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44 꿈의 끝에서 =========================================================================
예언의 그날, 성전이 열렸다.
하늘과 땅이 흔들리며, 자연의 모든 것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대륙 어느 곳에서든 강력한 힘의 파동이 느껴졌고, 마수들이 날뛰었으며, 활강하는 용들의 그림자가 창공을 뒤덮었다.
―성전이다!
250억 신민의 함성이 온 대륙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수만의 용 군단이 하늘을 향해 질주했고, 수십만의 마법사들이 합동 마법진을 펼쳤다.
하늘을 향한 무한한 진격, 그 장엄한 군단의 선두에는 거대한 초룡을 탄 왕이 있었다.
왕은 온몸으로 투기를 뿜어내며, 갈라지는 하늘을 향해 붉게 빛나는 검을 빼들었다.
“진격하라!”
하늘이 부서지고 있었다.
부서져 만들어진 거대한 파편이 대륙을 향해 끝없이, 끝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건 마치 하늘 위의 땅이 붕괴해서 침강하는 것처럼 보였다.
왕은 가장 큰 하늘 파편을 향해 달려들며, 신살검을 힘껏 휘둘렀다. 검에서 뿌려진 섬광이 파편을 산산조각 내며, 무로 돌려보냈다. 뒤따르던 용기사단이 그걸 보고 환호했다.
“국왕 폐하, 만세!”
“군주 아서, 만세!”
“신을 무찔러라! 우리를 가둔 신을 무찔러라!”
검과 마법, 용의 숨결이 온 하늘을 뒤덮었다. 부서져 내리는 하늘 파편은 땅에 도달하지 못하고 모조리 먼지로 사그라졌다.
굉음마저 태워 버릴 듯 뜨거운 열기 속에서, 기사와 마법사들은 제 한 몸 아끼지 않고 투혼을 불살랐다.
붕괴하는 하늘 너머로 새카만 암흑이 속살을 드러냈다. 왕은 눈을 부릅뜬 채, 암흑 너머에 존재하는 공허를 노려보았다.
바로 저기다.
저 하늘을 넘어가면, 자신들을 추방한 옛 신을 만날 수 있다.
인간이 기억하지도 못하는 까마득한 오래 전, 왕가의 핏줄을 신좌에서 끌어내린 존재. 묵은 전설 속에서 계승된 신화.
그것을 맞닥뜨릴 수 있게 된다.
바로 그때였다. 투기를 태우며 검을 불끈 쥔 순간, 왕은 기묘한 기운을 느끼고 돌아보았다.
‘……?’
왕은 오른쪽 먼 곳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 하지만 그곳에서 알 수 없는 기운이 자꾸만 느껴진다.
착각인가, 아니면 신의 조롱인가.
“타르온!”
왕은 일갈로 방향을 틀었다. 주인의 뜻을 알아차린 타르온이 급히 그쪽을 향해 쇄도했다.
신살검을 높이 치켜든 왕은 자신에게 불길한 느낌을 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사선으로 힘껏 내리 그었다.
“꺄악!”
눈을 뜬 순간, ‘스칼린’은 번쩍거리는 빛이 자신을 내리치는 걸 알아차리고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 그야말로 아슬아슬한 차이였다.
겨우 숨을 돌린 스칼린은 자신을 공격한 게 누구인지를 깨닫고 멍한 표정이 되었다.
‘리온?’
그녀는 놀라서 돌처럼 굳어버렸다.
바로 코앞에서 왕이 사나운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품고 있던 따스한 애정은 온데간데없고, 그 대신 차가운 적의만이 열을 뿜고 있었다.
“리, 리온…… 대체 왜 그래요?”
그녀는 더듬거리며 겨우 물었다. 지금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녀의 마지막 기억은, 수석 마도사인 아버지가 리미트리스 드림이 성스러운 축복이라고 말해주던 장면에 멈춰 있었다.
헌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아버지는 어디에 있고, 이곳은 어디이며, 왕은 왜 저런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가?
‘잠깐?’
왕은 여전히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은 자신의 눈을 보고 있지 않았다.
마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존재를 노려본다고 해야 할까.
“리온, 내 말 들려요? 리온? 리온?”
스칼린은 애타게 그를 부르며,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잡았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그녀의 몸이 허공을 통과했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환영을 만진 것처럼.
“환영?”
그녀는 멍하니 중얼거렸고, 왕은 계속 노려보다가 천천히 등을 돌렸다. 그녀는 타르온을 탄 채 멀어지는 왕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주시하다가, 퍼뜩 깨달았다.
환영은 왕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것을.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하늘 높은 곳에 떠 있음을 깨달았다. 동시에 무수한 군단이 왕을 뒤따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온 대륙이 용트림을 하듯이 진동하고, 격렬히 떨리는 하늘은 쉬지 않고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자유롭게 하늘을 비행하는 기사와 마법사들은 쉴 새 없이 부서진 하늘 파편을 파괴하고 있었다.
어쩌다가 놓친 하늘 파편이 지면을 강타했지만, 대륙을 희미하게 뒤덮고 있는 빛의 막에 부딪치며 사라졌다.
그야말로 땅과 하늘의 싸움. 신좌를 건 성전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장엄한 전투였다.
스칼린은 넋을 잃은 채, 그 모든 장면을 지켜봤다.
‘여긴…… 미래의 레노지안?’
정신을 차린 그녀는 서둘러 왕을 쫓았다. 아무도 그녀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고, 추락하는 파편이나 마법의 불꽃은 마치 그녀가 존재하지 않는 듯이 통과했다.
‘없어. 내가 없어.’
어디에도 자신, 왕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장성한 왕의 아들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뭔가 이상해. 박사님이 보셨다는 미래와 달라.’
한서진의 시간대에서 왕은 왕비가 건 저주에 걸려 죽어가고 있었으며, 왕비는 반역자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한서진이 봤다는 먼 미래에서, 왕과 왕비는 함께 최후의 성전에 임하고 있었다. 장성한 두 아들과 함께.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왕비나, 왕자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왕은 홀로 신하와 기사들을 이끌며 싸우고 있을 따름이었다.
‘설마 지금 여기…… 박사님이 보셨다는 먼 미래가 아닌 거야?’
퍼뜩 든 생각에 스칼린은 우두커니 멈췄다.
‘그럼 박사님이 겪고 있는 시간축인 거야?’
한서진이 겪는 레노지안은 ‘현재’, 그리고 자신이 겪는 레노지안은 ‘과거’로 추정할 수 있다.
왕비와 왕자들이 없다는 것은, 지금 이곳이 멸망을 앞둔 먼 미래가 아닌, ‘현재’라는 뜻일까?
스칼린은 무기력하게 모든 것을 지켜봤다. 환영인 그녀는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것에 간섭이 불가능했으며, 무기력하게 지켜보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왕이 이끄는 대륙은 칠일 동안 밤낮으로 쉬지 않고 싸웠다.
하늘은 쉴 새 없이 부서져 내리며, 거대한 파편을 폭격하듯이 대륙에 떨어뜨렸다.
부서진 파편 너머로 암흑의 속살이 드러났으나 그것도 잠시, 곧 다른 파편이 생겨나며 뒤덮어버린다.
어마어마한 군세였지만, 피해는 착실하게 누적되고 있었다.
쏟아져 내리는 하늘의 폭격에 레노지안의 군세는 조금씩이지만 꺾이고 있었다.
대륙을 가르는 왕의 절대적인 권능도, 높은 하늘 앞에서는 보잘것없는 무력에 불과해 보였다.
‘리온!’
스칼린은 지친 왕의 뒷모습을 보며 안타깝게 외쳤다.
도와주고 싶었다. 함께 싸우고 싶었다.
하지만 이 시간축에서 자신은 환영에 불과했다. 아무리 외쳐 보아도 닿지 않고, 아무리 칼을 휘둘러도 허공을 스칠 뿐이다.
충성스러운 기사들이 눈앞에서 죽어나가도 그저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다.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제스! 탄! 휘렉스! 필트오드! 텐바!’
그녀는 죽어 나가는 기사들을 보며 안타깝게 부르짖었다.
자신도 알고 있는 충직한 기사들, 그들이 왕을 보호하고자 거리낌 없이 몸을 내던졌다.
일곱 번의 낮과 밤을 넘긴 전투는 어느덧 열흘째에 접어들었다.
대륙의 모두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최전선에서 싸우는 용기사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회복 마법을 꾸준히 받고 있다지만, 열흘째 한 번도 쉬지 않고 싸운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피 말리는 일이었다.
게다가 적을 보라. 아직 그 실체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저 끝없이 무너지고, 생성되고, 다시 붕괴하는 하늘만이 있을 뿐이다.
‘리온!’
그때였다. 왕의 검에서 이제껏 본 적 없는 강렬한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섬광은 온 대륙과 하늘을 뒤덮으며, 모든 시야를 잠식해버렸다. 오로지 환영인 스칼린만이 그 눈부신 광채 속에서도 모든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검이 갈라진다.
그리고 하늘도 갈라진다.
검이 뿜어내는 힘에 공명이라도 하듯, 하늘은 격렬히 떨리며 끝없이 긴 금이 가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붕괴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마치 하늘이 두 조각으로 나눠지는 듯이 보였다.
빛이 사그라진 후, 하늘의 붕괴 현상이 완전히 멈췄다. 대신 두 조각으로 갈라진 거대한 틈에서 암흑의 기운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피로에 찌든 기사와 마법사들이 그것을 보고 환호했다. 왕은 그 환호에 보답하듯, 초룡 타르온의 등에 우뚝 선 채 부러진 검을 고쳐 쥐었다.
스칼린은 우두커니 지켜보았다. 갈라진 틈에서 암흑빛 형태가 강림하고 있었다.
‘설마…… 저게 신?’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그 순간, 거짓말 같은 풍경이 그녀의 눈앞에 펼쳐졌다.
거대한 암흑이 모든 것을 뒤덮는다. 언제나 늠름한 왕도, 초룡도, 용의 군단도, 마법사도, 백성도, 그리고 대륙마저도.
시야의 모든 것이 지워지는 동안, 스칼린은 나오지 않는 비명을 지르며 왕을 찾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다. 이곳에서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환영에 불과했으니.
세상을 뒤덮은 암흑이 드디어 걷혔다.
그러나 여전히 빛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희끄무레한 풍경만을 간신히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한 순간, 그녀는 그만 쓰러지듯 무릎을 꿇고 말았다.
‘말도 안 돼…….’
끝없는 뼈, 생명의 시체만이 가득 널려 있었다.
용과 인간, 그리고 동물들의 뼈가 끝도 없이 이어지며 태산을 이루고 있었다.
그 산을 의자 삼듯이 홀로 앉아 있는 뼈가 보인다.
뼈가 쓰고 있는 왕관, 그리고 부러진 검을 본 순간 스칼린은 나오지 않는 비명을 질렀다.
‘안 돼!’
“허억!”
신효진은 꿈에서 깨어났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 겪었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거친 호흡을 반복하던 그녀는 다시 벌떡 누워 이불을 뒤집어썼다.
“잠들어야 돼. 잠들어야 돼. 잠들어야 돼…….”
초침이 째깍거리는 소리, 심장이 터질 듯이 뛰는 소리가 수면을 방해했다. 아니, 반드시 소음 때문이었을까.
필사적으로 잠을 청한 노력이 헛되지 않아, 그녀는 어느 순간 잠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벌떡 깨어났다.
그녀는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눈에는 초점이 없고, 목소리는 비쩍 말라 있었다.
그녀는 또다시 억지로 잠을 청했다. 수면 방해를 이겨내며 꿈속으로 진입을 시도했다.
몇 번의 수면을 반복하던 그녀는 결국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아침을 맞이했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마치 죽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는 기계적으로 더듬더듬 손을 뻗어 전화기를 잡았다. 그리고 한서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효진 씨?」
“박사님…….”
어째서인지,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왈칵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억지로 울음소리를 죽였다.
「어떻게 됐습니까?」
“어제 제가 들었다던 이상한 말이란…… 리미트리스 드림이 저주가 아닌 성스러운 축복이라고 거였어요.”
「성스러운 축복이요?」
한서진의 목소리에 멈칫 하는 기색이 묻어났다.
신효진은 흐느끼듯이 말을 이었다.
“그 이상은 이제 저도 몰라요.”
「네? 무슨 뜻입니까?」
“레노지안이 멸망했어요. 아니, 사라졌어요.”
그렁그렁하게 맺힌 눈물을 닦으며, 그녀는 마침내 울음을 터트렸다.
“더 이상 꿈을 꿀 수 없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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