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445화 (445/609)

00445  꿈의 끝에서  =========================================================================

‘……!’

하늘을 향해 돌격 중이던 왕은 등 뒤에서 기묘한 감각을 느끼고 흠칫했다. 그는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으나, 그곳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왕은 눈을 떼지 않고, 그곳에 무언가가 존재하기라도 하는 듯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타르온!”

그는 일갈로 타르온의 방향을 꺾고, 불길한 느낌이 서려 있는 그곳을 향해 질주했다. 그리고 사선으로 있는 힘껏 내리그었다.

그러나 손에는 아무런 감촉도 잡히지 않는다. 마치 허공을 베어 넘긴 듯한 느낌이다.

‘이상하다.’

왕은 의문을 지우지 못했다. 분명히 이곳에서 무언가 기묘한 기운을 느꼈는데?

“폐하!”

“근위단장.”

“무슨 일이시옵니까? 혹시 적 세력의 기습이라도…….”

“아무것도 아니다. 짐이 착각을 한 모양이다.”

왕은 다시금 등을 돌렸다. 그리고 무너지는 하늘을 노려보며 검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성전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굳게 다짐하며, 다시금 하늘을 향해 진격하려던 순간이었다.

“폐하.”

어느새 노신하가 바로 옆에서 부유 마법을 시전하며 나타나서 머리를 숙였다.

왕은 조금 탐탁지 않게 그를 바라보았으나, 이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지금은 복잡한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오. 성전이 열렸으니, 레노지안의 모든 힘을 모아 응전해야 하오. 신좌를 탈환할 기회는 좀처럼 오는 게 아니오.”

노신하가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본다. 깊이 가라앉은 눈빛에 왕은 저도 모르게 흠칫 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눈빛이다. 무언가 구슬픈 듯하기도 하고, 후회하는 듯이 보이기도 했으며, 자책하는 듯이 보이기도 했다.

이상했다. 그가 왜 저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까?

그것도 지금 이런 순간에?

“폐하, 소신의 이름이 기억나십니까?”

“……경도 알지 않소. 저주의 효력 때문에 짐은 경의 존재 일부를 인식하지 못하고. 경의 이름을 제 아무리 수백 번 넘게 들고 보아도 인식할 수 없거늘…….”

그가 누구인지 안다. 처음부터 또렷이 알고 있다.

그는 왕궁을 수호하는 대륙 최고의 현자이자 마도사이며, 왕의 스승이었고, 또한 장인이기도 했다.

왕비 가문 전부가 들고 일어나 반역을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하들의 호소로 역모에 연루되지 않을 만큼 명예가 드높은 성인이었다.

그러나 저주가 강해짐에 따라 왕은 그의 이름을 잊어버렸다. 듣거나, 보거나, 누가 알려주어도 인식하지 못한다.

“오래 전 소신이 한 일은 기억나십니까?”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지금은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눌 때가 아니오.”

가슴이 답답해지며, 심박이 빨라진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어두운 예감이 밀려온다.

왕은 필사적으로 그것을 외면했다. 왠지 그 다음 말을 들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에, 그는 매몰차게 고개를 돌렸다.

‘했다니, 무엇을?’

갑작스러운 노신하의 반응에 신경 하나하나가 곤두섰다. 왕은 그것을 잊기 위해, 필사적으로 전장에 뛰어들었다.

열흘 밤낮으로 전쟁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것을 진정한 의미에서 전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왕이 이끄는 초룡 군단과 인간 기사단은 떨어지는 하늘 파편을 막아내느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질주했다.

어쩌다가 대륙에 떨어지는 파편들은 마법사들이 힘을 합쳐 만든 보호막이 막아냈다. 만약 주거 지역에 파편 하나라도 떨어지면 엄청난 재앙이 일어난다.

대륙이 고통에 떨듯 울부짖고, 충성스럽고 용맹한 기사들의 얼굴에도 진한 피로가 가득했다.

‘또냐?’

또 한 번 거대한 하늘 파편을 막 소멸시킨 왕은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에도 분명히 느꼈다. 설명하기 힘든 기묘한 감각을.

마치 무언가가 자신의 뒤에서 몰래 관찰하는 듯한, 불쾌하기 짝이 없는 감각이다.

‘대체 몇 번째인가.’

처음에는 착각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확신하고 있었다. 분명 어떤 존재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그런데 자신은 그 존재를 찾아낼 수 없다. 그저 형언하기 힘든 묘한 느낌을 감지할 뿐이다.

다른 부하들은 아예 그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 못했다. 보통의 존재가 아님이 틀림없었다.

‘신의 하수인인가?’

왕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렇다면 말이 된다. 저 하늘 위에서 느긋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신, 옛 배덕자가 메신저를 시켜 자신을 관찰하며 즐기고 있는 것이리라.

“오냐, 그렇다면!”

왕은 신살검을 번쩍 들었다. 거센 에테르의 폭풍이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와 신살검을 휘감았다.

그 힘의 파동이 어찌나 컸던지, 대륙의 웅웅거리는 떨림이 한층 더 강해졌다. 거대한 힘을 느낀 왕의 군단 전체가 일순간 멈칫하며 이쪽을 주시했다.

“우와아아!”

“국왕 폐하 만세!”

“왕이시여! 부디 저들에게 보여 주소서! 왕이 지니신 그 거대한 권능을! 무력을!”

느껴진다. 대륙 전체의 환호성이.

수백 억 레노지안 신민들이 지금 이 순간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왕의 이름을 환호하고 있었다.

그 막강한 무력을 마음껏 해방하여 보기 좋게 신의 얼굴을 일그러뜨리기를.

영원한 광영과 번창을 레노지안에 가져다주기를.

왕은 그런 신민들의 뜨거운 열망과, 왕으로서 자신의 숙명을 담아 모든 힘을 끌어올렸다. 자신의 육체, 영혼이 불타버리는 것조차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그때였다.

쩌저적!

희미하게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를 악물며 힘을 끌어올리던 중 흘끔 바라본 왕은 그만 굳어버리고 말았다.

‘신살검에 금이?’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신살검의 중심에 횡으로 금이 가버린 것이다. 금방이라도 검날이 부러질 듯한 위태로움, 왕은 힘을 끌어올리던 그대로 경직되었다.

‘어떻게 이런?’

신살검은 지고한 보검이다. 결코 쉬이 부서지지 않는다.

신의 힘에 정면으로 충돌했으면 모르되, 힘을 증폭시킨 것만으로 버텨내지 못하고 무너지는 일은 없다.

“경!”

왕은 저도 모르게 노신하를 부르다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그를 발견했다. 왕은 반색하며 그를 불렀다.

“이상하오! 신살검이……!”

다급히 외치던 왕은 흠칫 했다.

노신하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째서 그가 눈물을?

“……경. 왜 슬퍼하는 거요?”

―다시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노신하가 입을 열어 대답했지만, 그건 귀가 아닌 마음에 전하듯이 아련하게 울렸다. 마치 노신하가 그곳에 존재하지 않고, 다른 세상 어느 곳에서 의지를 전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왕은 멍하니 하늘 아래 서 있었다.

신살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테르에 공명하듯이, 하늘 전체가 떨리기 시작했다.

충직한 신하들이 몸을 던지며 왕을 보호하다가 죽어나갔다.

에테르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어느덧 하늘이 쩌적 소리를 내며 두 갈래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끝을 모를 거대한 암흑이 흘러나와, 대륙의 모든 것을 뒤덮을 기세로 퍼져 나갔다.

지워져간다…….

모든 것이, 하나하나 암흑에 파묻혀간다.

조금 전까지 용맹하게 싸웠던 기사도, 피를 토하며 마법을 시전하는 늙은 마법사도, 결코 물러서지 않고 돌격하던 믿음직한 전우 초룡마저도…….

시공의 흐름에 모든 것이 물들며, 변색해간다.

어둠이 세상 전부를 뒤덮고, 그리고 다시 세상이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왕은 그 자리에 굳은 채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모든 풍경이 변했다.

어둠에 물든 석양만이 아스라하게 지평선 너머까지 뻗어 있다. 대륙의 그 어디에서도 생명의 기운, 아니 생명의 흔적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모든 것이 폐허다.

풀 한 포기는커녕 부서진 바위와 부패한 모래 위에는, 생명이 남긴 까마득한 공백만이 존재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왕의 시선이 발아래를 향했다.

끝없이 쌓여 있는 흰 뼈의 무더기가 보인다. 그를 섬기고, 추앙하고, 존경하던 신민들의 오래 된 껍질이다. 마지막까지 용감히 따른 군마와 용들의 뼈도 보인다.

그 수는 실로 셀 수조차 없다. 그 많은 뼈가 모여 거대한 태산을 이루고 있었다.

―폐하.

노신하의 목소리가 들린다.

왕은 천천히 얼굴을 돌렸다. 착각인지 모르겠으나, 기분 나쁜 고체의 마찰음이 진한 불쾌감을 남겼다.

노신하는 옆에 공손히 서 있었다. 다른 이들과 달리 그의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왕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저 온전한 모습은 허상이거나, 거짓이거나, 혹은…….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동시에 거짓말처럼 노신하의 이름이 생각났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 우스울 만큼 간단하게.

―코르비우스.

딱딱하고 건조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자신의 목소리지만 처음 듣는 낯선 것, 그러나 왕은 놀라지 않았다.

―신을 기억해내셨군요, 폐하.

―많은 것이…… 기억났소. 그런데…… 혼란스럽구려.

왕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음운 한 마디를 떼는 것조차 천금을 들어 올리듯이 버거웠다.

―짐의 백성들이 왜 이렇게…… 레노지안이 어째서…… 그리고 짐이 왜 여기에 있는 건지…….

―꿈과 현실이 섞이며 나타나는 일시적 혼란입니다. 곧 괜찮아지실 테니, 염려 마소서.

노신하는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시선을 떨어뜨리기 전, 왕은 보았다. 그의 눈가에 맺힌 구슬픈 눈물 자국을.

왕은 억지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목을 돌릴 때마다 기분 나쁜 마찰음이 들린다. 마치 썩은 나무와 바위가 부딪치는 듯한 불협화음이다.

그의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폐허로 변했지만, 틀림없는 레노지안이었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생명이 존재했다는 기척조차 없다. 무수히 널리고 쌓인 뼈들만이, 과거 레노지안이 번창했다는 증거로 보일 뿐이다.

아주 오래 된 기억이 조금씩 선명해지며, 잃어버렸던 진실의 조각을 맞춰 나간다.

―최후의 성전…… 우리는 힘을 합쳐 신좌의 탈환에 도전했고……

―그리고 패배했었지요.

―…….

―그러나 폐하의 가족과 신하, 신민 그 어느 누구도 폐하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폐하를 더 잘 보필하지 못한 것을 원통히 여길 뿐입니다.

기억이 더욱 선명해진다.

과거, 레노지안은 왕을 중심으로 모두가 힘을 합쳐 신좌에 도전했다. 그리고 패배하여 대가를 받았다.

완전한 죽음, 멸망이라는 잔혹한 신벌을.

―짐은…… 신벌을 회피하여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폐하 스스로를 희생하셨지요.

노신하는 웃었다.

죽은 바람이 불어오며, 노신하의 얼굴을 허공에 날려 보낸다. 살점이 조금씩 떨어져 나가며, 누렇게 변색된 뼈가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낸다.

―저를 포함한 폐하의 모든 신하와 백성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폐하의 꿈속에서 번창했던 과거의 행복에 영원히 머물러 있습니다. 모두가 폐하의 고결한 은혜, 그리고 희생입니다.

그것이 바로 끝나지 않는 영원한 꿈.

군주가 짊어진 고귀한 희생의 멍에.

왕은 물었다.

―이번이 몇 번째요?

―32,801번째이옵니다, 폐하.

충신의 망령은 구슬프게 웃었다.

―짐이 자처한 세상을…… 짐이 자꾸만 부정했구려.

―폐하의 영혼이 고결하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계속 꿈에서 깨어나시는 것이옵니다.

부러진 채 백골더미에 꽂힌 검 조각이 보인다. 먼지가 쌓인 채 두 동강난 검날은 손잡이 부분이 사라지고 없다.

날만 남아 있는 검의 표면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그것은 왕관을 쓴 채, 뼈 무덤의 의자에 앉은 백골이었다.

―리미트리스 드림은…….

그들에게 남겨진 유일한 축복.

오래 전 진토 된 백골이 꾸는 꿈이자, 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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