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462화 (462/609)

00462  애국의 길  =========================================================================

‘폐하…….’

목소리가 들린다. 매우 귀에 익은, 하지만 누군지 잘 생각이 나지 않는.

흐릿한 인지를 애써 더듬으며, 누구의 목소리인지 필사적으로 떠올리려 노력해본다.

‘폐하의 백성들에게 영원한 행복과 안식을 주는 것……. 리미트리스 드림이 정녕 그것만이 목적이라 생각하시나요?’

목소리의 떨림이 조금씩 선명해지며, 흐려졌던 의식도 점차적으로 뚜렷하게 변한다.

어두운 암막이 걷히며, 눈앞의 시야가 형체를 갖춰 나갔다.

늘씬하면서도 육감적인 몸매를 드러내는 갑옷을 입은, 긴 머리의 여자가 자신을 향해 다가온다.

남자의 마음을 사정없이 빼앗을 정도로 예쁜 얼굴, 하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함이 가슴을 스며들었다.

‘잊지 마세요. 리미트리스 드림은…….’

오랜 풍파가 담긴 바람이 불어오며, 여자의 옷을 바스러뜨려 허공에 날려 보낸다. 옷뿐만 아니라 머리카락, 살점까지 잘게 부서지며 허공에 흩어진다.

어느덧 여자는 아름다운 모습이 사라지고, 흰 뼈만 남은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발목에 걸린 자그마한 갑옷 조각, 그리고 뼈다귀만 남은 손이 쥐고 있는 녹슨 검이 오랜 세월의 흔적을 나타낸다.

‘절망의 끝에서 그저 버티기 위한 도피가 아니라, 새로운 미래를 싹틔우기 위한 희망이에요.’

한서진은 눈을 떴다.

가벼운 두통이 머릿속에 잔류하는 게 느껴졌다. 이마를 감싼 그는 조금 전 꾸었던 꿈을 애써 떠올렸다.

‘효진 씨?’

꿈을 꿀 때는 몰랐지만, 그녀는 신효진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스칼린 왕비라고 해야겠지.

“리미트리스 드림이…… 저주가 아니라 희망이라고?”

그는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서 왕은 리미트리스 드림이 자신을 파멸시키는 저주라 했다. 하지만 방금 꾸었던 그 꿈은 뭐란 말인가.

‘어느 쪽이 맞는 거야?’

스칼린 왕비는 희망이라 알고 리미트리스 드림을 걸었고, 아서 왕은 그것을 저주로 알고 있는 것인가?

‘갑자기 이런 꿈은 또 왜 꾸고.’

머리를 가볍게 쥐어뜯고 있을 때, 불현듯 신효진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만약에 어느 날 갑자기 다시 꿈이 열리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여전히 그대로일까요? 아니면 뭔가 달라져 있을까요?

혹시 꿈의 건너편에 무슨 변화가 생긴 것일까? 그래서 스칼린 왕비가 나와서 리미트리스 드림이 희망이라고 하는 기이한 꿈을 꾸게 된 것일까?

답답한 마음이 가슴을 떠나지 않는다.

‘다시 꿈을 꿀 수 있으면 좋겠는데.’

평성―캘리포니아 웜홀 게이트가 연결된 이후, SJ게이트는 본격적인 사업 준비에 나섰다.

“평성은 우리나라와 외국을 잇는 유일한 웜홀 메인 허브 지역이 될 겁니다. 또한 평성은 전국의 각 대도시를 연결하는 메인 허브 역할도 수행합니다.”

국가와 국가를 잇는 웜홀은 3번대 넘버링이 붙는다. 예를 들어서 평성-캘리포니아 웜홀의 넘버링은 301이 된다.

또한 평성에는 서울, 부산, 인천, 대전 등 각 지방으로 갈 수 있는 웜홀들이 각각 설치된다. 이처럼 국가 내의 도시끼리 연결하는 웜홀은 2번대 넘버링이 붙는다. 예를 들어 평성과 서울을 연결하게 될 웜홀의 넘버링은 201이 되는 식이다.

따라서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201번 웜홀을 타고 평성에 도착한 다음, 다시 202번 웜홀을 타고 부산으로 이동을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도시 내에서 이동이 가능한 웜홀은 1번대 넘버링이 붙게 된다. 예를 들어 서울역에서 도봉산역을 가는 경우에 이용할 수 있다.

국가와 국가를 잇는 웜홀의 넘버링이 1번대가 아니라 3번대인 것을 놓고,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품었다.

그러나 임시로 SJ게이트의 경영을 맡고 있는 정지원, 로건 정의 설명에 명쾌하게 풀렸다.

“웜홀로 이동하게 될 거리의 단위는 앞으로 더욱 커지게 될 겁니다. 예를 들어서 행성 간 이동이 가능하게 해주는 웜홀은 4번대 넘버를 갖게 되겠지요. 그 때문에 연결 거리가 짧을수록 작은 넘버를 책정하게 된 겁니다.”

즉 연결 거리가 증가할수록 웜홀에 매겨지는 넘버의 숫자도 증가하게 되는 방식이었다.

4번대 웜홀이 실용화가 될 날이 과연 올까? 그런 상상에 많은 이들이 미래를 향해 큰 희망을 품었다.

“웜홀 게이트를 안전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테러, 밀수, 그리고 생태계 파괴를 막기 위한 추가 기술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핵무장을 한 테러리스트가 웜홀을 차지하게 된다면 반대쪽으로 연결된 곳은 큰 위험에 노출된다. 때문에 웜홀은 안전한 장소에 설치해야 했고, 24시간 엄중한 경비를 서야 했다.

또한 웜홀을 통해 지구 반대편의 종자나 곤충 등이 유입되면 생태계에 혼란에 생길 수 있다. 그 점도 해결해야 했다.

다행히 웜홀 자체의 안전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

“TNT 폭탄을 퍼부어도 웜홀은 파괴되거나 변형되지 않습니다. 시공간에 생긴 균열의 틈이기 때문이죠. 물리적인 에너지로 웜홀을 파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한국과 미국을 시작으로, 어떻게 전국의 도시를 그물망처럼 연결하고, 또 세계 여러 나라들을 촘촘히 연결할 것인지에 관한 구체적인 계획이 발표되었다.

SJ게이트의 구체적인 사업 계획이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기존 운송업 관련주는 폭락을 거듭했다. 운송에 필수적인 석유 관련주도 타격을 면치 못했다.

우습게도 차량, 특히 대형 화물차에 대한 시장 가치는 다른 그래프를 보였다. 대형 화물차를 주력으로 생산하는 제조업체의 가치는 오히려 폭등했다.

웜홀이 지구 전역을 촘촘히 뒤덮는다면, 물류 이동은 화물차가 알파요, 오메가가 될 것이라는 예측이 강한 힘을 얻은 덕분이다.

‘기차는 역사 속의 유물이 될 것.’

항공기나 배는 운송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나 기차는 달랐다. 전문가들은 웜홀이 완전히 자리 잡는다면 기차는 역사 속으로 퇴장을 할 것이라 보았다.

한국의 어느 시골에서 미국의 대도시까지 이동하는데 불과 몇 km도 채 되지 않는데(각 웜홀 간의 이동 거리를 따졌을 때), 기차가 존속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차티스 은행은 마침내 영업 정지 명령을 받고, 법정 관리에 들어갔다. 파산 절차도 동시에 진행되었다.

어차피 영업 정지 명령이 없어도 주요 임원들이 대거 FBI의 조사를 받고 있었기에, 실질적으로 영업 수행 능력이 바닥을 치고 있는 상태였다.

미국 석유업계를 주름잡는 엑슨모빌 역시 그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

처음에는 나라를 망치는 길이라며 반대하고 나서던 공화당도 어느 순간부터 반대 목소리가 조금씩 줄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대세의 흐름을 느낀 것이다.

“이것은 연준위 쟁탈전의 재탕이다.”

사람들은 비로소 알아차렸다.

단순히 차티스 은행과 엑슨모빌의 기업 내 부정과 비리 문제가 아니라, 화폐 자본가들을 완전히 몰아내려는 움직임이 다시 시작되었음을.

그리고 한서진이 논란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클레튼 전 대통령은 화폐자본가들의 손에서 미국의 경제권을 연방정부로 가져오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 결과 그는 재선에서 실패하고, 화폐자본가들의 꼭두각시인 크리스 대통령이 백악관을 차지했다. 하지만 화폐자본가들은 백악관을 차지했으면서도 끝끝내 연준위를 지켜내지는 못했다.”

“그런데 근래 들어 뭔가 의심이 든다. 크리스 대통령이 정녕 화폐자본가들의 꼭두각시가 맞긴 한 건가? 사실 그가 독하게 마음먹었으면 연준위를 화폐자본가들의 품에 그대로 놔둘 수도 있었을 것이다.”

차티스 은행과 엑슨모빌이 끝이 아니었다.

FBI는 로스차일드와 록펠러 등 화폐자본가들이 보유한 계열 은행과 회사를 중점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미 국세청까지 가세해서 무차별 지원 폭격을 퍼부었다.

대대적인 세무 조사와 사내 부정 및 비리 조사가 겹쳐지며, 해당 회사들은 도저히 업무가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마침내 카이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직접 움직였다. 노구를 이끌고 백악관을 방문한 것이다.

“크리스 대통령, 서클의 존속이 위협받고 있소.”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 그게 정회원이 태평스레 할 말이오?”

“나 역시 노력하고 있지만, 이미 백악관은 행정기관에 대한 장악력을 상실한지 오래입니다. 대통령의 이름으로 명령을 내려도 각 기관장들이 말을 듣지 않아요.”

“당신이 무능하다고 고해라도 하는 거요?”

그 말에 크리스 대통령은 대놓고 불쾌한 표정을 보였다. 그러나 카이어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우리는 당신이 변절했다고 여기고 있소만.”

“터무니없는 오해입니다.”

“글쎄, 어느 쪽이 터무니없는지는 지금 상황을 냉정히 따져보면 어린아이라도 알 수 있을 텐데. 사실 연준위를 빼앗겼을 때부터 의심해야 했소.”

“…….”

크리스 대통령은 더 이상 불쾌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오히려 숨기고 있던 미소를 드러내 보였다.

카이어는 그의 본색을 보고도 눈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가 얼마나 달콤한 자리를 약속했소?”

“글쎄요, 그런 건 없어요. 그저 이 자리에 오르면서, 그전에는 몰랐던 미합중국 대통령으로서의 책무를 깨달았을 뿐.”

“대통령, 지금 누구 덕에 그 자리에 오른 건지는 잊은 거요?”

“당연히 본인을 지지해준 많은 미합중국 시민들 덕분에 이 자리에 올랐지요. 그 점은 언제나 잊지 않고 있어요.”

크리스 대통령은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시민들 앞에 한 점 부끄러움 없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겁니다.”

“미국 경제 발전을 위해 오랫동안 헌신해온 우리들을 제물로 삼아서?”

“당신들이 헌신한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헌신한 것의 수만 배 이상의 과실을 뜯어갔지. 그렇지 않나요?”

카이어는 헛웃음을 지었다.

“언제부터 대통령이 그들의 입장을 대변했소?”

크리스 대통령 또한 그들과 같은 물에서 크고 성장한, 기업가 출신이다. 그런 이가 마치 자신은 관련 없다는 듯이 저렇게 말하고 있으니, 카이어 입장에서는 기가 찰 수밖에.

‘권력에 눈이 멀었군.’

카이어는 속으로 혀를 찼다.

지금 대통령은 돈을 탐하는 자본가가 아니었다. 바로 권력을 탐하는 정치인이었다.

어쩌면 백악관이라는 마의 공간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예견된 것인지 몰랐다. 대중의 지지와 정치에 취한 순간부터,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돼버리니.

그렇다면 정치인을 상대로 효과적인 거래를 해야 할 것이다.

“두말 않겠소. 우리를 향한 모든 공격을 멈추시오. 우리 역시 더 이상 그자를 적대하지 않을 테니.”

“이미 제 손을 떠난 일입니다, 미스터 로스차일드.”

“영예롭게 백악관을 떠나고 싶다면 내 마지막 경고를 들어야 할 거요.”

카이어는 분노를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

“우리가 대통령의 약점을 얼마나 많이 쥐고 있는지 알면, 본인도 충분히 합리적인 판단이 설 거요.”

툭 하고 내던져진 USB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크리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소. 그저 지금 즉시, 모든 공세를 멈추길 바랍니다.”

============================ 작품 후기 ============================

엄청 많이 바라면서 별로 안 바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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