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46 꿈의 끝에서 =========================================================================
사방에는 깊은 어둠만이 가득했다. 그 어느 곳에도 빛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는다.
백골은 눈동자가 사라진 눈으로 천천히 둘러보았다.
어느덧 노신하의 환영도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노신하가 남긴 흔적, 오랜 세월에 퇴색된 뼈만이 보일 뿐이다.
노신하의 뼈는 백골의 발아래에 있었다. 마지막까지 왕을 보필하겠다는 듯이, 머리가 백골을 향한 채였다.
최후의 순간까지 그가 가슴에 품었을 충성심이, 생명의 흔적조차 없는 마음까지도 와 닿는 듯했다.
살점이 썩어버린 성대는 슬픔에 찬 탄식도, 허탈한 웃음소리도 터트리지 못한다. 목의 연골을 조금 돌리는 것조차 힘겹다.
끝없는 뼈 무덤의 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제야 볼 수 있었다. 그 무수한 백성들의 뼈는 하나도 빠짐없이 촘촘히 연결되어 있음을.
그리고 그 중추이자 최고봉에는 바로 자신, 백골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골은 노신하의 뼈가 있는 반대 방향으로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조금 더 가늘고, 형태가 다른 사람의 뼈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아마도 여인의 뼈이리라.
여인의 뼈는 백골의 손등에 대고 입을 맞춘 채, 모든 생명의 흔적이 정지한 상태였다.
가느다란 발목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아마도 갑옷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조각만이, 세월의 변색을 느끼게 했다.
백골은 기괴한 목소리로, 그 뼈의 주인을 불렀다.
―스칼린…….
그리움의 심해에서 인양된 기억은, 원치 않는 슬픔도 함께 끄집어 올린다.
쉴 새 없이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 행복, 그리고 상실감과 비통에 백골은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벌떡 일어나서 하늘을 향해 마음껏 비통을 내질렀으리라.
그러나 생명이 썩어버린 지금, 그저 힘겹게 고개를 돌리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리미트리스 드림은 고결한 영혼을 위한 성스러운 주문입니다. 용맹하고 고결한 이가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맞이했을 때, 그의 영혼을 영원한 꿈의 안식처로 인도합니다. 세상이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는 행복을 누릴 수 있지요.
―아무나 이 성스러운 축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반드시 고결한 이만이 죽은 후에 이 성스러운 시간을 누릴 수 있습니다.
―폐하, 폐하만이 이 성스러운 축복을 받아들일 권능과 자격이 있습니다!
까마득한 오래 전의 기억이, 마치 조금 전에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열흘을 밤낮으로 싸웠지만, 신의 그림자조차 구경하지 못한 채 패배했다. 무너진 하늘에서 쏟아져 나온 암흑은 레노지안의 모든 것을 죽음으로 이끌었고, 멸망의 문을 열었다.
그에 휩쓸린 레노지안 대륙은 모든 생명을 잃고, 죽음의 땅으로 변했다. 끝까지 아서 왕을 따른 모든 신하와 백성들은 목숨을 잃고, 그 혼은 산산이 흩어질 위기에 처했다.
그 거대한 절망의 끝에서 피어올린 한 줄기 희망의 빛, 그것이 바로 리미트리스 드림.
―최후의 열락을 짐 혼자 누리지 않을 거요. 모든 백성들과 함께 누릴 거요. 그것이 짐을 믿어준 백성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사죄이자, 보답이오.
―모든 백성들의 혼을 짐의 꿈에 들이겠소. 언제까지나 즐거운 꿈만을 꾸고, 그들이 행복만을 겪을 수 있게 보듬어주겠소. 우리 레노지안은 비록 신에게 패배하여 멸망하지만, 우리의 혼은 짐의 꿈에서 다 함께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거요.
리미트리스 드림은 저주가 아니다.
본래 고결한 이를 축복하기 위해 쫓겨난 신이 만든 마법. 그러나 그 축복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이는 대륙에 극히 적었다.
성전에서 패배한 레노지안은 멸망할 운명, 그러나 아서 왕의 결단이 그것을 비튼 것이다.
모두의 혼을 하나로 모으고, 왕이 조성한 아름다운 꿈속에서 영원히 안식토록 한다.
―그러나 폐하는 지나치게 고결하여, 폐하 스스로가 만든 아름다운 꿈의 세상을 무의식적으로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꿈에서 깨어나고자 하셨습니다.
―…….
―꿈에서 깨어나면 언제나 후회하셨지요. 소신의 말을 들을 것을, 꿈을 부정하지 않고 믿을 것을, 하고 한탄하셨지요. 그리고…….
―다시 잠이 들었겠군.
―몇 만 번이 넘도록 반복하셨습니다. 의심과 각성, 그리고 후회와 수면을 다시 끝없이…….
―…….
백골은 표정 없이 웃었다.
지금 자신은 꿈에서 갓 깨어난 상태다. 그것은 완벽한 레노지안의 세상이 일시 정지했다는 뜻이며, 그 안에서 행복한 삶을 누리는 250억 레노지안 백성들의 시간도 멈춰 있음을 뜻했다.
자신이 꿈을 꾸지 않으면 그들의 시간은 얼어붙는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자신이 꿈을 꾸면 그들의 시간은 다시 해동된다. 그리고 웃음과 번창, 행복이 영원히 반복된다.
레노지안이 가장 아름다웠던, 아름다웠을, 아름다워야만 하는 시간축에 영원히 고정된 채, 멸망과 죽음이란 신벌을 비껴갈 수 있는 것이다.
그것 외에는 죽음을 맞이한 그들 모두의 혼을 구원할 수 없었으리라.
―23억 년 전, 폐하와 왕비는 레노지안의 모두를 위해 희생하셨습니다. 폐하는 스스로를 바쳐, 그리고 왕비는…….
―스스로를 잃어…….
백골은 울컥 올라오는 그리움을 억누를 수 없었다.
축복을 시전한 것은 대륙 최고의 대마도사이자 현자인 코르비우스. 그러나 멸망을 앞두고 있을 때, 왕은 축복을 받아들일 최소한의 마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왕비는 자신을 바쳐 축복의 시전을 도왔다. 그 대가로 왕비의 영혼은 꿈의 세상을 허락받지 못한 채, 소멸하고 말았으리라.
꿈에서 왕비가 일으킨 적 없는 반역의 주모자가 된 것도, 아서가 그녀를 몹시 사랑하기 때문이다.
왕비의 혼은 스스로를 축복의 매개체로 바친 대가로, 왕의 꿈에 들어오지 못했다. 그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꿈에서 거짓된 왕비를 대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꿈에서 왕비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달콤할수록, 아서는 꿈의 세상에서 이질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것은 꿈이 오래 유지되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왜냐하면 꿈속에 존재하는 왕비는 거짓이므로.
그래서 꿈속에서 왕비는 언제나 반역자이고, 의식을 잃은 상태였던 것이다. 백골이 왕비를 가까이하지 하지 않도록 스스로에게 건, 가슴이 찢어질 만큼 아픈 제약이었다.
백골은 누군가를 떠올렸다.
왕비를 몹시 닮은, 그러나 왕비와 전혀 비슷하지 않은.
그녀가 왕비의 환생이라고 믿기에, 백골은 신의 무자비함이 얼마나 굳건한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떨치지 못한 미련은 기어이 입을 열게 만든다.
―그들은…… 짐과 왕비의 환생이오?
―차원의 세상은 거대합니다. 우연한 혼의 일치일 뿐, 그들은 폐하와 왕비와 일절 무관합니다.
―……정녕 그게 진실이오?
―제가 거짓을 고한 것이라면,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노신하의 망령이 슬픈 눈으로 바라본다. 눈동자가 없는데 어째서 슬퍼하는 눈빛이라고 느낀 것일까. 백골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한서진이, 그리고 그 여자가 폐하 부부의 환생이라면, 그것을 믿으시겠습니까?
―…….
한서진이 아서 왕의 환생이라면, 이 썩은 백골에는 ‘아서의 혼’이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 된다.
그저 아서가 남긴 미련, 사명, 그리고 책임감만이 남아 움직이는 해골,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군주 아서의 혼은 빠져나가고 없는, 그저 잔류하는 기억만으로 사고하고 움직이는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한서진이 아서의 환생이라면.
―폐하의 혼이 옥체에서 빠져나가 다른 차원에서 환생한 게 한서진이라면, 그것을 인정하실 수 있습니까?
충신의 망령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슬프게도 깨달아버렸다.
백골은 억지로 딱딱한 웃음소리를 냈다.
―한서진은 짐의 환생이군.
―…….
백골은 백골일 뿐, 아서의 혼을 담고 있지 않다. 아서의 혼은 시공의 차원으로 사라져, 무한히 반복되는 윤회의 굴레 속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백골이 자꾸만 또 다른 꿈을 꾸는 것이다. 정확히는 오래 전 갈라진 영혼이 살고 있는 삶을 꿈처럼 겪는 것이다.
―경은 짐을 속일 마음이 없구려.
―진실을 안다한들, 폐하께서는 어차피 다시 같은 선택을 하실 테니까요.
백골은 더 크게 딱딱한 웃음소리를 냈다.
맞다. 한서진이 아서의 영혼이 환생한 것이라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결국 자신은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리미트리스 드림, 그 아름다운 레노지안의 세계를 영원히 유지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린 가여운 백성들을 위하여.
자신은 다시 꿈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너무 오래 깨어 있었던 것 같군. 다시 잠들어야겠소.
―폐하의 꿈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이번에는 짐이 깨닫지 못하게 잘 좀 말려 주시오. 벌써 3만 번이 넘게 깨어났다면 대체 얼마나 경의 거짓말이 허술했다는 거요?
―송구하옵니다, 폐하.
―하긴, 경은 원래 예전부터 거짓말을 잘 하지 못했지…….
서서히 깊은 잠이 쏟아진다.
암막 커튼이 떨어지듯이, 시야가 위에서 아래로 조금씩 내려앉는다. 백골더미를 이루고 있는 백성들의 모습 하나 하나가 비수가 되어 눈에 박힌다.
아서의 혼이 없어도 상관없다. 혼이 없고 망념만 남아 있다 해서, 자신이 아서가 아닌 것은 아니므로.
‘짐은…… 아서다. 저들의 군주다.’
자신의 안에 잠든 그들의 혼, 영원히 달래 주리라. 그들을 위한 터전이 되어 주리라. 빛을 비춰 주리라.
완전히 눈을 감기 전, 백골은 부러진 채 꽂혀 있는 검날을 바라보았다.
빛바랜 검날에는 왕관을 쓴 백골, 자신의 모습이 쓸쓸히 비치고 있었다. 수많은 신하와 백성들의 혼을 멍에처럼 짊어진 모습, 그러나 3만 번이 넘도록 늘 그랬듯이, 조금의 후회도 없다.
백골은 눈을 감았다.
왕은 기이한 꿈을 꾸었다.
수십 년을 당연한 듯이 노예로 살다가, 뒤늦게 천재적인 재능을 깨달아 세상을 지배하는 젊은이가 되는 꿈이었다.
혈혈단신 성공하여 세상의 모든 부를 손에 쥐었으며, 대륙의 모든 국가들이 자신 앞에서 허리를 숙였다. 온갖 미녀들이 애정을 구했지만, 그는 마음이 통하는 아름다운 여인 한 명과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왕이 가진 것에 비하면 많이 모자라지만, 그 세상에서 누리지 못한 것은 없었다.
꿈을 꾸는 동안 왕은 오로지 그 젊은이였고, 자신이 본래 왕이었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수십 년의 꿈, 하지만 현실에서는 얼마 되지 않는 시간.
그리고 꿈에서 깨어난 왕은 보았다.
호화로운 황금의 침실, 무릎을 꿇은 충직한 신하들, 자신의 쾌유를 위해 기도하는 대사제들을.
무릎을 꿇은 대마법사, 충직한 노신하를 차분히 응시하자 그가 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폐하, 꿈은 폐하를 현혹시키는 거짓된 저주일 뿐입니다. 부디 이겨내소서.”
왕은 힘없이 웃었다.
“그 모든 게 꿈이었군. 너무 흥미롭고 생생해서……”
암흑의 세상에서, 깊은 꿈에 취한 백골의 잠꼬대 소리만 조용히 울렸다.
―꿈을 꾸는 내내, 꿈인 줄도 미처 몰랐잖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