯이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렸다.

“직접 타보니까 더 크게 느껴지네요. 이런 큰 배는 진짜 처음 봤어요.”

“항공모함이나 유조선 따위는 비교도 안 되죠. 이쪽으로 오세요.”

갑판에는 한서진 일행을 맞이하기 위한 인원들이 나와 있었다. 그들은 한서진과 신효진을 선박 내부로 안내했다.

신효진은 한서진에 바짝 붙어 걸으며, 낮게 물었다.

“그런데 신체검사 같은 건 안 하나요? 여기 엄청 중요한 시설 같은데요.”

“VIP는 원래 그런 거 안 합니다.”

“하지만 저는 VIP가 아니잖아요?”

“저와 함께 있으면 VIP인 거죠. 제가 효진 씨 신원을 보증하니까 괜찮습니다. 그리고.”

한서진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효진 씨는 미군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에요. 지구 최초의 생체병기라고 말이죠. 제가 만든.”

신효진은 그 말에 질겁했다.

“생체병기라뇨! 말도 안 돼요!”

“다들 그렇게 추정하고 있어요. 저도 그게 편해서 굳이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윽. 제가 생체병기라니. 말도 안 돼요.”

“맨손으로 탱크 합금판을 찢는 사람인데, 생체병기로 봐준 거면 양호하죠. 100년 전이었으면 마녀로 몰렸을 겁니다.”

간간이 농담을 나누니 분위기가 조금 밝아졌다.

마침내 긴 복도가 끝나고, 육중한 문이 열렸다. 내부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에 신효진은 일순 눈을 찡그렸다가, 전방을 보고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수백 개의 카메라 센서와 크레인이 결박된 채, 허공에 우뚝 서 있는 부러진 검. 세월에 빛바랜 거대한 손잡이.

한서진은 그녀의 몸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확인하지 못한 채, 설명을 시작했다.

“제가 보여드리려고 했던 게 이겁니다. 미국에서는 아카식 블레이…….”

“……신살검.”

“네? 뭐라고 하셨나요?”

“제가 본 레노지안의 멸망…… 리온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한, 왕가의 보검이에요.”

============================ 작품 후기 ============================

실탄을 죽이는 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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