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453화 (453/609)

00453  배후는 어디에  =========================================================================

“죄송합니다. 상대가 너무 교활했습니다.”

페이 차일드는 머리를 숙이며 사과의 뜻을 나타냈다. 한서진은 더 이상 탓하지 않고, 자초지종을 물었다.

“누가 절 노린 겁니까?”

“정황상 테러인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다만 누구인지는 아직 알아내기 어렵습니다.”

“한미 합동 정비단의 눈까지 속일 정도면, 어지간한 상대는 아니겠군요.”

“죄송합니다.”

1차 원인은 로터 자체의 불량이었다. 그러나 그 불량성은 크게 눈에 두드러지는 편은 아니었다. 적어도 안전기준을 미달하지는 않았으니.

2차 원인은 오래 된 윤활유가 사용되었고, 일부가 협착 현상을 일으키면서 동력을 전달하는 회전 과정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 때문에 출격하고 30분이 넘어가면서 급격한 마모 현상이 일어났고, 기체에 전해지는 부담이 가중되었다.

그리고 3차 원인은 윤활유를 주입한 정비사의 과실이었다. 물론 그 과실은 그리 크지 않았다.

“정비사는 늘 썼던 윤활유를 사용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을 입증할 방법이 없습니다.”

“정비사가 매수된 겁니까?”

“가능성이 없지 않습니다만, 현재로서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정작 정비팀 내부에서 진짜 매수된 사람은 다른 이일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렇다면 그 정비사는 다만 이용당했을 뿐이라는 말이 됩니다.”

“…….”

“이렇게까지 치밀하게 준비한 녀석들이 허술하게 들킬 이를 매수하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어쩌면 매수된 게 아니라, 녀석들의 하수인이 처음부터 입사한 걸지도 모릅니다.”

“CIA의 선별 검증도 크게 철저하진 못하군요.”

“죄송합니다. 모두 저희 불찰입니다.”

그러나 계속된 조사 결과, 위협의 흔적은 단지 그 세 가지가 전부가 아님이 밝혀졌다.

전수 조사 결과 교묘한 불량 기준을 지닌 부속품의 공급 및 납품, 입찰이 오랫동안 이뤄진 게 확인되었다. 다만 검증 과정에서 기준 조건에 미달되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탈락시켰을 뿐이었다.

그냥 불량 부품이 몇 개 섞여서 들어온 거라 여기고, 큰 문제로 삼지 않았던 것이다. 어차피 반품시켜버렸으니까.

하지만 그런 불량 부품의 공급 과정이 특정한 악의를 가지고 이뤄진 거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부품 공급 외에 다양한 분야에서 취약점을 만들기 위한 시도가 확인되었다. 마찬가지로 명백히 범죄 의사를 입증하기에는 모호한 것들이었다.

추가 보고를 받은 한서진은 풀썩 웃었다.

“99,999개의 총알까지 잘 막아내다가, 딱 하나를 미처 막지 못하고 흘린 셈인가요.”

“…….”

“99,999개를 잘 막아봐야, 마지막 한 발을 놓치면 어차피 결과는 똑같지요. 안 그런가요?”

한서진이 중얼거리듯이 묻자 페이 차일드는 할 말이 없는지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아무튼 형체는 있는데 실체는 없다는 거군요.”

“예, 그렇습니다.”

“웜홀 이론 때문이겠지요?”

한서진의 조용한 물음에 페이 차일드는 쓴웃음을 짓고, 천천히 끄덕였다.

“아마 그럴 거라고 추정됩니다.”

“…….”

“너무 큰 걸 터트리셨습니다. 저들이 도저히 인내할 수 없을 만큼 말이지요.”

한서진은 국제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만큼, 도처에 많은 적을 두고 있다. 그 적들의 대부분은 한서진 때문에 많은 것을 잃은 이들이다.

에테르 반도체로 컴퓨터 시장을 휘어잡았으며, H시리즈로 제약 회사에 큰 피해와 경계심을 안겨 주었다. HAMC로 희토류 금속을 독점했으며, 금 소행성으로 AU권을 발행하여 연방은행을 쥐고 있는 화폐 자본가들을 밀어냈다.

많은 이들이 한서진과 손을 잡고 사업적인 면에서 만족스러운 이익을 얻었으나, 그 이상 가는 이들이 한서진 때문에 치명적인 출혈을 감당해야 했다.

그전에도 한서진을 적대하고자 하는 기도는 있었지만, 웜홀 이론은 그들에게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절박함을 안겨 주었다.

비단 물류를 빼앗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세계 경제와 문명의 패러다임 자체가 뒤바뀌어 버린다. 벼랑 끝으로 밀어낸 것이 아니라, 아예 밖으로 밀쳐 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아마 준비는 꽤 오래 전부터 해왔을 겁니다. 다만 그 과정이 치밀하게 분산돼 있어 발견되지 않았을 뿐이지요.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뽑기 위해 방아쇠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던 겁니다.”

“웜홀 이론 공개가 그 결정적인 순간이었나 보군요.”

“그들에게는 더 이상 용인할 수 없는 변화였을 테니까요. CIA는 그렇게 추정하고 있습니다.”

“누군지 찾을 수 있습니까?”

“중간 하수인 정도는 찾을 수 있겠습니다만, 머리를 찾는 것은 힘듭니다. 찾는다 하더라도 유효한 증거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겁니다.”

자신 때문에 많은 손해를 봤고, 또 앞으로 많은 손해를 보게 될 사람들, 혹은 기업, 혹은 단체나 국가.

짚이는 바가 너무 많아서 한서진은 쓴웃음만 지었다.

‘타르타로스는 이게 아쉽네.’

디지털의 세상에 있는 모든 정보는 수집, 취합, 분석이 가능하다. 거의 신에 버금가는 정확성으로.

하지만 아날로그로 이뤄진 것은 까막눈이나 다름없다.

“러시아,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한국…… 우리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조사할 겁니다.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미국이 빠졌습니다만.”

“……미국 역시 철저히 수색할 겁니다.”

웜홀 등 한서진의 연구 때문에 몰락을 앞두고 있으며, 그를 위협할 만한 힘을 지닌 자들이라면, 오히려 미국 내에서 찾는 게 더 정확하지 않을까.

“그리고 신효진 양 말입니다만…….”

“효진 씨는 왜 그러십니까?”

“본국에서 여러 가지로 생각이 많은 것 같습니다. 박사님의 고견을 청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미국을 방문하겠습니다. 적어도 열흘 안에.”

“감사합니다.”

페이 차일드는 화색을 띠었다. 직접 방문하겠다니, 미국 입장에서는 상당히 좋은 신호 아닌가.

「기축화폐를 빼앗기고 어지간히 분했던 모양이다.」

정지원은 이번 사태의 배후에 화폐 자본가들이 있다고 단정을 짓고 있었다.

미국 정비팀의 눈마저 속일 정도로 치밀하고 은밀하게, 그리고 오랫동안 꾸준히 공작을 할 만한 동기와 능력이 있는 자들은 그들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일을 벌일 만한 놈들은 그놈들 밖에 없어.」

“그쪽과 우리는 강화 협정을 맺은 게 아니었나요?”

로스차일드와 록펠러 등 달러발행권을 쥐고 있던 초거대 화폐 자본 세력은, 한서진의 반격을 맞고 휘청거렸다. 결국 대형 은행 두 개를 국유화하고, 7인의 연준위 이사 중 4인을 미정부 입맛대로 골라 앉힐 수 있게 되었다.

그 대가로 크리스 대통령은 정회원, 즉 그들의 서클로 들어갈 수 있었고 한서진과는 사실상 강화 조약을 맺었다. 물론 그에 관해 서로 논의를 한 적은 없지만.

「강화 조약이란 언제든 깨버릴 수 있는 거지. 그 탐욕스러운 놈들이 그런 손해를 보고도 영원히 참을 거라 생각한 적 없다. 게다가 웜홀 이론이 실생활에 상용화되면 그놈들에게는 이제 훗날의 기회조차 없어지는 셈이야.」

“어쨌거나 정 회장님은 화폐 자본가들이 그랬다고 생각하신다는 거군요.”

「달리 없지. 안 그래?」

정지원은 노기를 조금 누그러뜨리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CIA 내에서도 분명 그놈들 편을 드는 것들이 있을 거다. 틀림없어.」

“CIA까지…….”

「CIA 정도 되는 정보기관을 움직이지 않고서야, 너를 상대로 이런 공작을 벌인다는 건 불가능해.」

한서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정지원의 말은 충분히 논리적이었다.

「나도 나름대로 알아보겠어. 그리고 조심해. 당분간 항공기는 타지 말도록 해.」

“이미 미국에 간다고 약속했습니다만.”

「지금 이 시기에? 그냥 미뤄.」

“괜찮습니다. 테러 직후이니만큼 오히려 더 철저히 점검할 테니까요. 그리고 지금 꼭 미국에 가야 합니다.”

「무슨 일인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말씀드리죠.”

신효진의 변화를 모르는 정지원으로서는 왜 이 시기에 급히 방미하겠다는 건지 납득이 안 될 수도 있었다.

몇 번 더 말리다가 포기한 정지원은 간곡히 부탁했다.

「그럼 철저히 수색해. 녀석들이 또 일을 벌일지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셀럽으로 산다는 건 참 고달픈 일이군요.”

「원래 테러 위협 정도는 몇 번쯤 당해줘야 진정한 셀럽이라고 할 수 있지. 안 그래?」

둘은 마지막은 가벼운 농담으로 통화를 마무리했다.

“별 일 없을 겁니다. 안심하세요.”

한서진은 신효진을 대동한 채, 전용기를 타고 미국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무릎 위에 살포시 두 손을 올려놓으며,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않아요. 박사님 말씀대로라면 저는 기계화 사단이 와도 끄떡없다는 거잖아요? 무슨 일이 생기겠어요?”

“……그런 의미는 아니었습니다만.”

정치적으로 복잡한 문제는 생기지 않을 거다, 그런 의미에서 한 말인데 신효진은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녀 나름대로 각오를 굳히고 있다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감이 넘쳐흐르는 것인지.

한서진은 공식적으로 크리스 대통령을 만났다.

크리스는 미 대통령으로서 한서진을 환영하면서도, 크리스 개인으로서는 어딘지 떨떠름한 기색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하는 태도로 맞이했다.

그 미묘한 표정의 간극을 생생하게 잡아낸 사진이 뉴스 헤드라인을 점령했고, 크리스의 속내 분석을 놓고 온갖 애널리스트들이 다양한 분석을 내놓았다. 미 여론이 불타올랐음은 물론이다.

공식 일정이 끝나고, 한서진과 크리스 대통령 둘만이 비공개 독대 자리가 마련되었다.

“연기에 물이 오르셨군요.”

“미 대통령이라면 표정 관리에 능숙해야 하지요.”

크리스는 아까와는 전혀 다른 표정으로 악수를 청했다.

미묘한 감정의 간극, 그것은 크리스가 정회원으로 있는 ‘서클’의 멤버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쇼였다.

서클과 한서진은 서로 불편한 관계고, 크리스는 그런 서클의 지원으로 대통령이 되었으며 이제 정회원이므로.

“서클의 짓입니까?”

한서진이 대뜸 묻자 크리스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현재 조사 중입니다.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서클은 동기가 차고 넘치지요. 그럴 능력도 충분하고요.”

“인정합니다. 저 역시 속마음으로는 서클을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있습니다. 다만…….”

“다만?”

“서클은 공동정범 중 하나가 아닌지, 그 가능성도 놓지 않으려 합니다.”

“…….”

“웜홀 이론으로 큰 손해를 입을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어야지요. 당장 국제 물류 시장만 해도 어마어마합니다. 그것들 모두가 사라지거나 재편되는 겁니다.”

“저는 웜홀의 포괄적 실용화를 굳이 당장 실행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만.”

“박사님은 그렇게 생각하시겠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여기지 않습니다. 실용화가 언제든 가능하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위협입니다.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공포지요.”

“…….”

한서진이 잠시 말이 없자, 크리스는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슬그머니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신효진, 그 분을 데려오셨더군요.”

“아, 무력시위입니다.”

============================ 작품 후기 ============================

암, 테러 정도는 당해줘야 진정한 셀럽이라 할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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