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42 전환점에 서다 =========================================================================
“이렇게 둘이 찾아오니 보기 좋군. 자주 들리게.”
“알겠습니다.”
백철중 회장은 기꺼운 마음이었다.
한서진과 송하나가 나란히 그룹 본사를 찾아오는 일은 사실 드물었다. 각자 따로 찾아오는 일은 종종 있어도.
둘이 함께 찾아오니 절로 마음이 흐뭇해진다. 회사 임직원 전체에 딸과 예비 사위를 공개적으로 자랑할 수 있으니까.
공개적으로 약혼을 한 건 아니지만, 회사 직원들은 둘의 사이를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그가 회사에 딸과 함께 직접 모습을 보이는 횟수가 많을수록, 직원들에게 든든한 힘이 되어 준다. 그룹의 위상 증진에도 여러 모로 큰 도움이 된다.
“그나저나 자네, 우리 하나는 대체 언제 데려갈 건가?”
송하나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백철중이 농담처럼 말을 꺼냈다. 이미 얼굴 부딪칠 때마다 하는 말, 한서진도 익숙하게 받아쳤다.
“그거야 하나가 오고 싶은 마음이 생겨야지요.”
“우리 하나가?”
“아직은 연애하는 게 더 좋답니다. 결혼하면 그 날부로 연애는 끝이니까요.”
“애가 아직 어려서 그러는 거니까 자네가 살살 달래서 데려갈 생각을 해야지.”
“전 그냥 하나가 하고 싶은 대로 해주고 싶습니다. 연애 기분 더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고요.”
“신혼 기분은 더 재밌을 걸세.”
“저를 못 믿으시는군요. 제가 설마 하나 놔두고 다른 여자를 선택할까 봐 그러십니까?”
“자네를 못 믿어서가 아닐세. 자네를 노리는 다른 여자들을 못 믿는 거지.”
“…….”
너무 솔직한 대답에 한서진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만날 때마다 매번 이런 대화가 반복된다. 이게 벌써 몇 번째더라?
‘이런 게 집안 어른 잔소리라는 건가.’
그리 생각하니 속으로 쿡 웃음이 터져 나왔다. 겨우 웃음을 속으로 삼키고, 한서진은 화제를 전환했다.
“회장님, 그런데 혹시 대량 운송 같은 곳에 돈 넣어두신 거 있습니까?”
“대량 운송이라면 구체적으로 뭘 말하는 건가? 해운 같은 거?”
“네, 특히 여객 수송업보다는 장거리 화물 운반 쪽으로요.”
“가만 있자. 해운쪽 업무를 하는 계열사가 하나 있긴 한데…… 그리 큰 규모는 아닐세. 시가총액이 2조 원쯤 되려나 모르겠군.”
“큰 건 아니군요.”
“그렇지. 애초에 우리 그룹이 화물 운송업에서 손을 떼기 시작한 지 오래니까. 그런데 왜?”
“관련 사업을 정리하는 게 좋겠습니다.”
“악재가 있나 보군.”
사업 이야기가 나오자 백철중의 눈빛이 달라졌다. 비록 큰 규모는 아니지만, 오너라면 그런 작은 돈도 신경 써서 관리해야 하는 법이다.
“악재라고 하기에는 그렇습니다만, 그쪽 관련으로 시장 가치가 폭락할 것 같습니다. 아니, 할 겁니다. 그러니 미리 손을 떼시라는 말씀을 드리려고 왔습니다.”
“어디서 뭐 큰 거 하나 터지나 보군.”
한서진은 다소 민망한 얼굴로 덧붙였다.
“제가 곧 터트릴 것 같습니다.”
“설마 자네가 원인이었나?”
“머지않아 이론 발표를 할 생각인데…… 아무래도 이건 사이즈가 너무 대형이라서요.”
“운송업에 획기적인 영향을 끼치는 연구인가 보군. 혹시 화물선이 더 빠르고 연료도 적게 먹으면서 이동하는 엔진이라도 만든 건가? 아니지, 그럼 주가가 폭락할 리가 없는데.”
“엔진 같은 건 아닙니다. 이론입니다.”
백철중은 짐작이 안 간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말해줄 순 있나?”
“죄송합니다. 발표 때 초청 드리겠습니다.”
“허, 여간 중요한 게 아닌가 보군.”
“아직 하나도 모르는 일입니다.”
백철중은 알겠다는 듯이 끄덕거렸다.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기대되는군. 알겠네. 내 그쪽 관련 사업은 조만간에 정리하지.”
“감사합니다.”
“내가 고마워해야 할 일인데, 뭘. 그나저나 발표는 언제쯤 할 생각인가?”
“이론이 정리되는 대로…… 아마 한 달 안에는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알겠네.”
둘이 이야기를 마칠 즈음 송하나가 돌아왔다. 힐을 신은 모습이 늘씬하게 길다.
흐뭇하게 바라보던 백철중은 문득 의아해서 물었다.
“하나야, 너 키가 좀 커진 거 같은데?”
그는 말을 하면서도 자신이 뭔가 착각했겠지 싶었다. 남자도 아니고 여자가 스무 살 넘어서 키가 크는 게 말이 되나.
그러나 딸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쬐끔 컸어요. 딱 1.5cm.”
“헐……. 거기서 더 컸어?”
“괜찮아요. 다리만 더 길어졌어요.”
“어쩐지, 비율이 달라졌더구나.”
놀라워하며 감탄하던 백철중은 곧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한서진을 주시했다.
“자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여자가 키 큰 걸 싫어하는 건 아니지?”
한서진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뇨, 전 보기 좋기만 합니다.”
백철중과 담소를 끝내고, 한서진 커플은 H그룹 본사를 나왔다.
정문 밖에는 검은색 방탄 리무진이 대기 중이었다. 한서진이 외출할 때 주로 사용하는 차량 중 하나로, 주로 가까운 지인과 동행할 때 사용한다.
“그러고 보니 오빠 요즘 리무진 많이 타시던데.”
“효진 씨와 거의 같이 다니다 보니까.”
“하긴 그렇네요. 효진 씨하고 같이 다니려면 아무래도 리무진이 좋겠어요. 남이 아니잖아요.”
“근데 넌 질투 안 해?”
“질투? 제가 왜 그런 걸 해요?”
송하나는 눈을 마주치며 배시시 웃었다. 예쁜 미소이긴 한데, 무언가 설명하기 힘든 불길함이 느껴졌다.
“오히려 고마워하고 있죠.”
“뭘 고마워해?”
“오빠 곁에 딴 여자가 꼬이나 안 꼬이나 효진 씨가 잘 지켜봐주고 있거든요.”
“……아. 그럼 나 딴 짓 하려면 효진 씨부터 독립시켜야 하나?”
“효진 씨 내보내면 딴 짓 준비 중이라는 걸로 이해할게요.”
실소가 터져 나왔다. 한서진은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고 품으로 가볍게 당겼다. 코끝에 좋은 냄새가 스쳤다.
“근데 오빠, 아까 아빠한테 말씀하신 거요.”
“응? 아아, 이론 발표?”
“운송업 쪽으로 크게 영향이 있는 연구 같던데, 금방 완성되는 거예요?”
“확답은 못하겠는데, 될 거라면 다음 달에 당장이라도 실용화할 수 있어. 안 될 거면 주구장창 세월 까먹는 거고. 근데 이론 다듬는 건 이번 달 안에 끝날 거야.”
“대체 어떤 거예요? 궁금해 죽겠어요.”
자기한테만 살짝 말해주면 안 되냐는 듯한 눈빛에, 한서진은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다.
“그냥 발표할 때 봐.”
“너무해요. 저한테도 비밀이라니.”
“아직 준비가 덜 돼서 그래. 너도 화장하다 만 얼굴 보여주기 싫잖아?”
“……에이, 그러면 너무 쉽게 납득되잖아요.”
한서진은 피식거리다가, 문득 차 옆으로 스포츠카 한 대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 희귀한 모델은 아니었지만, 그걸 보자 문득 차고에서 썩고 있는 ‘수집품’들이 생각났다.
“간만에 달려보고 싶네.”
틈틈이 모으다 보니 어느덧 수퍼카만 200대가 훌쩍 넘었다. 그 중에 절반 이상은 시동을 걸어보지도 못했고, 나머지에서 또 절반 이상은 저택 울타리를 벗어나보지 못했다.
직접 수퍼카를 몰고 시원하게 달려보고도 싶지만, 근래에는 경호와 안전 문제 때문에 사실상 금지당한 상태였다.
그런 실없는 생각을 품던 한서진은 송하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피곤했는지 어느새 눈을 감고 졸고 있었다.
“어제 좀 재울 걸 그랬나.”
괜히 미안한 마음에 그녀를 편안히 눕히고, 다리에 담요를 덮어 주었다.
편안한 자세로 앉은 그는 태블릿을 꺼내 타르타로스 2에 원격 접속했다. 시뮬레이션 데이터를 정리하며 곧 발표할 웜홀 이론을 가다듬었다.
에테르를 기반으로 한 기본 이론은 서술이 간결했다. 달리 말하면, 다른 사람들은 문장은 이해할 수 있어도 그 안에 담겨 있는 우주적 진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위대한 진리는 오히려 간단한 법이오.’
겨우 A4 한 장, 이론 논문이 너무 짧은 거 아니냐고 걱정하고 있을 때 니트론이 건넨 격려였다.
한 페이지 밖에 안 되는 서술에 오류가 없는지 검토하던 중 문득 저도 모르게 쓴웃음이 흘렀다.
‘아서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왕이 자신의 몸으로 활동하면서, 무엇을 경험하고 무엇을 느꼈는지 알 길이 없다. 그는 아카식 블레이드와 오리할콘 뼈를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행성을 멸할 힘을 가진 아카식 블레이드, 레노지안에서도 단순한 병기는 아닐 것이다. 장담할 순 없지만, 아주 귀한 보물일 듯한 느낌이 든다.
‘레노지안이 훗날 멸망한다는 것……. 아서는 모르겠지?’
그리고 자신이 말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왕은 이곳 지구를 본인이 꾸는 꿈이라고만 여기고 있으니.
같은 영혼을 가진 동일인이면서, 정작 서로 대화의 간극을 좁힐 수가 없다. 아니, 자신이 정말 아서와 동일한 존재이기는 한 것일까 하는 의심은 여전히 지울 수 없다.
논문 검토를 마친 한서진은 다시금 시뮬레이션 데이터를 열었다. 웜홀 마법의 에테르 코드를 타르타로스 2로 낱낱이 해부한 데이터였다.
최대 출력으로, 다양한 관점과 알고리즘을 동원하여 분석한 결과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타르타로스 2는 쉬지 않고 웜홀 에테르 코드를 분석하는 중이다.
웜홀 마법은 자신이 손에 넣은, 가장 고등 마법이다.
이것을 온전한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에테르 공학자’로서 유의미한 성장을 이룰 수 있게 된다.
‘에테르 공학자라.’
한서진은 저도 모르게 풉 웃음이 나왔다.
자신은 레노지안의 마법과 지구의 과학을 결합시켜서, 에테르 반도체 공학이라는 새로운 것을 탄생시켰다. 그렇다면 자신은 공학자로 봐야 하는가, 마법사로 봐야 하는가?
‘마법사…….’
지구의 관점으로 자신은 과학자이자 공학자다. 그러나 레노지안의 관점에서 자신은 마법사일 뿐이다. 그것도 초보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레노지안 마법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해.’
한서진은 속으로 결심을 다졌다.
지금 가진 지식이라고는 신효진이 꿈에서 힘들게 암기해서 가져오는 자잘한 마법 지식, 그리고 아서 왕이 남긴 웜홀 마법 주문이 전부다.
이것만 가지고 레노지안의 마법에 도전해야 한다.
‘할 수 있을까?’
마치 까마득한 절벽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기분이다. 과연 저것을 타고 올라갈 수나 있을까? 얼마 못 올라가서 금방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래도 나에게는 타르타로스가 있어.’
케르베로스 반도체 칩은 하나하나가 초소형 수퍼컴퓨터나 다름없다. 그것을 무려 2만 개나 엮어서 만든 것이 타르타로스 2. 자신에게는 그런 괴물이 있다고, 한서진은 그렇게 용기를 북돋웠다.
‘레노지안의 멸망을 막아야 해. 그러려면 그곳과 접촉할 수 있어야 하고…….’
지금 가진 유일한 레노지안의 지식들을 낱낱이 해부하는 것. 그것이 유일한 키였다.
한서진은 스마트폰을 들어 니트론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 한 박사. 논문 다듬는 건 다 끝났소?」
“요즘 그 이야기는 꼭 빼먹지 않으시는군요.”
「아하하, 이해해줘요. 내가 요즘 자나 깨나 그 생각 밖에 없어요. 빨리 웜홀 구현을 겪고 세상 사람들이 놀라는 걸 보고 싶습니다.」
“다행히 더 시간을 끌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한서진은 피식거리며 덧붙였다.
“예정대로 한 달 안에 공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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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P 모든 공항과 항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