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65 틀린 그림 =========================================================================
크리스의 입원은 당연히 위장이었다.
그는 암 따위는 전혀 앓지 않은 건강한 몸이었다.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데도 아무 이상 없었다.
하지만 로스차일드 가문이 쥐고 있는 자신의 오랜 약점들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사임이 가장 효과적이고 강력한 카드였다.
카이어 유쉘 로스차일드 역시 사임 카드를 꺼낼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 못할 테니, 효과는 배 이상이 될 것이다.
임기가 6년 이상 남은(연임까지 고려해서) 대통령직을 던져 버릴 것이라고, 누가 예상할 수 있겠는가.
반대로 건강하다는 사실이 알려질 경우, 그는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게 된다.
때문에 그가 입원한 스탠포드 부속병원에서는 보안이 철저한 특급 VIP실을 배정했다.
스탠포드를 선택한 이유는 니트론 교수의 모교이자 종신 전임이며, 한서진과도 인연이 각별하기 때문이다. 꾀병을 들키지 않고 비밀을 유지하기에는 가장 적합한 병원이었다.
“답답하시겠지만 일 년 정도 요양하신다 생각하고 푹 쉬시면 모든 게 끝나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 보안이 중요하네.”
“안심하십시오. CIA도 속여 넘길 자신이 있습니다. 우리 병원의 보안은 그만큼 철저합니다.”
“농담이겠지만, 그만한 각오라는 건 알겠네.”
환자복을 입은 대통령은 침대에 누운 채 느긋하게 태블릿 PC를 꺼내 들었다.
인터넷으로 각 언론사들의 입장과 시민들의 의견을 확인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대통령직을 벗어버린 뒤라서인지 마음 편안하게 세상의 반응을 관조할 수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지금 미국 전역은 패닉에 빠져 있었다.
한창 웜홀 게이트를 선점하고, 금융 적폐를 청산해야 마땅한 시간에 대통령이 병환으로 사임을 해버렸으니.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긴 했지만, 본래 나라를 이끌만한 재목은 아니라는 평을 듣던 인물이다. 그는 당장 행정부를 둘러싼 혼란을 수습하는 데만도 여력이 없었다.
나라가 안팎으로 갈팡질팡하고 있다. 그것도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
이런 상황에서 병환으로 사임한 전임 대통령의 과거 비리 따위가 조명을 받을 리가 없다. 오히려 과거 비리를 강조할수록 대중의 시선을 돌리려는 음모가 아니냐는 반발만 받게 된다.
‘카이어, 당신의 실책은 돈만 주무를 줄 알지 정치를 몰랐다는 거요.’
하물며 백악관은 전 세계를 통틀어 궁극의 정치판 복마전이다. 권력자가 되려는 자, 권력자의 그늘에 들어가려는 자, 그 모든 이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치열한 암투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때 전화가 진동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발신인을 확인한 크리스는 눈이 살짝 커졌다.
「Dr.Han」
그는 잠시 목청을 가다듬고 난 뒤 전화를 받았다.
“크리스요.”
「한서진입니다, 크리스 대통령님.」
“이제는 전직 대통령이자, 투병 생활이 남은 환자요.”
저쪽에서 잠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췌장암인가요?」
“발견이 어렵기도 하고, 예후가 워낙 나쁘니 사임하기에 적절한 명분이기도 하고. 뭐 그런 이유요.”
「저도 옛날에 췌장암을 앓았었죠. 말기였지요.」
“하지만 기적적으로 완치되었지 않소.”
크리스 대통령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덧붙였다.
“물론 기적이 아닌 설계지만.”
다시금 낮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한서진의 과거 병환 이력을 두고, 처음 여러 강대국들은 기적이 그를 도왔다고 여겼다. 그러나 지금 그가 이룩한 것을 보고도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에테르라는 자신의 힘을 통해 직접 말기 췌장암을 극복한 것이 틀림없었다.
미지의 치료제를 두고 여러 대부호들이 군침을 흘리고 있지만, 한서진이 존재 자체를 언급하지도 않는 상황에서 감히 먼저 청을 하는 이는 없었다.
「얼마나 투병하실 것 같습니까?」
“글쎄, 적어도 일 년은 싸워야 하지 않을까 싶소만.”
「대통령님은 매우 운이 좋으시군요. 일 년 만에 중기 췌장암을 완전히 극복하실 예정이니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일 년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는 거지요. 물론 탁월한 항암제라도 개발된다면 퇴원이 더 빨라지겠지만.”
「퇴원은 내일 당장이라도 시켜드릴 수 있습니다. 다만 대통령님의 거처로 마땅한 곳이 없군요. 그것은 스스로 만드셔야 할 것 같습니다만. 아, 물론 원하시는 대로 적극 지원해드릴 예정이니 안심하세요.」
“퇴원을? 내일 당장이라도요?”
크리스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탁월한 항암제를 운운한 말은 농담이었다. 그런데 한서진은 농담이 아닌 진담으로 받아쳤다.
“한 박사, 설마…….”
「몇 시간 뒤 영원그룹에서 중대 발표가 있을 겁니다. 꼭 확인해보시길 바랍니다.」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그러나 크리스는 전화가 끊어진 이후에도 초조함을 금치 못하고 병실 안을 서성거리며 돌아다녔다. 오늘따라 왜 이리 시간이 더디게 가는지 몰랐다.
그리고 마침내 세 시간 뒤, 전미의 모든 매스컴이 영원그룹의 중대 발표 현장을 생중계로 내보냈다.
“우리 그룹은 암세포와 일반 세포를 정확히 구별하여, 오로지 암세포만을 공격하는 치료제를 개발했습니다. 암에 맞서 싸우는 모든 환자분들에게 새로운 미래를 선사할 수 있게 된 것에, 다 같이 기뻐해 주십시오.”
암이 정복되었다.
차세대 암 치료제 개발 소식은 전 세계를 들끓게 만들었다.
웜홀 게이트와는 다른 종류의 기대와 열망이 세상을 잠식했다. 사람의 목숨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느 쪽의 반응과 기대가 더 뜨겁다는 식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열광의 분위기가 띤 색깔이 달랐다.
특히 오랫동안 암으로 투병한 사람들, 죽음을 앞두고 있는 말기 암환자들, 갑작스럽게 암을 선고받고 막 기나긴 투병을 준비하는 사람들, 하나같이 크게 기뻐했다.
영원그룹 공개회견실은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기자들로 인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박현준 그룹 회장은 개발 사실 발표는 물론, 치료제에 대한 설명까지 손수 맡았다.
“H-4는 여러 가지 다양한 방식으로 암을 제거합니다. 가장 중요한 기능은 표적 식별과 위장 제거, 그리고 강제 열화입니다.”
“자세한 설명을 부탁합니다.”
“정확한 원리는 너무 길어서 다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에테르 에너지의 확산 반응을 이용해 환자의 신체 전체를 스캔합니다. 그 과정에서 전신에 있는 모든 암세포가 드러나게 되고, 선별된 표적에 꼬리표를 붙입니다. 암세포라는 것을 알아보기 쉽게 말이죠.”
대형 화면에는 흰 공 모양을 한 세포들이 나타났다. 이해를 돕기 위해 구축한 가상 이미지다.
푸른빛의 물결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가자, 일부 흰 세포들이 붉은 세포로 변했다.
“이 표시는 H-4에 함유된 암 공격 인자뿐만 아니라 인체의 면역 세포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즉 면역 체계를 아군으로 끌어들여 동시에 강화시키고, 함께 맞서 싸우는 거죠.”
“강제 열화라는 것은 뭡니까?”
“암세포는 표적으로 식별되는 과정에서 증식력을 상실합니다. 아무리 증식을 하려 해도 이미 유전자가 불완전하게 변한 상태라 실패하게 되는 거죠. 씨 없는 수박으로 만드는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여기저기서 가벼운 웃음이 터졌다.
박현준 회장은 조소를 띠고, 다시 말을 이었다.
“조금 전 설명을 정정해야겠군요. 함께 맞서 싸운다는 표현은 사실 정확하지 않습니다. 선별하고, 솎아내고, 제거하는 겁니다. 이 과정에서 대등한 싸움이 성립될 리가 없죠.”
싸운다는 것은 서로의 힘이 어느 정도 맞아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힘의 격차가 어찌해볼 수 없을 정도로 현저할 경우, 싸운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저희 그룹은 생명 연장 시술마저 중단한 시한부 말기 환자 200명을 대상으로 임상 시험을 했습니다. 그중 폐암이 20%, 간암이 15%, 위암이 30%, 악성 뇌종양이 15%, 그리고 나머지는 췌장암과 골육종 등 기타 암이었습니다.”
회견장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숨 막히는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모두가 박현준 회장의 눈과 입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간단히 결과만 말씀드리겠습니다. 200명 전원 완치되었습니다.”
그 순간 참았던 함성이 기다렸다는 듯이 터져 나왔다.
박현준은 유유자적하게 사람들의 환호를 즐기다가, 이내 손을 들어 양해를 구했다. 주변이 어느 정도 조용해지자 그는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가장 길게 걸린 치유 기간은 약 6개월이었으며, 그것도 암세포 제거 자체보다는 긴 투병 생활로 인해 망가진 신체 기능을 회복시키는 데 소요한 시간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미 기자들은 처음 발표회가 시작한 순간부터 노트북에서 손가락을 떼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타이핑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한서진 박사는 마침내 암을 정복했습니다.”
H-4 암 치료제 개발로 전 세계 시민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솟구쳤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각지에는 암으로 고통 받거나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암 치료제 개발로 이제 그들이 구원받을 길이 열렸다.
―그럼 이제 암은 어떻게 되는 거야?
―어떻게 되긴, 그냥 감기랑 동급 되는 거지. 앞으로 암 진단 받으면 그냥 약국 가서 H-4 사서 먹으면 되는 거 아닌가?
―헐. 그 많은 암 센터들은 그럼 다 어떡하지? 암 치료제 연구개발에 돈 엄청 쏟아 부었을 텐데…….
―원래 과학은 그런 경쟁 속에서 발달했다. 제일 먼저 성공한 놈이 다 가지는 거지. 승자독식 모르냐.
―뭔가 비정하다.
―그런 걸 가지고 비정하느니 하는 것보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게 된 걸 기뻐하는 게 어때? 솔직히 암센터 먹거리 걱정하는 건 좀 아니라고 본다.
―맞아. 암 환자들이 그런 말 들으면 무슨 생각이 들겠어?
그렇게 전 세계는 H-4에 대한 들뜬 희망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암이 감기가 되는 시대가 오다니, 진짜 공상과학현실이 강림했구나…….
―사실 웜홀 게이트 발표했을 때부터 이미 정해진 거다. 어쩌면 H-4가 더 빨리 개발되었을 수도 있을 걸? 난 아무리 생각해도 암 치료제가 웜홀 게이트보다 더 어려울 거라고는 생각이 안 돼서. 그건 진짜 먼 훗날의 미래에나 가능할 기술이었어.
―아무튼 한서진 박사는 외계인이 틀림없다. 반론은 허락하지 않겠다.
다 같이 기뻐하는 와중에도 이상한 점을 놓치지 않고 파고드는 이들이 있었다.
―근데 H-1이 간 치료제, H-2가 탈모 치료제 겸 제모제, 그리고 H-4가 암 치료제? 그럼 H-3는 어디로 사라진 거냐?
―번호를 건너뛴 거야, 아니면 아직 공개를 안 하는 거야?
―궁금하네. 왜 H-3는 공개를 안 할까. 넘버링 순서를 보면 뭔가 개발된 건 틀림없는 것 같은데.
H-3는 오직 두 명만을 위해 만든, 본래 레노지안에서는 왕족만이 사용할 수 있는 피부미용제다. 해당 마법을 발현하는 데에는 상용화가 불가능할 만큼 어마어마한 미스릴과 오리할콘, 에테르가 소모된다.
당연히 공개할 수도 없고, 할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잠깐, 그럼 크리스 대통령은 어떻게 되는 거야?
―헐……. 사임 발표를 일주일만 늦췄어도 대통령직을 반납할 필요는 없었는데…….
―……와. 진짜 안 됐다. 개불쌍해.
============================ 작품 후기 ============================
“아니지, 일주일만 늦췄으면 다른 사임 핑계 찾느라 개고생했겠지.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