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64 틀린 그림 =========================================================================
육중한 문이 옆으로 열렸다.
차가운 대리석 복도가 나타났다. 곧 어둠 속에서 일제히 불이 켜지며 대낮처럼 환해졌다.
스칼린은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다가, 입구에 세워져 있는 직사각형 돌을 향해 손을 뻗었다.
돌의 중심에 놓인 직경 50cm 크기의 원에 손을 대자, 푸르스름한 빛이 뿜어져 나온다.
허공에 떠오른 반듯한 사각형 화면을 조용히 주시하던 스칼린은 천천히 읊조렸다.
“왕비.”
허공의 화면이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뭉치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던 빛이 곧 복잡한 글자를 만들어냈다.
「스칼린 제다 이온 카르쉬라이.
현 레노지안 왕가의 왕비, 대륙 최강의 여기사.
국왕의 초룡 탐사 여정 도중에 만나 인연을 맺음.
……중략…….」
스칼린은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예전, 아서 왕과 함께 이곳에 처음 발을 들여놨을 때가 생생히 떠올랐기 때문이다.
큰 불안함 없이 그저 행복한 꿈을 꿀 수 있었던 그 시절이 가슴을 꽉 메웠다.
진리의 수정은 예전의 꿈에서 봤던 자료를 줄줄이 보여 주었고, 스칼린은 우두커니 선 채 머릿속을 더듬어나갔다.
‘할케냐 전투.’
진리의 수정이 보여주었던, 고대에 카드리온 가문이 신에게 패배하여 지상으로 추락하게 된 결전.
혹시 그 전쟁이 자신이 봤던 레노지안의 미래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때였다.
진리의 수정이 토해내는 왕비에 대한 자료에 갑자기 치지직거리는 잡음이 끼기 시작했다. 스칼린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봤다.
「……칼린 제다……치익…….
리미트리스 드림…… 편입되지 못한…… 그 혼은 환생의 굴레로…….
치익…… 이곳에 존재해서는 안 될…….
32,802번째……은 훨씬 더 빨리 붕괴할 것…….
잘못된 준비…… 치익…….」
잡음과 노이즈가 잔뜩 낀 문자들이 질서를 잃고 마구 뒤엉키기 시작했다. 스칼린은 우두커니 선 채 노려보듯 주시했다.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게…… 대체 뭐야?”
저번에 왕비에 관해 검색했을 때는 전혀 없었던 내용이 새로이 추가되었다. 그것도 잡음이 잔뜩 낀 채로.
스칼린은 다시 한 번 자신에 관한 자료를 검색했다. 이번에도 똑같았다.
마치 데이터베이스의 일부가 손상된 자료를 재생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드문드문 확인되는 비손상 부분을 짜맞춰 봤지만,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혼의 환생? 이곳에 존재해서는 안 돼? 32,802번째는 더 빨리 붕괴한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이지?’
눈을 뜬 채 컴컴한 암흑을 주시하는 듯한 기분이다.
기분 나쁜 모호함이 온몸의 감각을 긁는 것 같다.
그녀는 주먹을 단단히 쥐고, 이를 악문 채 읊조렸다.
“리미트리스 드림.”
「리미트리스 드림.
고귀한 이를 위한 최후의 주문.
만인의 존경을 받아 마땅한 이가 삶을 다했을 때, 그의 영혼을 영원한 꿈의 안식처로 인도한다. 그 영혼은 이 세상 자체가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는, 사실상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아무나 그 축복을 누리지 못하며, 주문이 요구하는 고결한 영혼을 지닌 이만이 꿈의 세계로 들어설 수 있다.
……중략…….」
스칼린은 눈을 크게 뜨며, 저도 모르게 뒤로 반걸음 정도 물러섰다.
“이게 리미트리스 드림의 진짜 정체라고?”
월 스트리트 저널이 정부 인사들의 개인적 비리에 대한 대대적인 비난으로 반격의 포문을 열자, 미국 내의 격론 분위기는 한층 더 가열된 색을 띠었다.
화폐 자본가들이 지분을 쥐고 있는 대형 언론사들도 여기에 가세했고,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진흙탕 싸움이 시작되었다.
행정부 주요 인사들의 비도덕성, 불법성을 놓고 책임을 요구하는 여론이 끊이지 않았고, 행정부는 끝없는 소모전에 휘말려 엉망진창이 되었다.
뜻이 깊은 이들은, 웜홀 게이트로 인한 국제 질서를 재건축해야 하는 판국에 국가 전체적으로 무의미한 체력 낭비를 한다며 깊은 한탄을 했다.
―위기의식을 느낀 대자본가들이 순순히 죽어줄 마음이 없어서 이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웜홀이 실용화되면 큰 손해를 보게 되는 대부호들이 자기들이 거느린 언론사를 통해서 행정부를 집중 타격하고 있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서 장기전으로 갈 속셈이다.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분석이었다.
모든 부자들이 아니라, 연준위와 화폐발행권을 쥐고 흔들던 이들이 주도한 혼란이었으니까.
저 정도까지 생각이 닿는 이들만 해도 미국 내에서는 꽤 사고가 열린 이들이었다. 대부분의 대중들은 그저 매일같이 드러나는 행정부 인사들의 결격성에 집중하고, 흥분했다.
여론을 뒤흔든 것은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강하게 압박하던 FBI의 수사가 잠시 주춤한 것이다. 구속된 임원들에 대한 고강도의 심문도 일시적으로 멈췄다.
“크리스 대통령이 그래도 아주 멍청한 인물은 아닌 것 같군. 누가 자기를 죽일 수 있는지 알아보는 눈은 있으니 말이야.”
크리스가 한서진을 적대한다 해서, 그가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보복 조치는 별로 없다. 어차피 한서진은 미국과 경제 및 정치적으로 밀접하게 얽힌 관계 아닌가.
기껏해야 정치적으로 사소한 생채기 정도나 낼 수 있을까.
그러나 뿌리 깊은 자신들은 다르다. CIA 내부자 등 오랜 유대 관계를 맺은 이들을 통해 수십 년 간 축적한 자료가 있다.
그것을 쥐고 있는 이상, 크리스 대통령은 결코 한서진 편을 들지 못할 것이다. 역사상 최악으로 추악한 대통령으로 전락하고 싶지 않다면.
화폐 자본가들은 연방정부의 압박이 일시적으로 멈춘 것을 그렇게 호신호로 받아들였다.
FBI가 한밤중에 사택에 쳐들어와서 자신들의 손에 수갑을 채워서 끌고 나가기 전까지는.
“너희들, 대체 뭐냐! 이게 무슨 짓이냐!”
한밤중에 잠옷 바람으로 끌려나온 카이어 유쉘 로스차일드는 늙은 몸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를 고성을 쩌렁쩌렁하게 내질렀다.
그러나 FBI 요원들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당신은 국가 경제를 혼란시키고 내란을 유도한 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 당신은 불리한 진술을 거부할 수 있으며,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습니다.”
“네 이놈들! 내가 누군지 알고!”
카이어의 저택뿐만 아니라, 크림슨 록펠러 등 타가문의 저택에서도 비슷한 일이 한날한시에 벌어졌다.
오랫동안 미국 사회와 경제를 주름잡아온 거물 대부호들이 줄줄이 잡혀갔고, 그 모습이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다.
대주주의 통제를 받는 언론사는 정작 그 대주주가 내란 등의 혐의로 잡혀가자 당황해서 주춤거렸다.
FBI 네이션 국장은 범죄와의 타협은 없을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여 정의를 강조했고, 잡아들인 부호들은 오랫동안 미국 시민들의 부를 좀먹어서 자산을 증식시킨 기생충이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구치소에서 그 방송을 접한 카이어 등 화폐 자본가들은 더 이상의 타협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면회를 온 전속 변호사와 철창을 사이에 두고 앉은 카이어는 덤덤히 입을 열었다.
“크리스가 기어이 결심했군.”
“회장님, 지시를 내려 주십시오.”
“벼랑 아래로 뛰어내리겠다면 그리 해줘야겠지……. 생각만큼 짜릿하진 않겠지만.”
난생 처음으로 구속되고, 대중 앞에서 강도 높은 비난을 받고 있지만, 카이어는 조금도 초췌한 기색이 없었다.
“전부 공개하게.”
“예, 알겠습니다.”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크리스 정부의 모든 주요 인사들에 관한 중대한 불법 사실들을 널리 퍼트리라는 지시. 한치 앞도 볼 수 없던 진흙탕 싸움은 이제 끝이 없는 레일에 올라섰다.
‘물러서야 할 때는 오래 전에 지났다.’
카이어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붙잡았다.
한서진과 점잖은 경쟁을 펼칠 때는 한수 접어주는 게 차라리 이득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목숨을 건 전쟁으로 돌입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치졸하게 달라붙고, 괴롭혀야 한다.
얌전히 물러설수록 더 우습게 보이고, 강하게 두드려 맞을 뿐이니까.
―지이잉! 지이잉!
그때 변호사의 핸드폰이 옷 안에서 진동했다. 급한 연락이었는지, 그는 카이어의 양해를 구하고 내용을 확인했다.
그 순간 변호사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카이어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으나, 애써 태연함을 구기지 않고 물었다.
“안 좋은 소식인가?”
“회장님, 그게……. 크리스 대통령이 사임했습니다.”
“……뭐라?”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경우의 수, 카이어 회장은 처음으로 표정이 깨져나갔다.
「……이와 같은 이유로, 저는 미합중국 시민 여러분께서 제게 부여하신 숭고한 권한을 다시 내려놓으려 합니다.」
크리스 대통령은 덤덤히 사임 발표문 낭독을 마쳤다.
미국 전체를 충격에 빠뜨린 갑작스러운 사임 발표, 사임 이유는 중기 췌장암이었다.
원래 예후가 지독히도 나쁜 췌장암 특성상 이제 크리스 대통령은 모든 업무를 내려놓고 절대적인 안정과 치료에 열중해야 했다. 완치는커녕 목숨까지 위험한 중대한 질병을 안은 채, 미합중국 대통령이라는 격무를 수행하기는 어려웠다.
대다수의 미국 시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지만, 사임 자체에는 납득했다. 당장 병원에 입원해야 하고, 살아서 나올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대통령직을 계속 하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사임 연설을 마치자마자 크리스 대통령은 곧바로 대형 병원에 입원했다. 기자들은 크리스 대통령의 병세를 놓고 치열한 취재 경쟁전을 벌였다.
화폐 자본가들은 부랴부랴 크리스 대통령이 과거 얽힌 비리들을 퍼트렸지만, 살짝 어긋난 타이밍이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미국 시민들은 대통령직이 주는 격무를 수행하다 큰 병을 얻은 이를 ‘확실하지도 않은 과거’로 공격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럴 듯한 근거를 갖춘 비리 사실도, 이미 동정론으로 무장한 대중에게는 전혀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크리스 대통령의 병환 이외에는 모든 눈과 귀를 닫아버렸다.
FBI 네이션 국장을 향한 공격도 더 이상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크리스 대통령을 향한 동정론은 그가 남기고 간 백악관 인사들에게 고스란히 흡수되었고, 대통령직을 계승한 부통령은 큰 무리 없이 행정부를 수습했다.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야! 이런 타이밍에 갑자기 췌장암이라고! 크리스 놈이 지금 쇼를 하고 있는 거라고!”
소식을 접한 카이어는 분개를 터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크리스 대통령의 연기였다. 그의 거짓말에 전미와 세계가 놀아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이런 절묘한 타이밍에, 그런 기가 막힌 병을 얻었다고?
“한서진 박사의 지시가 틀림없어! 병을 핑계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라고 한 거겠지!”
생각해보니 USB에 담긴 자료로 인한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이 유일했다.
하지만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설마하니 대통령직이라는 가장 강력하고 달콤한 무기를 스스로 포기할 줄, 어느 누가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대통령에 대한 동정은 이제 자신들을 향한 분노로 변해서 해일처럼 덮쳐올 것이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크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무대 위 모두에게 엿을 먹이고, 정작 본인은 무대를 내려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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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양키의 뒷모습은 얼마나 빨대다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