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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469화 (469/609)

00469  틀린 그림  =========================================================================

거대한 부러진 검, 아카식 블레이드는 수백 개가 넘는 케이블에 의해 단단히 고정돼 있었다.

크레인에 의지한 각종 센서가 아카식 블레이드의 전신을 뒤덮듯이 둘러싸고 있다.

센서에서 뻗어 나온 전선 케이블이 바닥에 늘어져 중앙컴퓨터까지 연결된 모습은, 마치 부서진 두개골에서 뻗어 나온 척추 신경다발처럼 보인다.

이곳은 Table A 소속의 제2 연구함 중앙연구실, 아카식 블레이드와 오리할콘 뼈를 파헤치는 인류의 비밀 기지다.

2차 대전 시절 미군이 바다에서 획득한 아카식 블레이드는 현재 미국의 기초과학 및 응용과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미국이 세계 최강대국으로 우뚝 설 수 있는 디딤돌이 되었다.

그리고 Table A의 통제 하에 세상의 이목에서 철저히 감춰진 아카식 블레이드는 이제 한서진의 품으로 들어왔다.

신효진과 더불어 레노지안과 연결된 가장 중대한 단서.

그리고…….

‘행성병기.’

한서진은 팔짱을 낀 채 아카식 블레이드를 차분히 노려보았다.

BII를 통해 확인한 아카식 블레이드의 진실한 정체는 행성을 파괴하기 위한 병기였다. 이른바 레노지안의 핵병기라고 할 수 있으리라.

‘신을 죽이기 위한 무기라…….’

잠시 그 신이라는 것은 어떤 상징적인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를테면 행성 같은…….

‘레노지안에는 정말 신이 존재하는지도 모르지.’

그러나 한서진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레노지안의 문명은 지구보다 월등히 발달해 있다. 과학적 지식이 필요 없어서 발달하지 않은 것뿐, 우주의 이치를 향한 그들의 통찰력과 시민 의식 수준은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만약 그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현대 인류가 이룩한 과학을 통째로 이식하는 것은 얼마 걸리지도 않을 것이다. 마법의 보조를 받는다면 순식간에 끝날지도 모른다.

그런 세상에서 신이 추상적인 무언가를 상징하는 것에 그친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정말 신 그 자체가 존재할 수도 있으리라.

“들어가 보자. 오늘도.”

한서진은 BII 접속장치 오픈 버튼을 눌렀다.

오픈 캡슐형으로 된 접속장치가 완전히 열리며 내부가 드러났고, 그는 내부 침대에 몸을 뉘였다.

캡슐형이라지만 답답함을 방지하기 위해 내부 공간이 꽤 크다. 안에서 일어서서 팔을 뻗어도 충분히 공간이 남을 정도다. 뿐만 아니라 비상시 탈출을 위해 강제개폐 장치도 삼중으로 갖추고 있었다.

신경접속이 일어나며, 조금 전까지 자신을 지배하던 세상의 자극이 하나둘씩 꺼진다. 그 대신 새로운 감각이 깨어나며 온몸을 휘감는다.

BII 연결을 통해 접하는 세상은 언제나 신비하다.

오감의 한계 속에 머물러 있던 인식이 무한히 확장되는 감각이 밀려온다. 감각 기관을 타르타로스에 연결한 채 공유하는 느낌이다.

어느덧 한서진은 의식체가 되어 허공에 붕 떠올랐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BII 접속 캡슐 안에 누워서 눈을 감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언뜻 보면 마치 유체 이탈을 한 듯한 상황, 그러나 이것은 자신이 이해하기 쉽게 가상으로 구현한 세상일 뿐이다.

지금의 정신으로 보고, 듣고, 느끼는 것, 그 모든 것은 BII를 통해서 가공한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

한서진은 아카식 블레이드 앞에 섰다.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신의 몸을 크게 만들었다.

아카식 블레이드에 어울리는 크기가 된 한서진은 손잡이를 잡고 검을 높이 들어올렸다.

부러진 검을 향해 정신을 집중하자, 복원 데이터를 통해 사라진 검날이 다시 돋아난다.

완전한 형체를 갖춘 아카식 블레이드는 웅웅거리는 떨림을 내며, 마치 살아있는 듯한 공명음을 퍼트렸다.

‘고귀한 왕의 검…….’

아카식 블레이드는 레노지안에서 최고로 존엄한 보물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 안에 담긴 무한한 힘과 지식은 감히 평가할 수조차 없을 정도다.

그때 검날에서부터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와, 한서진의 몸까지 한꺼번에 집어삼켰다.

「―·‥°∴――∥―\――》》《―」

정체를 알 수 없는 감각이 의미불명의 기계 신호로 전환되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한서진은 의식의 흐름이 끊겼다.

「경고! 경고! 사용자의 접속 상태가 불안정합니다! 경고! 경고! 사용자의 접속 상태가 불안정합니다! 접속 해제 후 안정과 점검을 권고합니다! 경고! 경고……!」

시끄러운 BII 통제시스템의 경고음이 머릿속에 울리며, 한서진은 의식을 되찾았다.

그는 주변 풍경을 둘러보고는 깜짝 놀랐다.

‘여, 여긴……?’

그는 거대한 도시의 중심에 있었다.

무수한 사람들의 비명이 울린다. 깜짝 놀란 그는 뒤를 돌아보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신이 걸어온 진로는 불바다와 폐허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고층 빌딩이 무너지고, 거리가 짓밟히고, 다리가 붕괴했다.

사람들은 불에 타거나 깔려 죽었고, 곳곳에서 전투기가 쉴 새 없이 날아들며 미사일을 퍼붓고 있었다.

수십 기의 미사일이 날아왔지만, 아카식 블레이드가 뿜어내는 빛에 모조리 소멸했다. 전투기 편대는 급히 방향을 꺾으며 재차 공격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의 팔이 아카식 블레이드를 휘두르는 순간, 검끝에서 뿌려진 빛을 맞고 한순간에 먼지로 사그라졌다.

그제야 한서진은 깨달았다.

‘여긴…… 서울?’

놀랍게도 지금 자신은 서울 한복판을 짓밟으며, 마구 파괴하고 있었던 것이다.

길이 100미터 가까이 되는 검을 쥔 채 도심을 마구 파괴하고 학살하는 거인, 그게 바로 지금 자신의 모습이었다.

‘멈춰! 멈춰!’

모든 것은 BII 속의 환영에 지나지 않음에도, 한서진은 진짜인 것처럼 거친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치 다른 사람의 몸에 의식만 들어온 것처럼,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빌딩이 짓밟히고, 거리가 무너진다.

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들이 가닥가닥 끊어져 침몰하고, 검 끝에서 뿜어지는 불꽃이 빌딩숲을 태운다.

거리에 쏟아진 사람들의 비명이 모기 날갯소리처럼 느껴지는 것에, 한서진은 끔찍한 전율을 느꼈다.

그것은 통제권을 잃은 자신의 육체가 받아들이는 감각이었던 것이다.

무수한 이들의 목숨이 먼지보다 못하게 꺼져갔다.

서울이 불탄 폐허로 변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어디를 둘러봐도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는다.

사람의 흔적을 쫓아, 검을 들고 정처 없이 헤맨다.

문명의 흔적이 나올 때마다 거리낌 없이 검을 휘둘렀다. 인간의 힘은 아카식 블레이드에 깃든 힘에 비하면 어린 병아리 새끼처럼 무력하기 그지없었다.

대륙을 멸하고, 마침내 바다를 건넌다.

200미터도 안 되는 신장이지만, 바다를 건너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단단한 지면을 밟듯이 물위를 가볍게 밟으며 걸었으니까.

사방에 수평선만이 가득한 대해에 이르자, 저 멀리 무수한 군함들이 보인다.

수천 척은 족히 넘을 것 같은 대 연합함대. 그의 키를 넘어가는 초대형 항공모함과 군함들이 진을 치고 있지만, 오히려 그의 앞에서 한없이 작고 초라해 보인다.

무수한 전투기 떼가 출격하여, 사방에서 미사일을 퍼붓는다. 군함들이 쏘아대는 미사일과 어뢰가 끊임없이 달려든다.

그러나 검을 한 번 휘두르는 순간, 검에서 뿌려진 섬광의 채찍이 모든 비행체를 먼지로 돌려보냈다.

그 순간 한서진은 육체가 느끼는 감각을 통해 보았다.

수km 떨어진 항공모함의 높은 함교 안에서, 경악으로 일그러진 채 이쪽을 바라보는 군 장성들의 모습을.

체중의 중심이 서서히 뒤쪽 아래로 쏠리며, 도움닫기 자세를 취한다.

어느 순간 튕겨지듯이 뛰쳐나간 함대와 거리가 좁혀지자 허공으로 높이 뛰어올랐다. 1km 넘게 뛰어올랐음에도, 해수면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다.

그 자세 그대로 검을 횡으로 길게 휘둘렀다.

가느다란 한줄기 빛이 함대를 훑고 지나간 후, 그는 함대의 뒤편 해수면에 가볍게 착지했다. 해일이나 파도는커녕, 물 한 방울 튀기지 않았다.

수천 척의 군함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폭발을 일으키며 침몰하고, 그는 유유자적하게 가던 방향을 향해 걸었다.

저 멀리 새로운 육지가 희미하게 보인다. 인간들이 아메리카 대륙이라 부르는 곳.

그 순간 날카로운 파공음이 감각에 잡혔다. 그는 잠시 멈추고 높이 올려다보았다.

까마득하게 높은 곳까지 솟아올랐다가, 대기권을 뚫고 곤두박질치듯이 떨어져 내리는 비행 물체들이 보인다. 그 수는 어림잡아도 100기 이상.

‘핵미사일……!’

한서진이 속으로 외마디 비명을 삼키는 순간, 허공을 찢는 굉음과 폭발이 모든 것을 뒤덮었다.

「경고! 사용자의 접속 상태가 불안정합니다! 긴급 상황 지침에 따라 사용자의 접속 상태를 강제로 해제합니다! 해제 시도…… 실패! 해제 시도! 실패!」

아무도 없던 연구실에는 경고음을 듣고 몰려온 연구원들이 몰려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신경 접속 상태가 매우 불안정합니다! 강제로라도 접속을 끊어야 해요!”

“강제 접속 해제 기능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신경 연결 케이블을 빼버려!”

“케이블을 빼도 소용없습니다!”

어느 연구원이 케이블을 수동으로 한꺼번에 빼버렸지만, 화면에 나타난 경고 표시는 사라지지 않았다.

“너무 강하게 접속되어 있습니다!”

“젠장! 주전원을 통째로 내려버려! 말을 안 들으면 전원 공급 장치를 부수기라도 해!”

어느 연구원이 도끼를 들고 나섰다. 그는 전원 장치 뚜껑을 열고, 도끼를 위로 들어 올린 채 힘차게 내리쳤다.

연구실의 주전원이 나가며 일시에 어두워졌다. 곧이어 비상등이 들어오며 다시 불이 켜졌다.

“시스템 리부팅 중!”

“앗, 캡슐이 열립니다! 강제 오픈 장치가 이제 작동해요!”

“들것! 들것 가져와! 박사님 상태를 확인해!”

“의사를 대기시켜! 아니, 바로 여기로 불러와!”

“지금 오고 있답니다!”

잠시 후 헐레벌떡 들어선 의료진이 급히 기절한 한서진의 상태를 확인했다. 심박과 안구 상태를 체크하고 난 그는 일단 안도의 숨을 돌렸다.

“비켜요, 비켜!”

의료진은 급히 들것에 한서진을 싣고는, 서둘러 달려서 연구실을 빠져 나갔다.

밖에는 의료 트레일러가 대기 중이었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최상의 의료서비스 제공이 가능한, 그야말로 움직이는 중환자실 겸 수술실이다.

의료 트레일러로 한서진을 옮긴 의료진은 서둘러 정밀 검사에 들어갔다.

“박사님 상태는 어떻습니까?”

“다행히 잠시 의식을 잃은 것뿐입니다. 안정되면 정신을 차리실 겁니다.”

“특별한 이상은 없는 거지요?”

“좀 더 검사를 해봐야겠지만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습니다. 원인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한서진이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은 Table A 주요 연구진은 안도의 한숨을 돌렸다.

식사 중에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온 니트론도 일단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때 한 연구원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니트론 교수님! 한 박사님이 정신을 차리셨답니다!”

“그럼 어서 가봐야지!”

니트론은 서둘러 뛰쳐나갔다.

한서진은 병실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킨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겉보기에 큰 이상은 없어 보인다.

“괜찮아요? BII 접속 중에 갑자기 기절했다고 들었는데.”

“아…… 괜찮습니다. 조금 과부하가 있었어요.”

한서진은 억지로 웃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큰 문제는 없습니다. 걱정 마세요.”

“사람 간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니트론은 그의 안색을 보고 비로소 마음을 완전히 놓았다.

“죄송하지만 혼자 있고 싶습니다. 정리해야 할 생각거리가 좀 있어서요.”

“알았어요. 비켜드리리다.”

혼자 남은 한서진은 주먹을 불끈 쥔 채 허공을 노려보았다. 마치 그곳에 무언가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아카식 블레이드……. 그런 거였나?’

짧지만 강렬한 접속. 그것을 통해 분명히 보았다.

아카식 블레이드에 담겨 있는 어마어마한 파괴 욕망을.

어렴풋한 인식이지만, 그는 또렷이 느꼈다.

저것은 인류를 번성케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파멸하기 위해 내려온 신의 검임을.

============================ 작품 후기 ============================

우리 가장 행복할 불토

삼연참처럼 제가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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