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67 틀린 그림 =========================================================================
화폐 자본가들은 최후의 발악 중이었다.
자신들이 쥐고 있는 금융 자본과 언론사들을 통해 마지막까지 발버둥을 치고 있지만, 그럴수록 연방정부의 공격은 더욱 거세어지고 있었다.
이미 대통령 사임이라는 초강수까지 둔 연방정부는 더 이상 거리낄 게 없었다.
크리스 전 대통령이 조성한 내각은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기업가들로 구성되어 잇지만, 서클에는 진입하지 못한 이들이었다. 화폐 자본가들은 그들의 운명 공동체가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로스차일드 등 초대형 자본 세력을 와해시킴으로써 얻게 될 파이 조각에 빠른 계산을 마치고, 더욱 혹독하게 공권력의 채찍을 휘두르고 있는 중이었다.
수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들이 공고히 구축한 질서가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한서진이 거느린 회사나 연구소들은 보통 SJ그룹이라고 묶여서 불린다. 정작 한서진이나 최측근들은 특별히 그룹이라고 언급을 하지 않지만.
지주회사인 에스코너를 정점으로, 그 아래에 모든 계열사 및 계열 연구소가 묶여있지만, 기업 그룹이라는 이미지는 상당히 약한 편이었다.
그렇다고 각 계열사 간에 업무 협조나 사업 견련성이 낮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정지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브레인 집단을 통해, 정교한 상호 작용 하에 굴러가고 있다.
그룹 아닌 그룹, 그룹 아닌 척 하는 그룹, 그것이 SJ그룹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근래 계열 정리를 완전히 마친 SJ그룹은 새로운 미래를 견인하기 위해 오늘도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제약업체인 영원그룹 공채에 합격한 2천 명의 신입사원들은 직원 신분증을 목에 건 채, 어미 닭을 쫓는 병아리떼처럼 지도교관을 따르고 있었다.
“우리 영원그룹은 SJ그룹이라는 거대한 회사에서 제약 부문 전체를 책임지고 있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계열사입니다.”
막 사회에 나온 신입사원들에게 기업의 연혁을 설명하는 지도교관, 박현준 회장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넘치고 있었다.
“본래 우리 영원그룹은 시가총액 1조 원도 채 되지 않는 진성제약을 인수하여 탄생했습니다. 처음에는 각 지사도 몇 개 되지 않고, 규모도 매우 작았지요. 하지만 이제는 명실공히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제약업체로 발돋움했습니다.”
곧이어 대형 화면에는 영원그룹의 올해 매출이 표시되었고, 구체적인 숫자를 확인한 신입사원들은 놀라서 웅성거렸다.
박현준은 그런 반응이 뿌듯한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설명을 이어 나갔다.
“먼저 영원그룹의 첫 히트작인 H-1은 전 세계에서 간 질환을 앓고 있는 모든 환자들이 궁극적으로 찾게 되는 희망입니다. 그리고 H-1은 의학계에서 획을 그을 만한 역사를 하나 남겼지요. 그게 뭔지 아시는 분?”
누군가가 손을 들자 박현준은 그를 가리켰고, 그는 배에 힘을 주고 외쳤다.
“간 수술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만들었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미처 몰랐던 신입사원들은 우와 하며 감탄했고, 이미 알고 있던 이들도 흥분해서 크게 끄덕거렸다.
간 재생 치료제인 H-1은 간 수술이 필요 없게 만들었다.
간 부위에 칼을 대야 할 일이 있으면, 그저 H-1을 이용해 새로 간을 만드는 게 낫다.
개복 수술은 회복 기간도 길고 흉터도 남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배를 가르느니 차라리 이참에 낡고 병든 간을 버리고, 어리고 싱싱한 간으로 갈아타는 것을 원했다.
3만 AU(원화로 3천만 원)이라는 비싼 가격을 자랑하지만, 지불 능력이 되는 사람들은 개복 수술보다는 새 간을 택했다.
그리고 지불 능력이 되지 않는 이들도 300만 원의 자기 분담금만 내면 되기에, 마찬가지로 수술을 회피했다. 영원그룹에서 구입비를 댈 수 없는 이들에게 일정한 물량을 90% 할인된 가격으로 팔기 때문이다.
간 수술이 시행되는 것은, 그 10%의 가격조차 부담되는 이들이 지극히 가벼운 축에 속하는 수술을 할 경우 정도다.
“또한 탈모치료제인 H-2은 전 세계에서 H-1을 아득히 능가하는 매출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만간 만능 암 치료제인 H-4가 시판됩니다. 총매출로는 아직 화이자나 바이엘을 넘어서지 못했지만, 단일 상품의 매출은 이미 그들을 능가했습니다.”
박현준의 음성에는 자부심이 듬뿍 묻어 있었다.
“또한 우리 그룹은 회사 이익의 일정 비율을 꾸준히 사회에 환원하고 있습니다. 특히 저소득층 아동청소년들의 교육 및 양육비 지원에 집중적으로 자선사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작년에 자선사업에 쓴 돈만 무려 천억 원 대였다. 구체적인 숫자를 확인한 신입사원들은 입을 벌리고 그저 감탄만 했다.
우리 회사가 이렇게 돈을 잘 벌고, 또 자비롭다니!
입사 지원을 하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직접 확인하니 더욱 놀랍기만 했다.
“다음은 캘리포니아에 한창 건설 중인 제2생산공장입니다. 보다시피 국내 생산시설의 20배가 넘는 대단지 규모로, 우리 그룹의 차세대 생산거점이 될 곳입니다.”
영원그룹은 국내에 본사를 두고 있지만, 그 소유권은 미국의 에스코너가 쥐고 있으며, 총 생산책임도 캘리포니아로 옮길 예정이었다.
“다음으로는 우리 영원그룹의 모 회사 및 형제 회사들에 대해서 소개하겠습니다. 모회사인 에스코너를 중심으로 모든 계열 회사들이 단단히 묶여 있으며, 그 어떤 그룹 기업보다 단단한 결속력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칼라폰으로 전 세계 이동통신 시장을 휩쓸고 있는 H통신.
실 매출은 없지만, 놀라운 재해 예보 적중률로 전 세계의 신뢰를 받고 있는 SJ사이트.
BII를 관리하며, 차세대 가상현실을 좌지우지하게 될 SJ엔터테인먼트.
전 세계에 희토류를 공급하는 인공 운석 채취 기업 HAMC.
세계 최고의 수익을 자랑하는, 반도체의 황제 SJ인더스트리.
인류 문명 그 자체를 바꿔놓을, 웜홀 사업을 주관하는 SJ게이트.
이 모든 형제 회사들을 보유하며, 총괄하는 모회사 에스코너. 그리고 에스코너의 유일한 주주인 한서진.
박현준이 보여준, 영원그룹이 소속된 SJ그룹의 조직도는 신입사원들에게 큰 컬쳐 쇼크를 남겼다.
영원그룹은 매우 잘 나가는 기업이다. 또 영원그룹이 소속된 SJ그룹이 세계 최고라는 것도 어렴풋이 알고 있다.
하지만 구체적인 조직도와 매출, 그리고 사회적인 영향력을 한눈에 확인하니, 걷잡을 수 없는 자부심이 부풀어 올랐다.
“신입사원 여러분, 우리가 바로 이런 기업입니다. 형제 기업을 제외하고는 국내에서 견줄 만한 기업이 없는 것은 물론, 세계 어느 곳에 가서도 결코 숙일 일이 없을 겁니다.”
신입사원들이 가장 크게 놀라워했던 것은 SJ그룹의 조직 및 영원그룹의 대단함이 아니었다.
바로 이 모든 설명을 박현준 그룹회장이 지도교관으로서 직접 해준다는 것이었다.
그룹의 가장 높은 경영자가, 신입사원들을 상대로 직접 회사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설명한다는 것. 경직된 국내 재벌 기업 문화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 회사에 잘 오셨습니다.”
“연설이 많이 느셨습니다.”
“아이고, 아닙니다. 박사님이 오신 줄 알았으면 원고를 좀 수정했을 텐데…… 민망하기 그지없습니다.”
한서진이 너스레를 떨며 말하자 박현준은 이마에 흐른 땀을 닦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권위적인 인물이 아니지만, 그의 앞에 서면 이상하게 긴장하게 된다.
“아니요, 괜찮았습니다. 회장님 말씀을 듣고 있으니 저도 마치 영원그룹 신입사원이 된 것처럼 가슴이 벅차고 자부심이 솟구치더군요.”
“박사님께서 신입사원이라니요, 저를 너무 난처하게 하십니다.”
한서진은 피식거리며 찻잔을 들고 마셨다.
박현준이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은근히 물었다.
“요새 BII 때문에 무척 바쁘시다고 들었습니다.”
“뭐, 그렇습니다.”
“정말 중요한 일인가 봅니다. 박사님께서 만사를 제쳐두고 매달리실 정도면.”
“아주 중요한 일이죠. 적어도 저에게는 그렇습니다.”
가상현실 기술이 그 정도로 중요한가? 박현준으로서는 고개가 갸웃거려질 일이었다.
물론 세상을 놀라게 한 기술이니만큼 그 중요성은 두 말 하면 입이 아프다.
하지만 웜홀 연구 등 다른 것과 비교했을 때, 과연 한서진에게 그렇게까지 중요한 일인가?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겠지…….’
박현준은 그렇게 넘겨짚었다.
BII 자체를 연구하는 게 아니라, BII를 이용해서 아카식 블레이드 및 오리할콘 뼈를 연구한다는 것을 모르는 그로서는, BII 개량에 한서진이 매달린다고 오인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임원 및 사장들도 한서진이 아직까지 BII 개량에 직접 매달리는 것에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니트론 교수와 신효진 등 극소수의 최측근만이 진실을 알고 있을 따름이었다.
“회사 경영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으시다고요?”
“예. 이걸 봐주십시오.”
박현준은 노트북을 열고 뭔가를 주섬주섬 보여 주었다.
한서진은 문서를 확인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집단 서명 같은데요, 제가 제대로 본 게 맞나요?”
“예, 맞습니다. 회사에 투서되는 집단 서명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꾸준히 투서가 날아오고 있습니다.”
“뭐 때문이죠?”
“다른 치료제도 만들어달라는 서명 요구입니다. 지금까지 집계된 것만 5억 3,500만 명 정도 됩니다.”
“…….”
“물론 서명인이 중복된 것은 제외했습니다. 서명 자체는 100억 개가 넘습니다.”
“……100억이라고요?”
“보통 한 사람이 수십 건 이상의 서명에 동참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이 필요로 하는 치료제가 어디 한둘입니까. 수십 건 이상도 사실 적은 편이지요. 제일 많은 서명에 동참한 이는 무려 300 건이 넘었습니다.”
한서진은 저도 모르게 턱을 만졌다.
근래 영원그룹이 몹시 심한 등쌀을 앓고 있다고 해서 그러려니 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박현준은 거듭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제약이라는 특성상 아무래도 다른 회사들보다 우리 영원그룹이 더 많고 다양한 요구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웜홀 같은 것은 기껏해야 우리 지역에 먼저 설치됐으면 좋겠다, 빨리 실용화됐으면 좋겠다, 이 정도입니다. 하지만 저희는…….”
“목숨과 건강이 걸린 일이니 가장 열성적으로 요구하는 거군요.”
“예, 바로 그렇습니다. 열성 서명인들 대부분은 난치병을 앓고 있는 환자나 그 가족, 지인입니다.”
박현준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만능 암 치료제가 개발된 이후로는 예전보다 몇 배로 더 심해졌습니다.”
“……그 정도인가요?”
“과거에도 간 재생 치료제를 다른 장기에도 적용 가능한 신 버전을 만들어달라는 요구가 많았습니다. 간 외의 다른 장기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죠. 특히 신장 재생 치료제를 만들어달라는 요구가 많았습니다.”
“…….”
“그래도 그전에는 신약 개발, 특히 장기를 재생하는 치료제 개발이 무척 어려울 거라는 공감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그마저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건…….”
“많은 환자들과 그 가족들은 이제 더 이상 그 말을 믿지 않습니다. 다들 박사님이 어려워서 못 만드는 게 아니라, 귀찮아서 안 만드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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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서진이 심장에 팩트폭력 크리티컬 당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