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47 잠겨버린 꿈 =========================================================================
꿈이 잠겼다.
아무리 잠이 들어도 레노지안이 열리지 않는다. 마치 영영 세계가 닫힌 것처럼.
신효진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잠을 청하며, 어떻게든 레노지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었다.
지난 몇 년 간, 그녀의 또 하나의 삶이었던 유토피아는 이제 닫혔다. 사라졌으며, 잠겼다.
신효진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에 빠졌다.
더 이상 아서 왕을, 신하들과 백성들을, 아버지를, 그리고 스칼린을 볼 수 없다는 것. 그 상실감은 마치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질 것만 같은 고통을 주었다.
어느덧 열흘이 지나갔다.
신효진이 보았던 레노지안 최후의 전쟁과 동일한 시간이 현실에서도 흐른 것이다.
그 시간 동안 꿈은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꾸지 않았던 것처럼.
그제야 신효진은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제 레노지안은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차라리 스칼린이 진짜고, 신효진이 꿈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신효진은 슬픔에 잠긴 목소리로 넋두리처럼 말했다.
“신효진의 삶은 너무 초라한데…… 스칼린은 반짝반짝 화려하게 빛나잖아요. 둘이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매일 잠에서 깨면서 생각 많이 했었어요.”
“…….”
“그러다가 박사님을 만나고, 하나 씨한테서 도움을 받으면서부터는 그런 생각을 안 하게 됐죠.”
한서진은 이해한다는 듯이 조용히 끄덕였다.
“효진 씨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겠죠. 그 심정 알 것 같습니다.”
“박사님은 그런 기분 잘 모르셨겠죠?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제일 잘 나가는 인생이잖아요. 심지어 꿈에서 레노지안의 고등 지식도 배워 오시구…….”
처음 레노지안 이야기를 꺼낼 때 울기만 했던 그녀는, 이제 제법 괜찮아졌다. 그러나 슬픔은 익숙해졌어도 상실감까지 지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한서진도 그녀와 몇날 며칠 이야기를 나누며,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레노지안은 이제 닫혔다는 것을.
‘설마 저주가 완성된 건가?’
아서 왕과 자신은 꿈으로 연결되어 있다. 혹시 저주의 완성으로 그가 사망해서 이렇게 된 것일까?
‘아니면 내가 봤던 미래가 벌써 일어났나?’
한서진은 혼란스러웠다. 자신의 정확한 마음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아서는 지구를 허구로 여기고 있다. 그것은 한서진의 입장에서, 지구를 없애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아서를 부정했던 것이다. 그를 긍정하게 되면, 이곳 지구는 사라져야하므로.
그런데 자신뿐만 아니라 신효진조차 레노지안을 들어갈 수 없게 된 지금, 마음속이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오랜 고민을 떨쳐낸 듯이 개운하기는커녕, 신경이 예민해지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입맛도 사라졌고 밤에는 잠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나는…… 레노지안을 원했다.’
인정하기 거북한, 솔직한 속마음이었다.
아서가 지구를 부정한 것 때문에 불편할 수밖에 없는 관계였지만, 레노지안 덕분에 목숨을 건지고 지금처럼 화려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사실이니까.
그가 궁극적으로 원한 것은 레노지안, 그리고 아서와의 단절이 아니었다.
레노지안은 레노지안대로, 지구는 지구대로 존재하며, 긴밀한 교류를 나누는 관계였다. 그렇게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무언가를 해보기도 전에 모든 게 끝나버렸다.
닫혀버린 레노지안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는 방법, 그것을 전혀 몰랐으니.
‘타르타로스로 어떻게 안 될까?’
초기에는 타르타로스 1으로 레노지안의 세상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었다. 아마도 에테르 공명 현상이 우연히 겹쳐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테면 주파수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생각지 않은 통신이 이뤄진 것과 비슷한 것. 그러나 그 정확한 주파수, 그리고 제대로 된 원리를 알지 못하는 지금, 더 이상 타르타로스에 의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모두 죽었겠죠? 신과의 싸움에서 졌으니……. 그렇겠죠?”
신효진은 눈물을 다시 글썽거리며 물었다. 어느새 목이 메고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지켜보기만 할 뿐, 저는 아무것도……. 왜 신은 저에게 그런 걸 보여준 걸까요?”
“효진 씨, 신 같은 건 없습니다.”
“그건 여기 종교에서 말하는 신이잖아요. 레노지안에는 분명 신이 있어요.”
“…….”
한서진도 그 말에는 부정하지 않았다.
레노지안에는 신, 혹은 그에 준하는 초월적인 존재가 분명히 존재한다. 지구에서 말하는 신과는 전혀 다른 의미겠지만.
“박사님, 방법이 없을까요? 레노지안이 어떻게 됐는지 꼭 알고 싶어요. 그리고 도와…….”
신효진은 말을 하다 말고 머뭇거렸다.
레노지안을 돕고 싶다는 것, 자신의 입장에서 주제넘은 생각이라는 것을 자각하기 때문이었다.
‘스칼린 왕비’와 달리 신효진 자신은 보잘것없는 평범한 여자에 불과하다. 신에 패배한 레노지안을 돕는다는 것 따위는 생각할 수조차 없다.
“저도 아직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닙니다. 할 수 있는 건 전부 해볼 생각입니다. 그러니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박사님…….”
“레노지안이 닫힌 것뿐, 아직 멸망했다고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안 그래요?”
조금 위로가 되었는지 신효진은 그제야 살짝 웃음을 지었다.
기진맥진한 미소였다.
한서진은 타르타로스를 통해 레노지안을 탐색하는 작업에 나섰다. 과거 몇 번 타르타로스로 연결이 된 적 있으니, 아예 길이 없지는 않을 테니.
그는 타르타로스 1에 남아있는 시스템 로그를 통해 역추적 작업을 시도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복잡한 연산을 통해 산출한 결과는 매번 무효로 끝났다.
시간이 속절없이 지났고, 그는 보안룸에 살다시피 하면서 레노지안 추적에만 몰두했다.
BII 시스템을 통해 타르타로스 2를 좀 더 빠르고 능숙하게 다룰 수 있었지만, 레노지안 추적 작업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웜홀 이론 발표 준비는 잘 돼 갑니까?」
니트론 교수의 연락을 받고 나서야 한시진은 자신이 놓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약속한 기간이 이제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지.’
한서진은 자신이 정신없이 지냈음을 반성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요즘 다른 작업 때문에 조금 정신이 없었네요.”
「다른 작업이라니요? 웜홀 이론 발표보다 더 중요한 게 대체 어디 있소?」
“그게…….”
「이미 국제 학계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한 박사가 물류 이동 관련해서 뭔가 대단한 혁신을 준비했다고, 그래서 다들 목만 빼놓고 한 박사 발표를 기다리고 있어요.」
“설마 교수님이 흘리신 건 아니겠죠?”
「아니, 나를 어떻게 보고! 한 박사가 엄청 대단한 발표를 준비 중이라는 건 아는 사람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에요. 이 바닥 소문 엄청 빠른 거 모릅니까?」
한서진은 일순 말문이 막혔고, 니트론은 조금 저자세인 태도로 말을 이었다.
「한 박사 바쁜 거야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압니다. 그래서 웜홀 이론 발표는 제발 좀…… 원래 말했던 일정대로 추진하면 안 되겠어요? 이러다가 늙은이 숨넘어가겠어요.」
“걱정 마십시오. 일정이 지연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한서진은 잠시 허탈한 눈으로 주모니터를 응시했다.
레노지안 추적은 웜홀 이론 발표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중대한 일이다. 하지만 니트론이 어떻게 그걸 알겠는가.
공개할 수 없는 비밀을 혼자만 알고 있다는 것은 이렇듯 답답할 때가 종종 있다.
‘잠깐.’
퍼뜩 생각이 들었다.
웜홀 마법을 자유자재로 지배할 수 있다면, 레노지안으로 실제로 건너가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레노지안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기만 하다면 말이다.
한서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조금 전 느낀 허탈함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지고, 새로운 의욕이 샘솟았다.
“좋아, 해보자.”
일주일 남짓한 남은 기간 동안, 한서진은 일단 웜홀 이론 발표 준비에 몰두했다. 물론 레노지안 추적 작업을 중단한 건 아니었다.
이론은 거의 완성된 상태였기에, 마지막으로 발표하기 좋게 다듬기만 하면 되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어떤 규모와 절차로 발표를 가지느냐였다.
심지어 발표 장소를 선정하는 것만 해도 엄청난 기 싸움이 오갈 정도였다.
미국과 러시아는 오랜만에 냉전 아닌 냉전을 펼치며 제대로 불꽃을 튀겼다. 한국 정부는 양 초강대국의 기세에 눌려 제대로 말 한 번 해보지도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발표 장소는 신 연구소 사옥으로 정해졌다.
“멀리까지 돌아다닐 시간 없습니다.”
한서진의 명쾌한 입장이 간단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발표 주제는 발표 당일까지 비밀로 붙여졌다. 이에 제법 항의가 있었으나, 얼마나 중요하면 발표하는 순간까지 비밀로 하겠느냐는 반론이 항의를 잠재웠다.
과학계는 물론이고, 다국적 기업들도 한서진이 무엇을 발표할지 놓고 긴장을 곤두세웠다.
그는 세상을 뒤흔들 만한 놀라운 연구를 몇 번이나 내놓았지만, 연구 결과를 공개할 때마다 매번 별 거 아닌 듯이 간단하게 넘어가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전과 달리 특별한 절차를 밟아가며 움직이고 있으니, 자연히 그 연구가 무엇인지를 놓고 온갖 기대와 불안이 자라난 것이다.
특히 다국적 기업들은 H그룹 및 한서진의 영향력 아래 있는 기업들의 행보에 주시했다.
한서진의 연구는 언제나 기업 경제에 직접적인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고,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휘하 기업들의 움직임을 통해, 연구의 방향성을 어느 정도 추론할 수 있다.
의학, 통신, 항공 등의 대분류만이라도 파악한다면, 향후 경영 운용에 큰 도움이 된다.
투자기관도 마찬가지, 그들은 보수적으로 자금 운용 방향을 변침하며, 한서진이 만들어낼 불확실성이 확실성으로 바뀌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리고 대망의 발표일이 다가왔다.
“이렇게 모여주신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모두 반갑습니다. 한서진입니다.”
발표회에는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무수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기자, 정치인, 경제인 등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미국과 러시아 대통령을 위시한 주요 국가수반들도 직접 참석했다.
우스갯소리로 학술 발표 장소가 아니라 G30 정상회담 개최장소 같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무게감 있는 인사들이 앞을 다투어 참석했다.
본래는 귀빈석 같은 것은 만들지 않으려 했지만, 국가수반들의 경호 문제상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최소 10만 명 이상은 모인 듯했다. 곳곳에는 대형 방송 카메라가 자리를 잡은 채, 현장의 긴장감을 전 세계에 실시간으로 송출하고 있었다.
자신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조금 가슴이 무거워진 기분이 든다.
“긴 설명보다는 짧은 체험이 더 낫겠지요? 먼저 여러분들께 가볍게 소개해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바로 옛 평양 지역에 건설되고 있는 종합 첨단연구공단, H월드입니다.”
청중들의 눈빛에 일제히 의아함이 떠올랐다. 갑자기 H월드를 소개하겠다니?
바로 그때, 연설 강단 왼쪽 공터에서 빛이 일어났다. 마치 허공이 서서히 찢어지는 듯이 벌려지며, 그 균열 사이에서 전혀 다른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건설 중장비가 쉴 새 없이 돌아가며 빌딩을 지어 올리는 모습이 드러난 순간, 귀빈석에 앉아 있던 크리스 대통령이 벌떡 일어나다 말고 콰당 넘어지고 말았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쉴 새 없이 비명이 터졌다.
“저, 저게 대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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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를 안 쓰는 것도 사실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