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49 잠겨버린 꿈 =========================================================================
국제 투자 시장은 한서진의 지배하에 있다는 말이 있다. 월가에서는 농담 반 진담 반처럼 받아들여지는 격언이다.
추정치의 차이는 있겠으나, 한서진이 투자 시장에 커다란 주요 변수라는 것은 투자 전문가들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한서진의 영향력을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했던 이들도, 이제는 그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국제 투자 시장은 오롯이 한서진의 뜻에 귀속되어 움직이게 되었다고.
“한서진은 합법적으로 주가를 조작할 수 있는 브로커다.”
월가의 유명 투자자, 크렘 회장이 사석에서 농담처럼 한 말이다. 그는 월가에서 유일하게 SJ인더스트리의 지분을 갖고 있는 주주이기도 했다.
그는 갖고 있는 SJ인더스트리 지분 10.5%만으로 이미 미국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대부호였다. 그런 이가 한서진을 합법 주가 조작 브로커나 다름없다고 하니, 자연히 뜨거운 반응이 그 뒤를 따랐다.
“웜홀 실용화는 전 지구를 하나로 묶을 것이고, 우리가 지금까지 전혀 상상하지 못한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는 것을 뜻합니다. 엄청난 변화의 바람이 불어올 겁니다. 일단 항공, 선박 관련 회사 주식부터 정리하기를 권합니다. 정리할 수 있다면 말이죠.”
크렘 회장의 뼈아픈 농담처럼, 항공, 해운 등 운송 관련주는 이미 바닥을 치고 있었으며, 거래 자체가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망할 게 뻔히 보이는 주식을 어느 누가 사겠는가.
“웜홀 실용화가 뿌리내린다면 적어도 항공기와 선박이 화물을 수송하거나 단순히 목적지로 이동하기 위해서 쓰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일반 소비자나 기업이 관광 외의 목적으로 항공기와 선박을 이용하려 할까?”
“철도도 마찬가지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이동할 수 있는데 누가 3시간 가까이 걸리는 KTX를 타고 이동하려 하겠나?”
“나라 전체에 100미터마다 웜홀을 설치하지 않는 이상, 자동차는 근거리 이동 수단으로서 살아남을 순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동차 시장 축소는 피할 수 없다. 지금 당장 미래자동차 주식을 팔아치워 버려라.”
진정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기대감이 전 지구를 휩쓸었다. 지구 반대편으로 이동하는데 눈 깜짝할 사이, 몇 걸음만 이동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웜홀 시스템 구축의 구체적인 내용이었다.
어떤 방식으로, 어느 정도 규모로 웜홀 시스템을 갖추느냐에 따라 시장이 감당해야 할 충격의 크기와 종류도 전혀 달라진다.
“웜홀 실용화는 언제든지 가능하지만, 아직 구체적으로 사업을 추진할 계열사가 정립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테러 등 안보에 관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도 논의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각국 정부와의 협의도 마쳐야 합니다.”
기술은 이미 완성됐다. 언제든지 적용 가능할 만큼.
그러나 부차적인 문제나 갈등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테러범이 외국 수도로 폭탄을 들고 잠입하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는가?
웜홀 이용으로 발생하는 이익을 해당 국가와 어떤 식으로 나눠야 하는가?
이에 평소 성격 급하기로 유명한 프랑스 대통령이 꽤나 강경한 논조를 펼쳤다.
“웜홀은 대체 불가능한 훌륭한 이동 수단이지만, 그로 인해 자국 운송업이 큰 타격을 입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 손실을 보전하기 위해서라도 웜홀 설치를 수용하는 국가는 이동에 관한 관세를 주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자국에 설치된 웜홀에 관해서는 일정량의 수수료를 받겠다는 것이다.
이에 한서진 측 답변은 간단했다.
“프랑스에는 웜홀을 설치할 계획이 없으니, 프랑스 정부는 그 문제를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빛의 속도로 나온 반응에 프랑스는 화들짝 놀랐다.
프랑스 시민들은 자국에 대한 탄압이자 차별이라며 목소리를 높이는 한편, 대통령이 섣불리 경솔한 발언을 했다며 지탄했다.
프랑스 전권대사가 급히 한국으로 날아왔으나, 세연동 대문을 두드리는 데는 실패했다.
대신 전권대사는 H그룹 본사를 방문하여 사흘에 걸친 장고의 협상을 벌였다. 그리고 프랑스 대통령이 직접 협의한 내용을 발표했다.
“우리 프랑스는 과거 한국에서 약탈한 문화재를 모두 즉시 반환하고, 정중한 사과의 뜻을 표합니다. 또한 점유 기간에 따른 충분한 배상액을 지급할 것입니다.”
프랑스 대통령은 말 한 번 잘못했다가 약탈 문화재에 돈까지 얹어서 모두 돌려줘야 하는 선택을 해야 했다. 그에 따른 한서진 측의 ‘보수’는 소소한 수준이었다.
“전에 했던 말은 일단 철회합니다.”
대변인은 짤막한 철회 의사를 밝혔을 뿐이었다.
웜홀을 반드시 설치하겠다거나, 혹은 설치할 예정이라는 뜻은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설치할 계획이 없다는 경고를 ‘일단’ 거둬들였을 뿐이었다.
은근슬쩍 웜홀을 견제할 생각을 품고 있던 여러 나라들은 한서진 측 뜻이 매우 강경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웜홀로 벌어들일 이익을 다른 이와 나눌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위력으로 양보 받을 수도 없었다.
그는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의 명예시민이며, 군사력 2위의 러시아와도 우호 관계를 맺고 있었으니.
무엇보다 그를 거슬리게 해서 웜홀 설치가 늦어지거나 혹은 무한정 보류된다면, 그로 인한 손해가 막심할 것이다.
주변국들은 죄다 웜홀이 있는데 자국에만 없다면? 상대적으로 국가의 경쟁력이 뒤쳐지게 된다.
오히려 눈치 빠른 국가들은 프랑스의 경솔한 태도를 비웃으며, 자국에 우선적으로 웜홀을 도입하기 위한 물밑 작업에 이미 착수한 상태였다.
“피할 수 없다면 하루라도 빨리 도입하는 게 더 유리해. 한서진 박사와 웜홀 도입에 관한 협의를 빨리 마쳐야 한다!”
“맞아. 지금 프랑스처럼 되도 않는 옹고집을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퍼주는 한이 있더라도 웜홀 도입 우선권을 따와야 한다.”
웜홀 도입을 우선하려는 국가들의 보이지 않는 치열한 경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여러 국가 원수들은 다른 일을 모두 내팽개치고,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참에 계열 정리를 제대로 해야겠다. 언제까지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할 수는 없지.”
정지원은 전용기를 타고 미국에서 날아왔다.
그는 전부터 생각해둔 바를 꺼냈다.
“BII도 그렇고, 네가 계속해서 새로운 발명들을 내놓고 있는데 이대로는 너무 난잡하다. 해서 회사 계열 정리를 했으면 해.”
“에스코너 산하로 통합할까요?”
“그래야겠지. SJ엔터테인먼트도 이참에 옮겨야겠다. 한국 내에 있는 기업들도 전부.”
에스코너는 본래 L국에 설립했다가 미국으로 옮긴, 한서진이 100% 지분을 소유한 지주회사였다. 한서진이 보유한 SJ인더스트리의 지분 86.5%도 정확히는 에스코너 소유로 되어 있다.
에스코너는 SJ인더스트리, 한국의 제약회사 영원그룹, 그리고 미국 내 현금 및 현물 자산을 보유하고 있지만, 한서진의 재산 전부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례로 H통신, H컨설턴트, 재정감시 TF 법인 등, 전용기 등의 잡다한 재산은 개인 명의로 되어 있었다.
“그간 너무 난잡하긴 했어. 이참에 싹 다 정리하자.”
“알겠습니다.”
재산이 너무 많아지니까 관리가 제법 난잡하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정지원은 즉각 팀을 꾸려 지분을 포함한 재산을 에스코너 소유로 옮기는 작업에 착수했다.
재산의 종류는 가리지 않았다. 세연동 저택과 전용기, 수퍼카 군단, 연구소 사옥과 부지 등 일체의 재산 명의를 이전했다.
SJ인더스트리가 맡고 있던 SJ엔터테인먼트의 지분도 에스코너로 전부 옮겼다.
“정 사장님, 아무래도 SJ인더스트리 경영은 이제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겠는데요.”
“이제 나 짤리는 거냐?”
“그게 아니고, 제가 거느린 회사들을 통합해서 경영해주셔야 할 것 같아서요. 솔직히 SJ인더스트리에서 이제 정 사장님이 하실 일 별로 없잖아요.”
“제길. 편한 생활은 이제 끝이군.”
빈말이 아니라, 정지원이 SJ인더스트리에서 특별히 신경 써서 해야 할 일은 없었다. 제품 개발은 한서진이 도맡아 하고 있었고, 유통망은 이미 완벽했다.
회사가 커진 만큼 신경 써야 할 부분도 방대해졌지만, 시스템이 체계를 완전히 갖춘 만큼 정지원이 현미경 들여다보듯 챙겨야 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알았어. 그럼 칼 루이스 부사장을 사장으로 승급시킬까?”
“그러죠. 그리고 정 사장님은 에스코너 회장직을 맡아주세요. 안 그래도 공석이었는데 잘 됐네요.”
“격무가 끊이지 않겠구나. 좋은 시절은 다 지났어.”
말은 그리 하면서도 정지원은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그럼 에스코너 신임 회장으로서 일인주주님께 첫 업무를 보고할까 하는데.”
“일일이 보고 안 하셔도 되는데. 경영은 알아서 하세요.”
“웜홀 사업을 추진할 계열사를 설립할까 해. 이름은 SJ게이트 어때?”
“뭐, 좋습니다.”
정지원은 즉각 웜홀 사업을 담당할 SJ게이트를 설립하고, 인재들을 긁어모았다. 한서진과 웜홀이라는 이름이 결합하자, 전 세계에서 구름떼처럼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정 회장님은 반도체공학부가 아니라 경영학과를 갔어야 할 것 같은데요.”
“사실 나도 미국 오기 전까지는 나한테 이런 재능이 숨어 있는 줄 몰랐다.”
SJ게이트의 CEO는 당분간 정지원이 겸직하기로 했다.
그는 먼저 미국 정부를 상대로 웜홀 설치에 관한 입법 로비에 들어갔다. 미 의회에서도 흔쾌히 법안을 통과시켜주었고, 웜홀을 설치할 법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물론 마냥 아무 일도 없던 것은 아니다. 특히 미국에서 물류 유통을 쥐고 있는 기업들의 생존을 건 로비가 치열하게 이어졌다.
그러나 이미 체급, 그리고 명분에서 어마어마한 격차가 벌어진 뒤라, 입법 통과 및 웜홀 조성에 관한 공감대 형성 작업이 어렵지 않게 이뤄졌다.
정지원은 한국에서도 국회와 정부를 상대로 발 빠른 행보를 시작했다. 언론을 움직여 여론을 조장하고, 국민들의 지지를 앞세워 입법부와 행정부를 강하게 압박했다.
덕분에 웜홀 승인 작업은 미국보다 더 쉽고 빠르게 이뤄졌다. 애초에 한국에서 한서진이 하겠다는 일을 대놓고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여기에 H그룹과 재계까지 나서서 지원사격을 하니, 그야말로 순식간에 통과되었다.
“일단 웜홀은 한국에서 시범적으로 운용해야겠어.”
“미국은 아직 시기상조인가요?”
“그런 것보다는 워낙 반발이 만만치가 않아서. 너도 알다시피 미국은 크잖아.”
입법 환경은 조성이 됐지만, 미국에 당장 웜홀을 실용화하면 경제시장에 있어 엄청난 균열이 벌어질 것이다. 미 행정부도 웜홀 도입에 찬성하면서도, 그 점을 염려하고 있었다.
“연착륙을 하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그 동안 한국에서 실전 경험을 쌓자. 최초의 웜홀 도입 국가, 한국도 그런 타이틀을 사양하진 않을 걸. 미국에 비해 시장 충격도 적을 거고.”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충격이 적다는 것이다. 한국도 꽤 큰 신음을 앓게 될 것이다.
벌써부터 물류 유통 종사자들이 거리로 나서서 웜홀 도입을 반대하는 시위를 시작하고 있었다.
민간 항공, 해운, 열차, 고속버스, 화물 트럭, 택시 조합에서까지 반대 시위에 나섰다. 심지어 임대사업자, 서울 건물주들까지 적극적으로 시위에 가담했다.
진화란 누군가에게는 손해를 끼치는 법이다. 그리고 손해를 보는 자들은 오히려 퇴화를 선택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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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J인더스트리는 바짝 긴장해라. 곧 만년 콩라인이 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