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57 배후는 어디에 =========================================================================
실바토르는 CIA의 전설이었다.
지난 수십 년 간 그는 굵직한 공작 대부분을 자신의 손으로 밑그림을 그렸다. 또한 하나도 빠짐없이 만족스러운 성공으로 이끌었다.
작전의 규모는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오히려 공작이 크고 소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가 설계한 밑그림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말년에 이르러 그는 ‘위대한 설계자’라는 명칭을 얻으며, CIA의 전설로 등극할 수 있었다.
작전의 설계, 그 분야에 있어서 감히 그를 따를 수 있는 자가 없었다.
그런 그가 은퇴를 얼마 남겨두지 않았을 무렵, 극동아시아 한국에서 심상치 않은 조짐이 일어났다.
“노트북용 CPU?”
“그래, 이번에 맥플에서 자사 제품에 탑재할 반도체 부품인데, 맥플이 권리를 갖고 있네.”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나?”
실무를 총괄하는 부국장의 설명에 실바토르는 의아함을 나타냈다.
“문제는 그 성능이 지나치게 뛰어나다는 거지. 윈텔이 공개하지 않은 최신형 제품과 비교할 수 없는 성능 차이가 있네.”
실바토르는 그제야 태도를 고쳐 앉으며, 부국장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윈텔은 컴퓨터용 CPU에서 자타공인 세계 최강, 그런 윈텔의 미공개 최신 제품보다 더 뛰어난 성능을 지닌 CPU가 만들어졌다고? 그것도 다른 사람 손에서?
맥플이 자체 개발했다면 별 문제는 안 된다. 맥플 역시 미국 기업이니까.
그러나 CIA는 맥플이 그럴 능력이 없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맥플에서 자체 개발한 것도 아니야. 원형은 맥플 제품이긴 한데, 그 설계를 뜯어고쳐서 전혀 새로운 성능의 제품으로 탄생시켰지.”
“최종적으로 설계를 고친 주체가 누군가?”
“바로 한국의 H반도체일세. 정확히는 입사한지 얼마 안 된 직원이지.”
“직원 혼자서? 설마.”
“그 설마가 맞네.”
실바토르는 한국지부가 조사한 ‘비글 반도체’의 개발자 인적 사항을 확인했다.
“너무 젊군.”
“귀화를 제안하면 어떨까? 받아들이겠나?”
“지난 행적을 보면, 가능성은 있지만 확실히 장담하기는 어렵겠군.”
“몇 퍼센트?”
“30% 정도, 설득이 실패할 가능성일세.”
성공률 70%, 적은 수치는 아니다.
그러나 작전의 성격상 한 번 실패하면 두 번을 제안하기 어렵다는 위험성이 있었다.
부국장은 의외의 제안을 했다.
“이 친구, 자네가 한 번 맡아보겠나?”
“내가?”
실바토르는 탐탁지 않은 듯이 반문했다.
자신은 지금까지 대 국가 공작만을 맡아온, 위대한 설계자다. 고작해야 인재 하나를 자국민으로 영입하는 작은 작전을 도맡아야 하다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은퇴하기 전 소소한 일거리 하나 맡는다 생각하게.”
“별로 마음에 들진 않지만…… 알았네.”
언제나 큰 작전의 총괄 구상만을 맡아왔다.
겨우 인재 하나를 관리하는 공작에 실바토르는 성이 차지 않았으나, 상사이자 친우인 부국장의 말대로 자신은 이제 은퇴가 얼마 남지 않았다.
소소한 머리 식히기 용으로는 괜찮을 것이다.
“대신 내 마음대로 즐겨도 되겠지?”
“아무렴. 국익에 해가 되지 않는다면 뭔들 못하겠나.”
실바토르는 그렇게 한서진 영입 공작을 맡게 되었다.
그가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건 사실이나, 미국이라는 대국 입장에서는 그 한 명 때문에 호들갑을 떨 정도는 아니었다. 차차 그를 알아가면서, 그가 진정으로 미국에 도움이 될 인물인지 아닌지를 검증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를 관찰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실바토르는 자신이 소소한 일을 맡은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반도체에 문외한인 자신이 보기에도 대단한 천재였다.
더 놀라운 것은 아무도 봐주지 않는 진흙탕 속에서 홀로 뿌리를 내려 꽃을 피워냈다는 사실이다.
「반드시 미국인으로 만들어야 할 인재.」
계획의 명제는 그렇게 바뀌었고, 그는 미국과 친밀하고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는 모든 사업 기반을 미국에 두고 있었으며, 한국에서는 거주와 생활만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언젠가 미국으로 이민을 올 듯한 준비를 하는 듯이 보였다.
그래서 CIA는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그를 지켜보는 쪽으로 노선을 선회했다.
굳이 서두르지 않아도 그가 미국인이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어 보였으니까. 다만 시간이 걸릴 뿐이었다.
그 무렵 실바토르는 이제 은퇴를 코앞에 두고 있었다. 소소한 일거리를 더 이상 진행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에 깊은 아쉬움을 느끼며, 그는 CIA와 조국, 그리고 한서진을 위해 마지막 밑그림을 설계했다.
바로 한서진을 진정한 미국인으로 평온히 품을 수 있는 대작전, 자신이 CIA를 떠난 뒤에도 수많은 변수와 시나리오에 대응할 수 있게끔 그려낸 스케치.
그것이 바로 ‘여명의 빛 작전’, 그가 조국에 마지막으로 남긴 선물이었다.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습니다.”
배경 설명이 끝나자 페이 차일드는 굳어진 눈빛으로 실바토르를 주시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모를 만도 하지. 최상위층만 아는 극비 중의 극비니까.”
“대관절 어떤 작전인가요?”
“간단히 말하자면, 한서진 박사를 둘러싼 CIA와 미국의 모든 움직임은 여명의 빛의 하위 계열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네.”
“모든 움직임이요?”
“그렇다네. 비글이 만들어지고나서부터 최근까지 모든 움직임. 내 계산대로라면 한서진 박사가 미국 명예시민권을 받을 때까지 여명의 빛이 지속되었을 걸세.”
“…….”
비글이 만들어질 무렵이면, 미국이 한서진을 막 주시하기 시작한 때 아닌가. 그때부터 행해진 모든 움직임이 ‘여명의 빛’의 통제를 받고 있다고?
페이 차일드는 오싹 소름이 끼쳤다.
“명예시민권 수여 역시 여명의 빛의 하위 작전에 포함되어 있었단 겁니까?”
“내가 설계한 여러 시나리오 중의 하나였네. 그밖에도 다양한 변수와 경우의 수를 따져서, 그때그때 최선의 선택지를 골라 갈 수 있게끔 밑그림을 그렸지.”
페이 차일드는 퍼뜩, 실바토르가 조금 전에 했던 말을 상기했다. 그는 분명히 말했다. ‘자기 계산대로라면.’이라고.
“여명의 빛이 아직 종결하지 않은 겁니까?”
“난 은퇴했으니 이제 확인할 길은 없네만, 아마도 그런 것 같네. 원래라면 한서진 박사가 명예시민이 되는 순간 작전은 종지될 운명이었어. 왜냐하면 더 이상 작전이 지속될 필요가 없으니까.”
한서진을 보호 및 감시하고, 온전한 미국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작전. 실바토르가 미국을 위해 마지막으로 그려준 큰 그림.
그러나 그가 남긴 최후의 설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여명의 빛은 단순히 방대하고 은밀한 첩보 공작이 아닐세. CIA라는 훌륭한 도구를 이용해, 내가 첩보를 예술의 단계까지 승화시킨 걸작이라 할 수 있지.”
과거를 회상하는 실바토르의 눈빛은 어느새 깊은 추억에 잠겨 있었다.
“여명의 빛을 수립하기 위해, 나는 먼저 CIA가 지닌 모든 자원을 체계화했지. 자산, 권한, 성공 및 실패 업적, 전 세계에 보유한 지부 및 모든 요원들의 성향과 능력까지……. 그 모든 것을 수치화해서 데이터로 만들어냈네.”
“…….”
“그 데이터를 토대로 만들어진 여명의 빛은 CIA 전체 부서와 요원들이 조금씩 잘게 쪼개진 권한과 책임을 수행함으로써 진행되네. 물론 하위 책무를 맡은 이들은 그게 여명의 빛이라는 큰 그림을 구성한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네.”
“……그 정도입니까.”
“일례를 들자면 수없이 많은 매뉴얼을 설정하고, 모든 작전에 그 매뉴얼을 조금씩 개입하는 식으로 작전이 진행되지. 그리고 그 최종 스위치는 부국장, 오로지 그 한 명만이 쥐고 움직일 수 있고. 즉 여명의 빛은 한서진 박사 한 명만을 위한 거대한 매뉴얼이라고 정의할 수 있네.”
너무 방대하기에 오히려 개개 요원들이 그 실체를 알지 못할 수밖에 없다. 코끼리를 눈 바로 1cm 앞에서 보게 되면, 그 전체 모습을 볼 수 없듯이.
페이 차일드의 안색이 더 짙게 바뀌었다.
“부국장님은 작년에 은퇴하셨습니다.”
“여명의 빛은 수많은 매뉴얼 지침을 잘게 쪼개 각 부서와 요원들이 운용하게끔 구성되어 있네. 최종 통제를 맡은 머리가 사라진다면 당연히 중지되어야 하지만…….”
“누군가가 그 스위치를 대신 쥐었거나, 아니면…….”
“매뉴얼 그 자체가 생명을 얻어 살아 움직이고 있을 수도 있겠지. 물론 비유일세.”
페이 차일드는 가볍게 소름이 돋았다.
가능성의 하나일 뿐이지만, 작전 매뉴얼 그 자체가 생명을 얻어 스스로 움직일 수 있다니?
눈앞의 노인이 어째서 전설의 설계자로 존중받았는지 이해될 것 같았다.
“이해되지 않습니다. 여명의 빛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한서진 박사를 온전한 미국인으로 끌어들이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그 작전이 그에게 테러를 가하다니요?”
“이미 오래 전 나의 손을 떠난 일일세. 본질은 변하지 않았을지언정, 여기저기 찌꺼기가 끼고 녹이 슬어 변형됐을 가능성이 농후하네. 사람도 나이를 먹으면 육체가 쇠하고 맛이 가는데, 첩보 공작 매뉴얼이라고 그렇지 않겠나? 더군다나 불특정 대다수의 실행과 책임의 조합으로 형성된 작전이?”
페이 차일드는 ‘작전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라는 말에 주목했다.
“누군가가 스위치를 이어 받았든, 매뉴얼이 스스로 움직였든, 한 박사를 해할 목적은 아니었을 거라는 뜻입니까?”
“자네의 설명을 들으면서 느낌을 받았네. 헬기 추락은 어쩌면 테러가 아니라 사고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게 테러가 아니라 사고? 일반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 지적이다. 다른 이들이라면 실바토르가 은퇴한 지 오래 돼서 드디어 감이 녹슬었다고 비웃었으리라.
그러나 페이 차일드는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녹이 슬기는커녕, 여전히 현역의 섬뜩한 감각을 유지하고 있음을.
‘헬기 추락은 여명의 빛의 잔재 때문에 일어난 일…… 그러나 그게 한서진 테러가 아닌 다른 목적에서라면…… 그리고 뜻하지 않은 사고가 섞인 거라면…….’
그 가능성을 확인해야만 한다. 그것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었다.
“신임 부국장을 조사해야겠군요.”
“1차적으로는 그렇지. 하지만 그는 여명의 빛의 존재 자체를 모를 수도 있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스위치를 눌렀다는 겁니까?”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접근하란 말이지. 일단 은퇴한 전임 부국장부터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알아보게.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더 이상 해줄 말은 없을 것 같군.”
“귀중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페이 차일드는 정중히 인사를 올리고 돌아섰다.
운전대를 잡은 그의 눈빛은 오랜만에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훌륭한 공작 전문가가 남긴 선물, 그것은 한서진을 평화로운 절차를 통해 미국인으로 만들어줬지만, 지금은 좀비처럼 죽지 않고 조국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만약, 정말로 테러가 목적이 아니라면…….’
페이 차일드는 말도 안 되는 가설을 떠올렸다.
한서진이 아니라 ‘그의 헬기’에 테러 위협을 가하는 게 목적이라면, 다만 조율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그런 무서운 비극이 일어날 뻔한 ‘사고’라면?
여명의 빛 그 자체, 혹은 실행자가 진정으로 노린 것은 한서진의 목숨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가?
‘한 박사가…… 화폐 자본가들을 쓸어버리도록 동기와 명분을 부여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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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바토르, 이런 빅 엿을 남기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