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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463화 (463/609)

00463  애국의 길  =========================================================================

카이어가 돌아간 후, 크리스 대통령은 천천히 USB를 집어 들고 개인 노트북에 꽂았다. USB 안에는 1개의 폴더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미스터 크리스, 바로 폴더 이름이었다.

폴더를 열자 다시 수십 개의 하위 폴더가 나타났다. 하위 폴더는 저마다 연월일로 된 이름이 붙어 있었다.

크리스 대통령은 그 중 한 폴더를 열었다. 몇 개의 동영상과 사진 및 문서 파일이 보인다.

문서 파일을 연 순간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곧이어 쓴웃음이 입가에 떠올랐다.

“역시…….”

폴더의 날짜는 그가 상원의원이 되기도 전, 까마득한 옛날 것이었다.

당시 그가 공격적으로 회사를 경영하면서, 반독점 제재를 회피하기 위해 로비로 공략한 정치가들의 명단 및 그들에게 준 정치자금과 혜택이 빠짐없이 적혀 있었다.

시효는 이미 지난 일이지만, 이 사실이 공론화되면 대통령으로서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그는 다른 폴더도 확인했다. 정치인으로 입문한 뒤 그가 관여된 크고 중요한 불법 사실들이 담긴 파일들이었다.

가장 오래 된 것은 30년 전 것도 있었고, 최근 것은 불과 몇 달 전 자료도 있었다.

한 사람의 몇 십 년 인생을 이렇게 오랫동안 정밀하게 추적하고, 계량화할 수 있는 것일까.

민간의 힘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CIA 등 고급 정보 수집 능력이 있는 국가 기관의 적극적인 협조 없이 만들어질 수 없는 자료였다.

크리스는 모든 자료를 차분히 살폈다.

어느 것 하나만 터져도 자신은 정치인으로서 큰 정치적 타격을 입게 된다. 이 중의 1/10만 터져도 탄핵은 거의 확실시될 것이다.

언론을 아무리 틀어막아도 소용없으리라. 오히려 전미 모든 저널리즘이 자신을 물어뜯는 사냥개 역할을 자처할 것이다.

USB에 담긴 자료는 차갑게 묻고 있었다.

자신들과 한서진, 어느 쪽을 택할 것이냐.

전자를 택할 경우 정치인 인생을 지킬 수 있다. 후자를 택할 경우 남은 정치인 인생은 너덜너덜한 걸레가 될 것이다.

미국 역사에 획을 그을 대죄인, 살아도 산 게 아닌 산송장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런 엄중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크리스 대통령은 차분히 노트북을 덮었다.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도 살벌하고 단단히 빛나고 있었다.

웜홀의 첫 실용화로 미국 전역이 들끓어 있는 동안, 한편에서는 화폐 자본가들에 대한 밑작업이 차곡차곡 진행되고 있었다.

차티스 은행은 시작에 지나지 않았으며, 화폐 자본 세력이 보유한 은행 및 투자 회사에 대한 작업은 점차적으로 그물망을 넓히고 있었다.

엑슨모빌을 시작으로 석유 및 에너지 업계에 대한 공격도 계속해서 변속 기어를 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에 대한 반격이 일어났다.

―FBI 네이션 국장, 불륜 스캔들 의혹!

―차티스 은행에 대한 과잉 수사는 본인의 비도덕성을 감추기 위한 연막?

―백악관, 정녕 모르는 일이었나?

월 스트리트 저널을 시작으로 현 사태를 질타하는 여론이 들판에 번진 불길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크리스 행정부의 탄압 의혹을 조장하는 기사들이 헤드라인에 걸렸다. 웜홀 게이트라는, 인류 역사상 초유의 화제마저 덮어버릴 듯한 기세였다.

“월가 대주주들의 반격이 시작됐어.”

“제가 배후에 있는 걸 알면서도요?”

“벼랑 끝에 몰렸다는 걸 깨달은 거지. 떨어지는 것보다는 미친 척 하고 들이받는 걸 택하지 않을까?”

지금까지 분노를 참으면서도 밀려나는 걸 감안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한 발짝만 더 밀려나면 벼랑 끝으로 떨어지는 위치, 당연히 죽창이라도 들고 맞서야 한다.

정지원은 어깨를 으쓱했다.

“네가 처음 정한 가이드라인, 그건 여전히 유효하냐?”

“네, 그렇습니다.”

“그 자들에게 그런 자비를 보일 필요까진 없을 텐데…….”

한서진이 원하는 그들의 최후, 그것은 국제 자본 세력에서 평범한 자산가로 전락하는 것이었다.

그들로부터 부귀영화까지 빼앗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국제 경제 시스템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 자체를 영원히 끊겠다는 것이다.

정지원은 그 점이 이해되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모든 것을 박탈해버릴 수도 있을 텐데, 왜 그런 너그러운 미래를 보장하려 하는가?

“그들이 몇 번 저를 적대하긴 했습니다만, 제 목숨을 직접 노린 적은 없죠. 사실 우리가 그렇게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은 아니라고 봅니다.”

“카이어 유쉘 로스차일드가 그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아주 기가 막혀서 뒤로 넘어졌을 거다. 노인네 골로 보내버리기에는 화병이 제일 좋지.”

큰 원수지간은 아니다. 화폐 자본가들이 그 말을 들었다가는 어처구니 없어했으리라.

그들은 지금 자신들의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떨며 저항하고 있는 중이니까.

“왜 그렇게 자꾸 웃으시죠?”

“아니, 그냥…… 좋아서.”

정지원은 실실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동안 너한테 딱 하나 아쉬운 게 있다면, 바로 욕심이 터무니없이 적다는 거였어.”

“남들이 들으면 웃습니다.”

“아니, 맞는 말이지. 넌 네가 가진 능력에 비해서 욕심이 너무 적었으니까.”

“…….”

“미국의 영웅으로만 남기에는 네가 이룬 게 너무 커. 너는 충분히 미국을 가질 수 있다.”

미국을 가진다…….

정지원을 포함한, 한서진의 최측근들이 최근 조심스럽게 품기 시작한 구상이었다.

그동안 미국의 영웅으로만 만족하던 한서진이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한 것에 그들은 내색하진 않았지만 무척 기뻐했다.

“미국을 가진다니…… 너무 엄청난 말이군요.”

“넌 그럴 자격이 있어.”

“분명히 말씀드리자면,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은 목적이 아닌 수단이라는 겁니다.”

그 말이 더욱 마음에 들었는지, 정지원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음 지었다.

“네 측근으로서, 참 보기 좋구나.”

새하얀 꽃이 끝없이 피어 있다.

향긋한 꽃가루 향기가 흐드러지게 세상을 뒤덮고, 눈부신 섬광이 대지를 따스하게 보듬는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취해버릴 듯 아름다운 꽃의 정원, 그 끝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사람이 있었다.

“여기는……?”

키가 크고 늘씬한 여자, 그녀의 입에서 얼빠진 듯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리다가, 자신의 두 손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또 땅에 고인 물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기도 했다.

그때, 사각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그녀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왕비, 땅을 짚고 무엇을 하고 있는 거요?”

인자한 남자의 목소리에 여자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웃고 있는 남자를 확인한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급히 일어난 그녀는 남자의 손을 덥석 잡았다. 갈라진 목소리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리, 온?”

“왜 그러시오? 내 얼굴에 뭐가 묻었소?”

“정말, 리온이 맞아요? 당신, 리온이 맞는 거죠?”

“허어, 정원에서 바람이나 쐰다더니, 그새 낮잠이라도 잔 거요?”

신효진, 아니 스칼린은 그의 손을 잡은 채 경직된 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이것은 꿈인가. 아니면 현실인가.

지금 자신은 레노지안의 꿈에 다시 들어온 것인가.

아니면 레노지안의 꿈에 다시 들어가는 ‘꿈’을 꾸고 있는 중인가.

꿈이라기에 믿어지지 않는 선명한 감각이 오감을 충족하고 있지만, 그래서 더 믿어지지 않는가.

레노지안에 다시 들어온 것인지, 그런 내용의 꿈에 취해 있는 것인지. 분별을 할 수가 없었다.

불현듯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리온…… 저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걸까요?”

“왕비? 오늘따라 정말 이상하오. 갑자기 왜 그렇게 우는 거요?”

“……모르겠어요, 모르겠어. 지금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건지, 아니면 꿈에 다시 들어온 건지…… 전자라면 제발 깨지 말고, 후자라면 부디 이게 마지막이 아니길 바래요…….”

그녀는 어깨를 떨며 작게 울먹거렸다.

안쓰러운 얼굴로 바라보던 왕은 가만히 어깨를 당겨 그녀를 품에 안았다.

“잠깐 존 사이 악몽을 꾼 모양이군. 잊어버리시오.”

“리온…… 리온…….”

“뱃속의 아기에게도 좋지 않소. 편안히 마음을 가지고 행복한 생각만 하시오.”

“……네? 아기요?”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던 스칼린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기라니요?”

“왕비야말로 자꾸 이상한 말을 하는군. 왕비는 지금 회임 중이지 않소.”

“……제가요?”

“우리의 귀중한 첫 아이를 배고 있지 않소?”

스칼린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느 정도 진정한 이후, 스칼린은 마침내 레노지안이 다시 열렸음을 깨달았다. 자신은 지금 레노지안에 다시 들어온 꿈에 취한 게 아니라, 정말 레노지안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것은 어떤 말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벅찬 감동이자, 큰 기쁨이었다.

사랑하는 꿈속의 반려, 리온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마치 죽은 연인과 재회한 것 이상의 감격을 주었다.

또한 첫 아이를 임신했다는 것에 스칼린은 기뻐해야 할지 당황스러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솔직한 마음으론 기쁘기 그지없는데, 꿈에서 깨면 한서진을 어찌 봐야 할지 당혹스러웠던 것이다.

‘꿈에서 제가 당신의 아이를 가졌어요.’

이 말을 들으면 한서진은 무슨 생각을 할까?

놀라운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스칼린 왕비와 아서 왕은 혼인을 한지 어언 10년이 지났던 것이다. 그동안 아이가 태어나지 않아 신하들과 백성들이 크고 짙은 근심에 젖어 있었다 한다.

이제 후계자를 생산하게 되었으니, 온 왕국이 아이가 태어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형국이었다.

‘10년이나 지났어?’

스칼린은 그 사실이 조금 당황스러웠다.

수석 마도사인 아버지로부터 리미트리스 드림이 저주가 아닌 신성한 축복이라는 말을 듣고, 갑자기 레노지안이 멸망하는 먼 미래를 보았다. 그리고 꿈이 닫혔다가 다시 열리니, 그동안 10년에 가까운 세월이 훌쩍 지나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아버지의 행방을 찾았다. 그러나…….

“떠나셨다고요?”

“그렇소. 세상의 진리에 깊은 깨달음을 얻어 고된 수행을 통해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멀리 여행을 떠나셨소.”

“…….”

스칼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말 아버지는 수행을 위해서 여행을 떠난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 자취를 감춘 것일까.

‘리미트리스 드림에 관해서 듣지 못한 게 너무 많아.’

성스러운 축복이라고만 들었을 뿐, 구체적인 이야기는 하나도 듣지 못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야, 왜 한서진의 꿈에서 아서 왕이 리미트리스 드림을 저주로 인식하고 있는지, 그 의문을 해결할 수 있을 텐데.

‘설마…… 나를 피해서 떠나신 건 아니겠지?’

스칼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말도 안 되는 불길한 상상이지만, 머릿속에서 완전히 떨쳐내기 어려웠다.

내내 마음에 걸렸던 것이 있다. 바로 자신이 리미트리스 드림에 관해서 조사하기 시작한 게, 꿈이 닫히게 된 원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리온, 부탁이 있어요.”

“무엇이오?”

“왕실 기록보관소…… 진리의 수정에 담긴 마법 지식을 열람하고 싶어요.”

============================ 작품 후기 ============================

“미국을 가진다니…… 너무 엄청난 말이군요.”

“넌 그럴 자격이 있어.”

“전 지구를 가지려고 하는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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