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66 틀린 그림 =========================================================================
크리스는 미국 역사상 가장 가엾고, 운이 없는 대통령이 되고 말았다.
예후가 나쁘기로 유명한 중기 췌장암 진단을 받고, 치료에 집중하기 위해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암 투병 생활을 하면서 대통령 격무를 수행한다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임을 하고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영원그룹에서 암 치료제 발표를 덜컥 해버렸다.
대중의 눈으로 볼 때, 크리스 대통령은 정말 지지리도 운이 없다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와, 크리스 어떡하냐. 진짜 안 됐다.”
“아직 임기 2년도 채 못 채우지 않았나?”
“차라리 한 몇 달 뒤라면 속이 덜 쓰리겠는데, 어떻게 일주일도 안 돼서 이런 발표가 나오냐.”
“그런데 임상기간만 몇 개월이었는데, 설마 미국이 H-4 개발 사실을 사전에 전혀 몰랐다는 거냐? 알았으면 덜컥 사임하지 않고 기다렸을 것 같은데.”
“에이, 거기 보안이 얼마나 철저한데. 미국이라 해도 모를 수 있지. 게다가 한서진 박사를 시찰한다는 게 정치적으로 보통 부담되는 일도 아니고.”
“서로 모를 수 있다 쳐. 근데 한서진 박사가 이 타이밍에 발표한 건 크리스 대통령 엿 먹으라는 거 아니냐? 몇 달만 더 늦게 발표해도 크리스 대통령이 지금처럼 불운의 마스코트까지는 안 됐을 텐데.”
“에이, 그건 아니다. 그 몇 달 동안 고통 받을 암 환자들을 생각해 봐. 한서진 박사가 어디 그럴 사람이냐.”
크리스 대통령이 정말 암 치료제의 존재를 몰랐을까?
한서진은 그가 췌장암인 것을 정말 몰랐을까? 알면서도 일부러 발표를 미뤘던 것은 아닐까?
만약 크리스 대통령이 간절히 치료제를 원했고, 한서진이 그를 축출하기 위해 협박을 한 것이라면?
여러 가지 논란이 끊이지 않았지만, 결국 흔하디흔한 음모론으로만 그쳤다.
어찌 되었든 크리스는 그렇게 미국 역사에 두고두고 이름을 남길 불운한 대통령으로 등극했다.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단단한 합금판을 쥔다.
겉보기에는 연약하기 그지없는 여자의 손이 슬쩍 움직였다. 합금판을 쥔 손가락이 조금씩 안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 속도는 느렸지만, 아무런 저항도 없는 듯이 안을 향해 파고들었다. 마치 금속이 아니라 연두부를 쥐고 있는 거라고 믿어질 정도였다.
두꺼운 합금판은 이내 그녀의 손에서 완전히 부스러진 채 투두둑 떨어져 내렸다.
신효진은 부서진 합금판 조각을 손에 쥐고 있다가 무심한 눈빛으로 허공을 향해 저글하듯이 던졌다가 받았다를 반복했다.
“…….”
그녀는 실험실을 가만히 둘러보았다.
일주일에 두 번씩 꼬박꼬박 출근 도장을 찍는 곳이다. 주로 그녀가 낼 수 있는 물리력,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변화하는 에테르의 움직임을 스캔하는 시설이다.
‘리미트리스 드림은 저주가 아니었어.’
몇 번이고 자신과 한서진을 혼란스럽게 했던 의문. 리미트리스 드림이 과연 저주가 맞는가, 하는.
스칼린의 친부이자 대마도사가 성스러운 축복이라고 했을 때, 쉽게 믿지 못하고 혼란스러워 했다.
그러나 진리의 수정이 보여준 내용은, 신효진으로서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었다.
‘죽은 성자를 위한 마지막 안식처라니…….’
그녀가 그 뒤로 내내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는 것은, 리미트리스 드림이 저주가 아님을 최종 확인해서가 아니었다.
살아있는 이가 아닌, 죽은 이를 위한 최후의 축복.
그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뿐이기에.
‘설마…… 리온은 이미 죽은 거야?’
이미 죽었거나, 아니면 훗날 죽게 되거나.
자신과 한서진이 겪는 레노지안은 시간축이 서로 다르다. 한서진의 시간이 훨씬 더 미래에 걸쳐 있다.
‘리온이 리미트리스 드림에 걸렸고, 그 꿈속에서 한 박사님이 리온 자신이라면, 그렇다면 리온은…….’
한서진이 보는 레노지안의 시간축에서는 이미 죽은 몸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그가 더 이상 레노지안에 진입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이해가 안 돼! 어떻게 잘못 알고 있을 수가 있지?’
한서진의 꿈속에서, 누군가가 적극적으로 아서 왕을 속이지 않은 한, 그가 리미트리스 드림을 저주로 알고 있을 리가 없다.
“수고하셨어요, 효진 씨.”
그때 정리를 마친 한서진이 들어왔다.
신효진은 쥐고 있던 금속 파편을 내려놓고 가볍게 일어섰다.
“오늘따라 다른 생각이 많으신 것 같은데……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꿈이 다시 열렸어요.”
신효진은 덤덤히 말했다. 너무 평온한 어투여서 한서진은 아 그런가요, 하고 넘어가려다가 퍼뜩 그 말뜻을 깨닫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 뭐라고요?”
“꿈이 다시 열렸어요. 그래서 레노지안에 다녀왔고요.”
“그게 정말입니까?”
“네. 그리고 소득도 있었구요.”
신효진은 자신이 겪은 일을 자세히 설명했고, 한서진은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해서 귀담아 들었다.
그녀의 긴 설명이 마침내 끝났다.
“……이렇게 된 거예요.”
“그렇군요…….”
한서진은 흔들리는 눈빛을 애써 감추며, 신효진을 주시했다.
꽉 쥐어진 주먹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손안에 축축한 느낌이 슬며시 고인다.
“효진 씨 말대로 리미트리스 드림이 죽은 성자를 위한 최후의 안식처라면……. 아서 왕은 이미 죽었다는 이야기인가요?”
“저의 시간축이 현재라면 아직 죽지 않았을 테고, 박사님의 시간축이 현재라면 이미 죽은 거겠죠. 어느 쪽이 현재이고 미래인지는 아직 모르잖아요?”
그 말이 맞다.
둘은 같은 시기에 레노지안과 연결되었지만, 둘이 겪는 시간축은 서로 다르다. 어느 쪽이 더 과거고 미래냐에 따라서, 아서 왕의 생존 여부가 달라지게 된다.
‘나는 레노지안이 막힌 지 오래 되었다.’
한서진은 주먹을 더욱 세게 쥐었다.
머릿속을 짧게 스친 번뇌가 평정심을 뒤흔들었다.
“제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 박사님의 꿈에서 리온, 아니 아서 왕이 리미트리스 드림을 저주로 알고 있다는 거예요. 진리의 수정에 있는 내용이라면 분명히 아서 왕이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누군가가 아서 왕을 속였다는 뜻입니까?”
“그럴 수 있지 않을까요? 아니면…….”
“효진 씨의 시간축에서 더 시간이 흐른 뒤, 리미트리스 드림이 사실 저주라는 반전이 있을 경우겠군요.”
“그럴 가능성은 낮다고 봐요.”
“…….”
“…….”
리미트리스 드림의 진짜 정체, 그런 중대한 사실이 확정되었지만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아서는 살아 있나, 아니면 죽었나?’
신효진이 꿈을 통해 본 미래의 레노지안, 최후의 성전에서 패배하여 멸망한 세상.
그것이 미래가 아니라 이미 현재에 벌어진 일이라면, 그래서 한서진이 더 이상 꿈을 꿀 수 없는 거라면?
한서진은 주먹을 세게 쥐었다.
“아카식 블레이드 분석을 더욱 서둘러야겠군요. 레노지안을 찾을 유일한 단서이니까요.”
잠이 들자, 또다시 꿈이 열렸다.
신효진은 스칼린이 되었고, 그녀를 둘러싼 세상은 아름다운 레노지안으로 변했다.
편안한 드레스를 입은 채, 밝은 햇빛이 내려앉는 정원을 한가하게 거닐었다.
“오늘따라 유독 태양이 강하네…….”
스칼린은 눈을 살짝 찡그린 채 이마로 손을 가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머리 위 드높은 곳에 떠오른 붉은 태양이 오늘따라 한층 더 강하게 빛을 뿜고 있다.
‘신기하기도 해라.’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레노지안의 태양은 참 신기하다.
레노지안에는 총 6개의 태양이 존재한다. 6개의 태양이 각각 6 방향에서 레노지안 대륙 전체를 비춘다.
태양은 그 자리에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는다.
레노지안의 밤은 태양이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게 아니라, 점점 빛이 약해지다가 완전히 꺼지면서 찾아온다.
그리고 새벽이 찾아오면 태양이 다시금 빛을 내며 밝아진다. 그렇게 아침이 되고, 대낮이 된다.
‘하늘이 막혀 있다고 했었지.’
레노지안은 하늘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무언가 강대한 결계 같은 장벽이 하늘을 막고 있어, 대륙의 모든 이를 가두고 있다.
결계로 하늘을 막은 주체는 오래 전 카드리안 신을 쫓아내고 신좌에 오른 배반자이자, 새로운 신이다. 물론 스칼린은 한 번도 그 신의 존재를 느껴본 적이 없지만.
‘근데 신이 정말 존재하기는 한 걸까?’
스칼린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레노지안의 카드리안 왕가는 대륙에서 신이나 다름없는 힘과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런데 하늘 위에서 지켜보는 신이 오랜 시간 동안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은 조금 이해가 안 된다.
자신을 몰아내기 위해 수천 년 동안 힘을 쌓아온 이들을 그저 두고 보는 이유가 무엇일까?
“여기에 있었소? 한참 찾았소.”
왕이 자연스럽게 옆에 와서 서며, 팔로 허리를 감싼다.
스칼린은 얼굴에서 수심을 지우고 대신 미소를 띤 채 그를 올려다봤다.
“그나저나 진리의 수정에서 무엇을 열람했소?”
“궁금한 게 있어서요.”
“나에게도 비밀이오?”
“리미트리스 드림에 관해서 궁금했어요.”
“고대의 축복 말이오? 성자에게 아름다운 안식을 주기 위한? 갑자기 그건 왜?”
역시 왕은 리미트리스 드림의 정체를 알고 있다.
그런데 왜 한서진의 시간축, 즉 미래에서는 리미트리스 드림이 저주라 믿고 있는 것일까?
“리온……. 만약에 죽고 난 뒤 리미트리스 드림에 머무를 수 있다면, 그건 행복한 삶일까요?”
“글쎄,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겠지.”
“어째서요? 죽음 후에도 영원히 아름다운 세상에 머무를 수 있잖아요?”
“대신 또 한 번의 삶을 누릴 수 없게 되잖소? 혼이 리미트리스 드림에 갇혀버리게 되니.”
“……아.”
스칼린은 미처 그건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이, 나지막한 탄성을 흘렸다.
“인간이 죽으면 육체에서 혼이 빠져 나와 환생의 굴레로 들어가게 되오. 죽음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오. 그런데 리미트리스 드림에 진입하는 걸 선택하게 되면, 그 새로운 시작을 누릴 수 없게 되지.”
“그럼 역대 성인들은 리미트리스 드림을 선택했나요?”
“선택한 이도, 그렇지 않은 이도 있었지. 후자가 압도적으로 많소.”
“왜죠?”
“먼저 리미트리스 드림을 안정적으로 시전할 수 있는 사람의 수가 드물다오. 고대신의 축복이니만큼, 월등히 어려운 마법이기도 하니까.”
“…….”
“자아의 완성을 이룬 이가 좀 더 깊은 깨달음을 탐구하기 위해, 자아의 보존을 위해 리미트리스 드림에 들어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환생을 택한다오.”
“환생…… 정말 다음 삶이라는 게 있을까요?”
“우린 그렇게 믿고 있소. 물론 전생을 기억해내지 않는 한, 환생을 증명할 길은 없지만.”
왕은 따스하게 미소 지으며 스칼린의 손을 감쌌다.
“나 또한 설령 죽는다 하더라도 리미트리스 드림에 들어가지는 않을 거요. 그럼 윤회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왕비를 다시 만날 기회도 사라지지 않겠소?”
“다시 태어나도 저와 결혼할 거예요?”
“몇 번이고 그대와 결혼할 거요.”
스칼린은 조용히 눈을 감고, 흘러나오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아냈다.
다정한 그의 목소리 위로, 미래의 그가 토해내던 최후의 울부짖음이 떠올랐다.
그것은 예정된 미래인가, 아니면 지금 이 순간이 오래 전에 종결된 과거의 환경인가.
답을 줄 수 있는 인물은 아마 대륙에서 단 한 명뿐이리라.
“리온, 부탁이 있어요.”
“말씀하시오.”
“아버지를 찾아주세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말에 서린 차가운 기운에 왕은 흠칫 놀랐다. 보통의 간절함이나 각오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스칼린은 서늘한 눈빛으로 주시한 채, 똑바로 말했다.
“수배를 내려도 좋아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서 제 앞에 모셔다 주세요.”
============================ 작품 후기 ============================
딸 자식 키워봤자 다 소용 없더라~
ps : 연재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전 한 이틀 정도 지난 줄 알았는데 시간이 이렇게 지났네요ㅜㅜ
이번 주를 진짜 너무 정신 없이 보냈더니 시간이 이리 된 줄도 몰랐습니다.
오늘이 수요일인 줄 알고 있다가 금요일인 거 보고 시껍했네요;
죄송해요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