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50 잠겨버린 꿈 =========================================================================
한서진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어깨와 등이 뻐근하다. 벌써 몇 시간째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밖을 내다보니 어느새 밤이 깊었다. 그는 팔을 높이 들어 올리며 기지개를 켰다.
“피곤하신 것 같은데, 그만 주무시는 게 어때요?”
송하나가 뒤에서 어깨를 주무르며 물었다.
“아직은 괜찮아.”
“요즘 너무 과로하시는 거 같아요. 그러다가 건강이라도 축 나면 어쩌시려고 그래요.”
“나 아직 쌩쌩하거든?”
한서진은 과장스러운 제스처로 자신의 건재함을 어필했다.
송하나는 가만히 바라보다가 어깨를 작게 으쓱했다.
“하긴, 오빠가 언제는 안 그랬나요.”
“내가 뭘?”
“매일 일일일, 일만 하시잖아요. 저랑 놀아주시진 않고.”
한서진은 괜히 찔려서 시선을 피했다.
그러고 보니 송하나와 단둘이 여행을 갔던 게 언제더라? 잘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니 까마득한 게 틀림없다.
‘내가 얘를 너무 방치했나?’
한서진은 속으로 반성하며, 그녀의 손을 쥐었다.
“이거까지만 하고. 그리고 잠깐 쉬자. 어디 여행이라도 갈까?”
“해본 말인데, 되게 예민하게 반응하시네요?”
그녀는 팔짱을 끼며 피식거렸다.
“됐어요. 실은 저도 요즘 컨설턴트랑 감시TF 때문에 바빠요.”
“네가 고생이 많네.”
“괜찮아요. 다 우리 좋자고 하는 일인데요.”
그녀는 사뿐히 다가와 그의 무릎 위에 앉았다. 적당한 무게감이 기분 좋게 무릎을 압박하며, 길고 늘씬한 두 팔이 목을 감싸 안아온다.
기분 좋은 체향에 흐뭇해하며 얇은 허리를 감싸는데, 기습처럼 그녀가 속삭였다.
“근데 오빠.”
“응.”
“저번에 효진 씨, 왜 운 거예요?”
딸꾹. 딸꾹.
신효진은 초점이 흐릿한 눈으로 모니터를 주시하며, 홈 화면 스크롤을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인터넷 기사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기사의 내용은 대부분 웜홀과 그로 인한 세상의 변화 추이를 예단하는 호들갑이 대부분이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맺히자, 그녀는 얼른 손수건을 들어 닦아냈다.
‘리온…….’
벌써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레노지안은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화려한 스칼린의 삶도, 아서 왕과의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사랑도, 마치 한바탕 꿈처럼 모든 게 사라져 버렸다. 아니, 어차피 처음부터 모든 게 꿈이었을까.
「찾고 있습니다. 반드시 찾을 겁니다. 레노지안이 어디에 있는지를.」
한서진의 굳은 약속이 귓가를 울렸다.
「찾아내기만 하면 웜홀을 이용해 그곳에 건너갈 수 있습니다. 그럼 레노지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겠죠.」
신효진이 본 최후의 성전은 머나먼 미래의 일이다. 레노지안에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둘 모두 그렇게 믿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괜찮다고, 문제가 없다고.
그때였다.
―끼이익!
―쾅!
―꺄아악!
무언가 둔탁한 물체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연달아 들렀다. 사이사이에 날카로운 고함과 비명도 섞여 있었다. 곧 이어 뭔가가 폭발하는 굉음이 뒤따랐다.
그것들이 들린 것은 약 수초가 되지 않는 아주 짧은 시간, 신효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뭐야?’
동료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하고 있었다. 신효진은 당황스러웠다.
분명히 무슨 소리가 들렸다. 가까운 곳은 아닌 듯했지만, 확실히 구분할 수 있을 만큼 선명했다.
“저기…… 무슨 소리 안 들렸어요?”
“네? 무슨 말씀이세요?”
“소리요? 웬 소리요?”
“그러니까…… 뭐가 서로 부딪치고 사람들 비명 지르고, 어디 사고라도 난 것 같았는데. 아무도 못 들었어요?”
여직원들은 서로 고개를 마주보고 갸웃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저는 아무 소리도 못 들었는데요.”
“저도요.”
여직원들 모두가 입을 모아 못 들었다고 하니, 신효진은 자신만 이상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그녀는 갸웃거리다가 풀썩 웃어버렸다.
‘내가 많이 예민해졌구나. 환청도 다 듣고.’
일시적인 착각이겠지, 하고 그녀는 잊고 넘어갔다.
오후가 되자 외근을 나갔던 여직원 두 명이 비서실에 들어섰다. 그들은 뭔가 잔뜩 흥분한 기색이었다.
“소식 들었어요?”
“소식? 무슨 소식이요?”
“저기 P사거리에서 웬 미친놈이 차 몰고 질주하다가 대형 교통사고 냈대요. 사람 이십 명 넘게 죽고, 그 미친놈도 같이 죽었대요.”
P사거리라는 말에 다들 뒤집어질 듯이 놀랐다. 그들이 회사 출퇴근시 대부분 지나치는 길목이기 때문이었다.
“어머나, 어쩌다가 그렇게 많이 죽었대요? 아무리 대형 사고라지만…….”
“그 미친놈이 트레일러 몰고 달렸으니까요. 그 큰 차를 끌고 작정하고 밟았으니, 얼마나 사고가 커졌겠어요.”
“세상에.”
여직원들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특히 신효진은 새하얗게 탈색돼 있었다.
‘잠깐만.’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사고…… 정확히 언제 일어난 일이에요?”
“언제더라…… 1시 20분쯤이었나? 재연 씨, 맞지?”
“네, 맞아요. 대충 그쯤이었던 것 같아요.”
신효진은 심장이 떨어질 듯이 놀랐다. 확신할 수 없지만, 아까 자신이 환청을 들은 시간도 그와 비슷했던 것 같다.
그녀만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닌지, 함께 일하고 있었던 여직원 한 명이 조심스레 말했다.
“1시 20분이면…… 아까 효진 씨가 뭐 이상한 소리 들었다고 말한 그때 아니에요?”
“맞아요. 대충 그때 맞는 거 같은데.”
“어디 사고라도 난 거 아니냐고 하셨어. 세상에나.”
아까 그 이야기를 나눴던 여직원들은 입을 가리며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P사거리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얼만데…… 사람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나?”
“어우, 소름.”
여직원 한 명이 닭살이 돋는다는 듯이 팔을 껴안았다.
모두, 심지어 신효진 본인의 심정까지도 대변하는 제스처였다.
그녀는 멍하니 허공을 주시했다.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었어?’
그 먼 거리에서 난 소리가 이곳까지, 그것도 실내인데도 들렸다고? 더군다나 자신에게만?
“좀 괜찮아졌어요?”
한서진이 잔 세 개를 나란히 놓으며 물었다. 신효진은 쑥스러워서 고개를 숙이며, 조그맣게 대답했다.
“이제 조금 나아졌어요.”
“다행입니다.”
“박사님 하시는 일은 잘 되어가세요?”
“아직 단서를 찾는 중입니다. 쉽게 포기하진 않을 겁니다. 레노지안은 저에게도 매우 특별한 곳이니까요.”
한서진은 희미한 조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레노지안이 아니었다면 전 이렇게 특별한 삶을 누리지 못했을 겁니다. 아니, 벌써 오래 전에 암으로 죽었겠죠.”
“저 역시 그래요. 레노지안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못 살았을 테니까요.”
신효진은 과거를 떠올리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내일의 희망이라고는 없는, 하루하루 포기와 상실에 찌든 초라한 근로자의 삶.
그러던 어느 날 맞이하게 된 레노지안의 세상은 힘든 하루를 잊을 수 있는 활력소가 되어 주었다. 나아가 지금의 안락한 삶을 누리게 해준 행운의 네잎 클로버였다.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없을까요?”
“죄송하지만, 현재로서는…….”
미안한 대답에 신효진은 살짝 침울해졌다.
레노지안의 꿈을 꾸지 못하는 자신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게 우울했다.
“레노지안에 부디 무슨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저도요.”
잠시 어두워진 분위기 속에서 아무 말도 없는 사이, 활기찬 송하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두 분, 왜 그렇게 말이 없어요?”
“아, 하나 씨.”
“이제 왔어?”
둘은 어색한 미소로 송하나를 맞이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한서진의 옆에 앉으며 둘을 번갈아 살짝 흘겼다.
“뭐예요? 저 없는 동안 둘이 썸이라도 탔어요?”
“그런 거 아니야.”
“절대 아니에요!”
둘이 기겁을 하고 부정하자 송하나는 장난스럽게 혀를 가볍게 찼다.
“그냥 장난인데 왜 이렇게 진지하게 반응하실까? 설마 제가 제대로 넘겨짚은 건?”
“그런 장난은 숨 떨려.”
“맞아요, 하지 마요. 하나 씨.”
신효진은 괜히 찔려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도 살짝 가라앉아 있었던 분위기가 다소 밝아졌다.
“우리 재미있는 이야기 해요. 이렇게 가라앉아 있지 말고.”
송하나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이끌었다. 한서진과 신효진도 어느새 레노지안에 관한 시름을 잊고, 즐거운 담소의 흐름에 빠져들었다.
“화보 하나 찍는 건 어때요? 테마는 ‘신효’의 복귀, 중박 이상은 터트릴 것 같은데.”
“전 이제 모델 같은 거 못할 것 같아요. 가끔 주변에서 알아보고 물어보실 때마다 창피해 죽겠어요. 그때는 진짜 무슨 생각으로 카메라 앞에 섰는지 몰라요.”
신효진은 부끄러운 듯이 뺨을 감쌌고, 송하나는 키득거리며 놀려댔다.
“무슨 말씀이세요. 카메라 앞에만 서면 다른 사람 같았다고 스튜디오에서 칭찬이 자자했어요. 우리 백화점 실무진에서도 효진 씨를 다시 봤다고 했고요. 효진 씨 모델 그만 두고 관계들이 얼마나 아쉬워했는지 알아요?”
“나도 효진 씨 다시 복귀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아예 배우를 해보는 건 어떨까?”
“오빠도 그렇게 생각하죠? 효진 씨가 딱 배우 마스크라니까.”
“박사님까지 왜 그러세요.”
신효진은 창피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럴수록 두 커플은 계속 자신을 놀려댔다. 진담이 듬뿍 섞여 있다 보니 장난이 심하다고 기분 나빠할 수도 없다.
“두 분 다 그만……!”
말을 하다 말고 순간 신효진은 멈칫했다.
그녀의 표정이 창백하게 굳은 걸 확인한 송하나의 미소도 덩달아 풀어졌다.
“효진 씨, 제가 장난이 너무 심했나요? 저는 진짜 효진 씨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이 소리 안 들리세요? 두 분?”
“네? 무슨 소리요?”
송하나와 한서진은 의아해서 서로 마주 보았다. 갑자기 신효진이 왜 저러는지 의아했다.
‘이게 안 들린다고?’
신효진은 뭐에 홀린 듯이 멍하니 둘을 응시하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소리가 나는 방향의 창문을 덜컥 열어젖혔다.
창이 열리며 외부 바람이 쏟아져 들어오자, 소리도 더욱 또렷해졌다.
“정말 안 들리세요? 두 분 다?”
“효진 씨,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요.”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립니까?”
한서진도 굳은 표정으로 다가와서 옆에 섰다.
그는 열심히 귀를 기울였지만, 바람 소리 외에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신효진은 창밖 먼 곳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설명하기 힘든 신기한 감각이 솟아올랐다. 시야가 넓게 확장되며, 눈앞에 펼쳐진 모든 풍경이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이 쏟아져 들어온다.
수백 미터 밖 인도에서 걷는 행인들의 시계 초침까지도 분명하게 보인다.
누군가와 전화하는 이, 그리고 수화기에서 나오는 통화 상대방의 목소리까지, 도심의 온갖 소음을 뚫고 선명하게 들린다.
모든 풍경, 소리의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터질 듯이 뛰기 시작했다.
이 감각, 느껴본 적이 있다. 그것도 셀 수도 없이 많이.
다만 ‘신효진’의 몸으로는 처음이라, 마치 낯선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어느 한 곳을 가리키며, 한서진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저기서…… 사고가 난 것 같은데요.”
============================ 작품 후기 ============================
실탄이... 연참을 안 한 것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