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43 꿈의 끝에서 =========================================================================
신효진은 내려 쪼이는 아침햇살에 눈을 떴다.
초점 없는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던 그녀는 다시금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청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수마는 더욱 멀리 달아날 뿐이었다.
몸과 마음이 무겁지만, 잠은 좀처럼 오지 않는다.
부스스한 얼굴로 침대에서 내려온 그녀는 멍하니 욕실로 향했다. 기계적으로 양치질과 세수를 한 뒤, 화장대 앞에 앉아 화장을 시작했다.
출근 준비를 마친 그녀는 현관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에 내려 스마트키를 꺼냈다.
주차라인에 홀로 서 있는 자동차가 그녀를 맞이했다. 빽빽하게 차량이 들어선 다른 라인과 달리, 그녀의 롤스로이스 컨버터블은 혼자 쓸쓸히 있었다.
그녀는 운전석에 올랐다.
운전대의 매끈한 감촉이 손에 쥐어지는 순간, 멍했던 머릿속이 산산이 깨져 나갔다.
“성스러운 축복…….”
그녀는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하필이면 꿈이 거기서 끝나버렸다. 한창 흥미진진하게 영화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도시 전체가 정전이 돼버린 듯한 허탈감이 가슴속을 맴돌았다.
‘어떻게 된 걸까?’
신효진은 혼란스러웠다.
아서 왕은 리미트리스 드림이라는 고대의 저주에 걸렸다. 그래서 지구의 한서진이라는 인물이 되는 꿈을 꾸고 있다. 그게 바로 아서 왕의 시점.
그런데 리미트리스 드림이 저주가 아니라, 성스러운 축복이라고 한다. 다른 이도 아닌, 스칼린의 아버지이자 레노지안 최고의 대마도사가 한 말, 신효진은 대체 어떻게 된 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출근하지 말고 다시 가서 잘까?’
신효진은 그런 생각도 해보았다.
비서이기는 하지만 자신은 특수한 지위를 누리고 있다. 일단 회사 사람들 누구도 자신을 평범한 비서로 생각하지 않는다. 한서진의 약혼녀인 송하나의 친구라고 알고 있다.
그래서 업무를 소홀히 한다 해서 누구도 뭐라 하지 않고, 출퇴근을 가지고 간섭하지도 않는다. 언터처블이다.
하루쯤 결근한다고 해서 누가 신경 쓰지도 않는다. 이유를 물어보지도 않을 것이다.
‘아냐, 됐어. 어차피 지금 기분 같아서는 잠도 안 올 것 같아.’
아침에 한참이나 뒤척거렸는데도 잠이 안 왔다. 이미 정신이 맑아진 이상, 가서 누워도 별 소용이 없을 것 같다. 안 그래도 마음이 초조하고 혼란스러운데, 잠이 올 것 같지도 않고.
그녀는 결국 회사에 도착했다.
“아, 효진 씨. 어서 와요.”
마침 들어서던 한서진이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요즘 들어 그는 한층 더 자주 그녀를 보러 나온다.
“어제는 별 일 없었습니까?”
레노지안을 묻는 것이다.
신효진은 잠시 망설였다. 그에게 숨겨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게 아니었다.
‘그 뒤를 제대로 못 들었는데.’
성스러운 축복, 그 말을 들은 게 꿈의 마지막이었다.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다. 이 상황에서 이야기를 꺼내봐야 똑같이 갈팡질팡할 뿐이다.
“어제 이상한 말을 듣긴 했어요. 리미트리스 드림에 관해서…….”
“이상한 말이요? 어떤 겁니까?”
한서진은 눈빛이 달라지며, 바짝 다가와서 그 다음에 이어질 말을 재촉했다.
“하필 아슬아슬한 장면에서 잠이 깨버렸어요. 그래서 그 다음을 듣지 못했어요.”
“괜찮으니까 들은 거라도 말씀해주시죠.”
“아니에요. 좀 더 꾸고 난 다음에 한꺼번에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지금 장님이 코끼리 다리만 만진 상황이라 박사님도 들어봤자 어리둥절하실 거예요. 저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혼란스럽구요.”
한서진은 그녀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알겠다는 듯이 조용히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기다리죠.”
‘현실’로 돌아온 후, 왕은 깊은 번민에서 좀처럼 헤어 나오질 못했다.
‘지구가 허구가 아닌, 실존하는 세상일 수도 있다.’
연구함에 있던 부러진 신살검은 분명히 진짜였다. 통찰안으로 확인한 ‘진실’이다.
‘거대해진 신살검…… 그리고 어린 초룡의 뼈…….’
신살검과 어린 초룡의 뼈는, 본래 레노지안의 것보다 월등하게 컸다. 대관절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길이 없었다.
만약 지구가 다른 차원이라면, 시공간을 건너가는 과정에서 수십 배 이상으로 커진 것일까?
왕은 얼굴을 들어 집무실 벽을 쳐다봤다.
왕좌의 뒤쪽 벽에는 사람 키만 한 크기의 검이 걸려 있었다. 바로 왕가의 보물, 신살검이었다.
이미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왕은 다시금 정신을 집중해서 신살검을 주시했다.
통찰안이 발동하며 검이 갖추고 있는 진실을 드러냈다. 신을 멸할 힘이 금속의 몸체에 얌전히 머물러 있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의심할 여지없이, 틀림없는 신살검이다.
왕은 들리지 않게 신음했다.
‘신살검은 온 세상에 딱 한 자루만 있는 것이거늘.’
그 신살검이 또 하나 존재하고 있다. 꿈속의 세상 지구에, 그것도 거대해진 크기와 부러진 채로.
저주의 현혹인가, 아니면 자신이 놓치는 무엇이 있는 것인가.
왕은 혹 숨겨진 비사 같은 게 있는가 싶어, 레노지안의 모든 기록을 보존하는 ‘진리의 수정’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진리의 수정에 담긴 기록 어디에도 또 하나의 신살검 따위는 없었다.
“폐하.”
집무실에 든 노신하가 허리를 굽히며 예를 올렸다.
왕은 덤덤한 눈빛으로 그의 굽힌 등을 내려다보았다.
카르쉬라이 가문의 가장 큰 어른이자, 왕의 장인이며,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마도사이고, 동시에 왕가의 오랜 충신.
한 번도 그의 충심을 의심해본 적은 없다. 그러나 지금은 미미하게나마 흔들린다.
아니, 의심은 미미한 수준을 넘어 스스로가 또렷이 느낄 수 있을 만큼 실체화되었다.
왕은 다시 한 번 통찰안을 발동한 채, 그를 직시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경의 이름은…… 인식할 수 없군.”
“저주의 효력이옵니다, 폐하.”
“경은 예전부터 그리 말했었지. 모든 것은 저주 때문이고, 짐이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고.”
왕의 목소리가 조금씩 거칠어졌다.
“경의 충언을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이 충실히 따랐소. 그러나 지금 그 결과는 어떻소?”
“폐하. 소신은…….”
“한서진, 아니 꿈속의 짐은 여전히 레노지안을 적대하고 있소. 오히려 그 의심이 나날이 강해지고 있지. 저주를 극복하거나 그 중추를 찾아내기는커녕, 특별히 이룬 성과 없이 시간만 낭비하고 있지 않소?”
목소리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그것은 분노라기보다는, 오래 묵은 짜증에 가까웠다.
“그리고 이제 부러진 신살검이 꿈속에서 발견되었는데, 대륙 최고의 현자라는 경은 그것조차 속 시원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지 않소? 이건 대체 어떻게 설명할 거요?”
“…….”
노신하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침묵으로 왕의 분노를 받아낼 뿐이었다.
왕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개 숙인 노신하를 내려다보았다.
증폭되는 의심을 억누를 수 없다.
그러나 그 의심이 진정으로 향한 것은 노신하의 충심이 아니었다. 바로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진실이었다.
그 어떤 현혹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던 평정심, 그러나 허구의 세상에 존재하는 ‘진짜’ 신살검의 존재에, 그것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지구가 허구의 세상이라면, 그곳에 존재하는 신살검은 거짓이어야 한다.
지구에 있는 부러진 신살검, 그리고 왕궁에 있는 온전한 신살검, 그 둘은 똑같이 진실 된 존재였다. 그렇다면 통찰안이 잘못되었다는 것일까?
한참 후에야 노신하가 겨우 고개를 들었다.
“폐하, 저주의 힘이 나날이 강대해지고 있는 것은, 바로…….”
쿠구궁!
희미한 폭음에 왕과 노신하는 동시에 움찔했다. 작은 진동이긴 했지만 둘은 분명히 느꼈다.
“하늘이…….”
“떨리고 있사옵니다, 폐하.”
노신하는 벌떡 일어났다. 왕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급히 창가로 달려갔다. 둘은 거의 동시에 창문을 열어젖히고,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덧 하늘을 푸른빛을 잃어버리고, 어두컴컴한 잿빛으로 가득 뒤덮여 있었다.
왕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바깥이 일찍 어둡기에 폭우가 오려는 줄 알았더니…….”
“폐하, 천둥이 치고 있사옵니다!”
노신하가 하늘을 가리키며 비명처럼 외쳤다.
왕은 창백해져서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하늘이 찢어질 듯 천둥의 굉음이 울리고 있었다.
조금 전 느꼈던 공기의 떨림은, 바로 하늘의 울부짖음이었던 것이다.
예사로운 천둥이 아니었다. 정신을 집중하던 노신하가 이윽고 눈을 번쩍 떴다. 왕을 바라보는 노신하의 눈빛은 두려움에 젖어 있었다.
“거대한 신력이 느껴집니다! 하늘이 붕괴하고 있습니다!”
왕은 숨을 참았다가, 모든 것을 쏟아내듯이 쩌렁쩌렁한 소리로 외쳤다.
“타르온!”
수도 없이 돌아오는 메아리, 왕이 내지른 일갈은 온 사방을 크게 울리며 멀리까지 퍼져 나갔다.
그 순간에도 하늘은 점점 갈라지며, 붉은 광채를 쏟아내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예감했는지, 거리를 돌아다니던 시민들도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미 근위대는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캬오오!
저 멀리서 초룡 타르온의 포효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초룡은 집무실 창 근처까지 날아왔고, 왕은 가볍게 점프해서 초룡의 등에 올라탔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불길한 징조, 그러나 왕은 이것이 무엇인지 이미 깨닫고 있었다.
「하늘이 갈라지고 붉은 핏물이 쏟아지는 날, 신좌를 앗은 배반자의 칼이 대륙의 모든 것을 멸하고자 할 것이다. 최후의 성전에서 승리하는 그날, 태양의 권좌를 차지하리라.」
까마득한 고대부터 전해져 오는 예언, 그것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어째서 지금 갑자기, 라고 의심할 필요는 없다. 예언은 언젠가 일어날 일이고, 그것이 지금이었을 뿐이다.
왕가가 대를 이어 힘을 쌓고, 신수를 육성해온 것은 최후의 성전에서 승리하기 위한 것.
초룡의 등에 올라탄 채 왕은 오른손을 허공에 내밀었다. 집무실 벽에 걸려 있던 신살검이 허공을 날아 손안에 잡혔다.
높이 들어 올린 검에서 붉은 빛의 섬광이 몇 갈래로 뻗어 나오며, 도시를 보호하듯이 온 사방을 뒤덮었다.
어느덧 용을 탄 기사들이 상승해서 왕의 주변에 집결했다. 완전 무장을 갖춘 그들에게서 강한 투지가 흘러나왔다.
“폐하!”
“성전입니까?”
충성스러운 기사들의 얼굴에는 투지와 두려움을 비롯한 온갖 감정이 가득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예언의 그날이 마침내 왔다! 그러나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마라!”
군주의 우렁찬 호령은 지평선 끝까지 퍼져 나갈 만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왕은 손에 쥔 신살검은 더욱 높이 들어올렸다.
“이 고대의 보물이 있는 한, 우리는 신을 멸하고 태양의 권능을 되찾을 것이다!”
기사들은 그에 화답하듯이, 무기를 높이 들어 올린 채 커다란 함성을 쏟아냈다.
왕은 고개를 돌려 하늘을 노려보았다.
어둠에 잠식된 하늘이 거듭해서 갈라지며, 붉은 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진리의 수정에 기록된 그대로다.
하늘, 오래 전 신과 인간으로 나뉜 구역을 가로막아 서로의 간섭을 금지한 운명의 벽. 그것이 무너진다는 것은 최후의 성전이 열렸음을 뜻하는 것이다.
수도 없이 많은 마법사와 초룡, 그리고 용의 군단이 속속들이 집결했다. 무수한 군단의 앞에 우뚝 선 왕은 온몸에서 힘을 끌어올리며, 힘차게 외쳤다.
“출전하라!”
전투의 함성에 묻힌 왕은 인식하지 못했다.
검의 중간에 희미한 금이 빛나고 있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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