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68 틀린 그림 =========================================================================
“하하……. 그거 참 말도 안 되는 오해로군요.”
한서진은 식은땀을 흘리며 웃었다.
어려워서 못하는 게 아니라, 귀찮아서 안 하는 거라고? 다들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설마 박 회장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 아니지요?”
“물론 저는 박사님이 얼마나 바쁘신지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어려워서 못하는 게 아니라 바빠서 안 한다고 생각하시는 거 아닌가요?”
“……부정은 못하겠습니다.”
“…….”
“죄송합니다.”
귀찮아서 안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나, 바빠서 안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나. 그게 그거 아닌가?
어쨌든 간에, 어려워서 못하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똑같은 것 아닐까?
왠지 확인하는 게 두려웠지만, 한서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람들이 절 많이 원망하고 있나요?”
“회사에 들어오는 문의 내용을 보면 그렇습니다. 물론 거의 대부분 예의를 지키고 있습니다. 왕에게 절박한 목숨을 구해달라고 상소하기 위해서 신문고를 치는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신문고.”
“그 신문고 앞에 북 한 번 치려고 사람들이 수억 명쯤 줄을 서 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줄 길이가 대략 20만km 정도는 되겠군요.”
“…….”
“그룹 홈페이지 고객센터 게시글은 이미 30억 개를 넘어갔는데, 한 번 보시겠습니까?”
듣기만 해도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수치다.
고객센터에 올라온 게시글이 무슨 30억 개를 넘어?
박현준은 더 이상 한서진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그의 안색은 어느새 당당해져 있었다.
“박사님께서 웜홀 연구나 기타 제가 알지 못하는 중요한 연구 때문에 언제나 바쁘시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박사님께 인생을 맡긴 처지에서 자랑스럽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합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저를 그렇게…….”
“하지만 제약은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라는 것을 생각해 주십사 합니다. 예를 들어 만성 신부전증 환자의 경우, 우리나라에서만 무려 20만 명이 넘습니다.”
간은 수천 가지의 역할을 하는 인체의 화학공장이자 복잡한 장기다. 그런 간도 간단히 재생했는데, 설마 신장이 어려울까?
신장 질환에 시달리는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장기 질환을 앓고 있는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간도 만드는데, 이걸 못 만들어?
다들 그렇게 속으로 앓고 있었는데, 종합 암 치료제가 나온 것을 보고 억눌렀던 게 터져 나온 것이다.
한서진은 영원그룹 고객센터에 올라온 글들을 하나하나 차례대로 확인했다.
대부분 공손한 말투였고, 간절한 부탁을 담고 있었다.
―3년째 혈액투석을 받고 있습니다. 신장 재생이 간 재생보다 어렵나요? 제발 그렇지 않다고 말씀해주세요!
―아버지 심장이 매우 안 좋으십니다. 심장 치료제는 언제쯤 나오게 되나요?
―선천적 맹인이었는데 BII 덕분에 빛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가 한서진 박사님 회사라면서요? 감사의 말씀을 드리려고 들렀습니다!
―젊은 나이에 루게릭병을 앓고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절망입니다.
―박사님! 제발 부탁드려요!
―박사님!
―박사님…….
신문고 한 번 울려보겠다고 수십만 km 넘게 줄을 선 사람들. 박현준의 비유는 조금도 과장되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의 간절함을 적절하게 나타낸 것이었다.
한서진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제가 근래 열중하고 있는 연구는 저에게는 인생이 걸린 중요한 일입니다.”
“…….”
“하지만 그래도 틈틈이 시간을 내보겠습니다. 이런 말들을 보니 저도 마음이 썩 좋진 않네요.”
“주제넘은 말씀을 드렸는데 너그러이 이해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박 회장님께 영원그룹을 맡기기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잘해주시고 계십니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한서진은 내내 고민했다.
‘H-1을 개량해서 모듈화를 해볼까? 특정 조건을 부여하면 개별 장기에 작용할 수 있도록?’
하나의 치료제로 모든 주요 장기를 완벽하게 복원할 수 있게 하는 것. 물론 멀쩡한 장기까지 버리고 새로 복원하면 체력적인 낭비가 심하기 때문에, 투여시 원하는 장기에만 작용할 수 있도록 부가 기능을 넣어줘야 했다.
‘아주 불가능하진 않을 것 같은데.’
그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냥 엘릭서를 희석해서 뿌려버려? 어차피 이제 누가 빼앗지도 못할 텐데.’
그러나 곧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만능 치료제를 뿌리면 편하기야 하겠지만, 동시에 진짜 엘릭서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을 자극하는 증폭제가 될 것이다.
진짜 엘릭서만큼은 세상에 알리지 않고 자신만의 전유물로 남겨둬야 한다.
“박 회장님하고 말씀 나눈 거 잘 안 풀리셨나 봐요?”
옆에서 송하나가 묻자, 그는 사색에서 깨어났다.
“음…… 그런 건 아니야.”
“무슨 일인데요? 저한테는 말 못 해줘요?”
“그냥 영원그룹 소비자들이 나를 오해하고 있대. 그래서 좀 생각이 복잡했어.”
“오해? 어떤 오해요?”
“내가 H시리즈를 많이 안 만드는 게 어려워서가 못하는 게 아니고 귀찮아서 안 하는 거라고 생각하나 봐.”
“와아, 그 사람들 제대로 짚었네요.”
“…….”
송하나마저 손뼉을 치며 그리 말하자 한서진은 할 말이 없어졌다.
현재 세간 밑바닥에 퍼져 있는 자신의 이미지는 대체 어떻게 생겨먹었을까.
그녀는 박수를 친 게 조금 민망했는지 배시시 웃었다.
“사실 오빠 다른 일 때문에 바빠서 안 하는 거 맞잖아요. 오빠가 못하는 게 어딨어요.”
“에이, 그건 아니지. 나도 못하는 게 많아.”
“그 사람들이 원하는 건 충분히 하고도 남으시잖아요. 단지 다른 것 때문에 시간을 못 내실 뿐이죠.”
레노지안 규명이 가장 중요한 일이니만큼, 한서진은 다른 일에 시간을 할애할 여유가 별로 없었다. 만능 암 치료제인 H-4도 그간 틈틈이 시간을 쥐어짜내서 만든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어떻게 일만 하면서 사나? 자기 생활과 시간도 있어야지.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하셨어요?”
“뭐, 사람들 투서하고 서명한 거랑 영원그룹 게시판에 글 올린 거 봤는데, 마음이 좀 그렇더라고. 그래서 앞으로 조금 더 시간을 내서 그쪽 연구에 할애하기로 했어.”
“그럼 아무래도 우선순위를 정하셔야겠네요. 아무거나 랜덤으로 시작할 순 없으니까요.”
“그렇겠지? 그래서 일단 신장 재생 치료제부터 해볼까 생각해. 환자 수가 우리나라에서만 20만 명이 넘는다더라.”
“복합 장기 재생 치료제 같은 건 못 만들어요?”
“글쎄, 생각은 하고 있는데 가능할지 모르겠어. 일단 그쪽도 궁리는 해봐야지.”
“근데 오빠, 무슨 연구 때문에 그렇게 바쁘신 거예요? BII는 오빠가 더 이상 개량에 신경 쓸 게 아니지 않아요?”
송하나의 질문에 한서진은 잠시 말문이 막혔으나, 곧 웃음을 띠고 대답했다.
“사실 BII 개량 연구가 아니야.”
“그럼요?”
“에테르에 관련된 중요한 연구인데, BII를 연구 도구로 쓰고 있을 뿐이야. 그래서 사람들이 BII 관련된 연구라고 오해하고 있는 거지. 난 BII 개량에서 이미 오래전에 손 뗐고, 그건 BII 프로젝트 팀에서 전적으로 맡아서 하고 있어.”
“그럼 H시리즈에 할애할 시간이 부족할 만하네요. 에테르 연구야말로 가장 중요한 거잖아요.”
한서진은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가만히 중얼거렸다.
“그렇지. 에테르 연구가 가장 중요하지…….”
우주 차원 어딘가에 있을 레노지안.
그 아름다운 대지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서 제 앞에 모셔다 주세요.”
스칼린 왕비의 단호한 말에 왕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왕비의 눈동자를 주시했다. 그녀가 무슨 감정을 품고 있는지 읽어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이윽고 왕이 입을 열었다.
“왕비, 대마도사 코르비우스는 그대의 친부시오.”
“알아요.”
“그분은 오랫동안 왕가와 국가에 충성했으며, 뛰어난 지식과 지혜로 마법의 일가를 이룬 분이오.”
“그렇죠.”
“그런 분이 세상의 진리를 깊이 깨우치기 위해 고된 수행을 떠나셨소. 그런데 어떻게 그분의 의사에 반해서 모셔올 수 있겠소? 심지어 수배를 내려도 좋다니?”
“…….”
“대체 무슨 일이오? 내가 납득이 가게 설명해 주시오.”
왕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왕국의 충신이자 뛰어난 마도사가 깨달음을 닦기 위해 홀로 멀리 수행을 떠났다. 헌데 친딸인 왕비가 갑자기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찾아달라니. 그것도 수배를 내려도 좋다니.
“혹…… 내가 모르는 나쁜 일이 있었던 것이오?”
“……아니에요. 그런 건.”
“그럼 왜 그러는 거요? 이유를 설명해 주시오.”
스칼린은 입술을 깨물고, 왕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대답했다.
“아버님께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게 있어요. 반드시요.”
“반드시…….”
“저에게, 아니 우리 모두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에요.”
“우리 모두라면, 누구를 말하는 거요?”
“저와 리온 당신, 신하들, 그리고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백성들이요.”
“…….”
“분명히 아버지는 그 답을 알고 계실 거예요.”
리온은 턱을 쓰다듬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는 고개를 들고 왕비를 주시했다. 그의 눈빛은 조금 전보다 부드러워져 있었다.
“알겠소. 그분을 찾을 수 있도록 명을 내리겠소.”
“고마워요, 리온.”
“하지만 장담할 순 없소. 코르비우스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대마도사…… 그런 분이 마음먹고 잠적하면 과연 흔적이나 찾을 수 있을까 의문이오.”
“저도 찾아나설 거예요.”
그 말에 왕은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왕비, 그게 무슨 말이오? 그대가 직접 나서겠다니?”
“괜찮아요. 할 수 있어요.”
“그대는 지금 회임한 몸이라는 걸 잊지 마시오. 우리의 귀중한 아이가 그대 몸속에서 크고 있소.”
스칼린은 순간 아차 싶었다.
레노지안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다 보니, 미처 그 점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손가락을 깨물며 고민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리온, 이건 왕국 전체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에요.”
“지금 그대가 품고 있는 우리 아이보다 중요한 건 없소. 코르비우스는 왕성의 모든 힘을 동원해서라도 찾아낼 테니, 그대는 태교에만 전념하시오.”
“……리온.”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요.”
왕은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스칼린의 의사를 거절했다.
아무리 대륙 최강의 여기사라지만 임신한 여자가 수행을 떠난 대마도사를 찾아 떠난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그녀는 몰라도 태아에게는 극한의 환경 아닌가.
“지금 당장 근위대에 명령을 내리겠소. 대륙 전체를 뒤지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그분을 찾아오라고 말이오.”
“……고마워요, 리온.”
“다녀오리다.”
왕은 그녀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고, 등을 돌렸다.
스칼린은 우두커니 선 채 멀어지는 왕의 모습을 바라봤다.
멀리 떨어져 있던 신하와 시녀들이 호종을 위해 왕의 뒤를 따라붙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어?”
순간 스칼린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녀는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방금, 분명히…….”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조금 전 왕의 뒷모습이 출렁거리듯이 흔들렸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마치 허공에 맺힌 상이 일순 흔들리듯이.
그녀는 뚫어져라 바라봤지만, 멀어지는 왕의 뒷모습은 이제 아무런 이상이나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괜히 볼을 긁적였다.
“내가 뭘 잘못 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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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진의 억울한 마음에 저 역시 십분 공감합니다.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