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61 애국의 길 =========================================================================
그날도 신효진은 한서진의 감독 아래 신체능력 검사를 받고 있었다. 스칼린의 힘을 각성하고 난 뒤 그녀는 일주일에 두 번씩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처음보다 신체 능력이 전체적으로 증가했네요.”
에테르 스캐닝 수치를 확인하고 난 뒤 한서진이 말해주었다.
측정기에서 폴짝 내려온 신효진은 벌어지려는 가운을 여미며 쑥스럽게 대답했다.
“그래요? 저는 영 거기서 거기 같아서……. 스칼린 왕비의 힘에 비하면 한참 멀어서 그런가? 답답하기만 해요.”
“효진 씨가 느끼기에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죠?”
“10%도 채 안 되는 거 같은데요.”
“…….”
두꺼운 티타늄 합금을 맨손으로 파괴할 만한 힘을 지녔는데, 본래 힘의 10%도 채 안 된다고?
‘대체 레노지안은 어떤 괴물들이 사는 곳인지.’
그런 스칼린과 살을 맞대고 사는 아서 왕도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왕비가 뺨을 쓰다듬어주다가 살갗, 아니 두개골이 남아나기는 할까 싶다.
“웜홀 첫 설치, 정말 대단했어요. 감명 깊게 봤어요.”
그날 신효진도 한서진의 비서 자격으로 바로 곁에 서서 참관했었다.
물론 크리스 대통령은 그녀를 단순한 비서가 아닌 비밀 경호원으로 알고 있었다. 정보가 빠른 몇 몇 국가 수뇌부 역시 그녀가 범상치 않은 존재임을 직감하고 있었고.
“그런데 박사님, 이곳 지구 일에 그렇게 깊이 신경을 쓸 여유가 있을까요? 하루빨리 레노지안으로 가는 길을 찾아야 하지 않나요?”
“지금도 레노지안을 찾는 작업은 진행 중입니다. 바로 이 녀석이 열심히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있지요.”
한서진은 태블릿을 툭툭 가리키며 대답했다. 타르타로스 2와 연결된 단말기였다.
“그 동안 미국에 대한 지배력을 최대한 공고히 뿌리내려야 합니다.”
“왜죠?”
“레노지안을 돕는데 미국의 힘이 필요할지도 모르니까요. 아니, 반드시 필요할 겁니다.”
“…….”
신효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레노지안과 이곳 지구는 문명 차이도 크고, 서로 워낙 다르잖아요. 그곳은 신과 마법이 존재하는 세상인걸요. 그런데 미국이 과연 도움이 될까요?”
“그래도 지구 최고의 군사대국입니다.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죠.”
“…….”
“그리고 지구에는 마법은 없지만 대신 과학이 있습니다. 만약 과학을 마법과 융합시킨다면 레노지안인들이 상상하지도 못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레노지안의 성전에서 분명히 도움이 될 겁니다.”
“성전……. 레노지안은 언제쯤 성전을 치르게 될까요? 아니면 지금 치르고 있으려나요…….”
신효진은 레노지안이 성전을 치르고, 패배한 것을 지켜봤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레노지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나 그녀가 본 것은 본래 그녀가 겪던 시간축이 아닌, 먼 미래의 일. 현재 레노지안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둘 중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저 아무 일이 없기를 바라며,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
“훗날 레노지안으로 가는 길을 찾았을 때, 무기력하게 관망하는 일만큼은 없어야 하니까요. 그게 제가 서두르는 이유죠.”
“이해했어요.”
신효진이 웃으며 끄덕이자 물끄러미 바라보던 한서진은 문득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효진 씨, 요즘 부쩍 변한 거 알죠?”
“제가요? 어떻게요?”
그녀가 미소를 띠면서 되물었다.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듯한 짓궂음이 담긴 웃음이다. 그런 소소한 태도도 이전에는 접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자신감이 넘쳐요.”
“보기 별론가 봐요.”
“천만에요. 아주 보기 좋은데요.”
한서진은 그녀 위로 겹치는 누군가를 떠올리며, 이 말을 해도 되나 잠시 망설였다.
“꼭 스칼린 왕비를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
“물론 제가 그녀를 직접 본 적은 없습니다만.”
신효진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짙어졌다. 그런 모습이 더욱 그녀 위로 스칼린 왕비를 떠올리게 했다.
만약 잠들지 않고 깨어 있었다면, 아마도 저런 눈빛을 하고 있었을까.
더 이상 꿈을 꿀 수 없다며 어린 새처럼 슬퍼하던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 없다. 전이된 스칼린 왕비의 힘이 그녀를 강하게 만든 것이다.
“화폐 자본가라고 했나요? 박사님을 싫어한다던.”
“저를 싫어하는 사람들이야 많죠. 다만 실질적인 위협이 되는 이들이 적을 뿐이죠.”
“박사님 목숨을 노렸는데, 손을 봐야 하지 않아요? 그냥 넘어갈 수는 없잖아요.”
“효진 씨, 안 그래도 제가 말씀드리려 했어요. 그게 실은…….”
한서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신효진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설명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그의 말을 들었다.
“정말 신기하네요. 몇 년 전에 짠 첩보 작전이 저절로 그런 결과를 만들다니. 그 실바토르란 사람이 정말 대단한 천재인가 봐요.”
“큰 작전을 설계하는 능력만큼은 CIA에서도 전설적인 인물이라고 하더군요. 지금은 은퇴했습니다.”
“그럼 박사님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사고니까 아무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고 끝내실 건가요? 아니면 CIA에 그 책임을 물으실 건가요?”
“책임보다는 실리를 따지려고 합니다.”
“실리요?”
“저에게 명분이 있는 이상, 잠재적인 적을 완전히 정리하는 게 낫겠지요. 어차피 화폐 자본가들은 지금 당장은 숨을 죽이고 있을 뿐, 적당한 기회가 오기만 하면 언젠가는 제게 총구를 겨눌 자들이니까요.”
“제가 한 번 나서볼까요?”
한서진은 무슨 말인가 순간 어리둥절했다가, 신효진의 자신만만한 눈빛을 보고 이내 깨달았다.
“효진 씨, 여기는 지구입니다. 레노지안이 아닙니다.”
“왜요, 저 잘할 자신 있는데. 레노지안에서는 그런 거 많이 해봤어요.”
이 여자가, 병아리 목도 못 비틀 것 같던 그 신효진이 정녕 맞단 말인가? 한서진은 쓴웃음만 나왔다.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그 문제는 지구의 법대로, 제가 확실하게 처리하겠습니다.”
“아, 심심해요. 몸이 근질근질한데, 지구에서는 마음껏 힘을 쓰지도 못하고. 레노지안에서는 한 달이 멀다 하고 마수들을 잡으러 다녔었거든요.”
“진정하셔야죠. 지구에 마수 따위는 없으니까요.”
“칫.”
신효진은 작게 투덜거리며 기지개를 켰다.
두 팔을 위로 늘씬하게 뻗은 모습에서 활력이 넘친다. 남자라면 누구나 끌릴 수밖에 없을 듯한 자태에, 한서진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그런 반응을 알아챈 신효진은 재미있다는 듯이 조용히 웃으며 바라보다가 슬쩍 화제를 전환했다.
“박사님, 만약에 어느 날 갑자기 다시 꿈이 열리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갑자기, 다시 꿈이 열린다고요?”
“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잖아요. 갑자기 닫힌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다시…….”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일은 아니다.
한서진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고, 신효진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주시하다가 말을 이었다.
“박사님, 만약 꿈이 다시 열린다면 말이에요. 여전히 그대로일까요? 아니면 뭔가 달라져 있을까요?”
차티스 은행은 월가에서도 손꼽히는 대형 투자 은행이다.
예치금만으로 미국의 몇 개 주는 살 수 있을 거라 일컬어질 만큼 천문학적인 규모의 자산을 운용하고 있다.
미국 전역에 뻗어 있는 지점 수가 2위에 달하며, 보유 고객 수로 따지면 미국 내에서 최고로 손꼽힌다.
그런 차티스 은행을 향해, FBI가 칼을 들이댔다.
―FBI, 차티스 은행 내부자 거래 혐의 적발!
―적극적으로 투자자 속인 임원들, 줄줄이 수갑행!
―천문학적인 규모의 불법 대출 적발! 내통 대상은 은행 오너 일가?
―차티스, 주가 폭락!
―예금주들, 줄줄이 인출에 나서.
FBI에서 팔을 걷어붙이고 본격적인 수사에 나섰다. 은행 고위 임원들이 줄줄이 소환되고, 심지어 구속되는 이들도 나왔다.
심상치 않은 낌새를 감지한 예금주들은 생업도 마다한 채 예치금을 찾기 위해 은행을 찾았다. 차티스 전 지점은 미처 영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끝이 보이지 않는 대기줄이 늘어서 있었다.
일부 지점에서는 영업시간이 끝나기도 전에 인출할 현금이 동나는 바람에 화난 고객들의 항의에 시달려야 했다.
마치 메뚜기떼가 한바탕 쓸고 지나간 밀밭을 보는 듯한 광경이었다.
주가는 이미 일이 터지기 전 거래가의 20% 이하까지 폭락한 상태였다.
―크리스 대통령, FBI 네이션 국장 불러다 엄중히 경고.
―행정부의 무분별한 수사 통제?
―민주당, 대통령의 권한 남용이라며 분개하고 나서.
―금전의 힘은 백악관까지 움직이나.
불길은 걷잡을 수없이 커지고 있었다.
크리스 대통령이 FBI 국장을 백악관으로 소환한 것을 놓고 온갖 억측이 터져 나왔다.
차티스 은행의 주주들이 백악관에 로비를 행사했고, 크리스 대통령이 그들의 손을 들어준 것이라 여긴 것이다.
백악관을 나서는 네이션 국장의 표정이 썩어 들어가는 사진이 보도되면서, 그 추측은 더욱 강한 힘을 얻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엄중한 경고를 받은 것으로 알려진 FBI가 수사를 주저하는 일은 없었다.
네이션 국장은 대통령에 대한 무언의 항의를 보내듯, 차티스 은행에 대한 수사 강도를 더욱 올렸다.
차티스 은행은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FBI, 엑슨모빌을 향해 칼을 겨누다!
―석유업계, 대대적인 반발에 나서.
―걷잡을 수 없는 사정의 손길! 미국 전체를 열광케 만들다!
차티스 은행에 대한 수사가 막 시작된 상황에서, 또 다른 칼이 거대 석유회사 엑슨모빌을 향해 날을 세웠다. 로스차일드에 이어 록펠러까지 사정거리에 세운 것이다.
덕분에 백악관은 늦은 시간까지 전화가 끊이지 않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네이션 국장이 대체 제정신인가요?」
“엄중한 경고를 했는데 잘 이해하지 못한 눈치요. 아무래도 ‘저쪽’의 의지가 대단한 것 같소.”
대통령이 말한 ‘저쪽’이 누구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었다.
통화 상대인 서클의 정회원의 음성이 더욱 가라앉았다.
「우습군요. 일개 명예시민 한 명이 FBI까지 좌지우지하는 꼴이라니…… 이래서야 연방정부가 대체 왜 존재하는 겁니까.」
자존심이 구겨져야 할 말이었으나, 크리스 대통령은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물론 목소리에는 분기를 억지로 눌러 참는 기색을 담았다.
“이게 내 탓이라는 거요?”
「연준위를 어처구니없이 빼앗길 때만 해도 대통령의 입장을 이해했습니다. 당시는 상황이 어쩔 수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해서 우리의 피눈물 나는 손해까지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
「차티스 은행과 엑슨모빌은 시작에 불과해요. 그자는 우리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려고 하는 겁니다. 만약 우리가 정말 벼랑 끝으로 내몰린다면…… 절대로 순순히 사라지지는 않을 겁니다.」
“어찌 되었든 간에 나 역시 서클의 정회원이오.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지만은 않을 테니, 안심하시오.”
「믿고 있겠습니다.」
통화가 끊어졌다.
크리스 대통령은 무표정한 눈으로 전화기를 바라보다가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네이션 국장, 나 크리스 대통령이오.”
「예, 대통령님. 말씀하십시오.」
“그물을 더 힘껏 거둬들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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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왜 고양이에게 그물을 맡겨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