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40 전환점에 서다 =========================================================================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천연석 욕조, 서른 명이 동시에 들어가도 넉넉할 정도로 크다.
바닥과 벽이 울퉁불퉁한 천연석으로 이뤄진 욕조는 마치 자연 온천 그대로를 옮겨온 듯한 정교한 아름다움을 뿜어냈다.
넓은 욕조에는 단 두 명만이 들어가 있었다. 바로 한서진과 송하나였다.
“세상 참 좋아졌어. 집에서 온천을 다 즐기다니.”
송하나는 작게 눈을 흘기며 피식거렸다.
“에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건 아니죠.”
그 둘이 담그고 있는 물은 유럽산 천연 온천수다. 유럽에서 매일 항공기로 공수해 와서 사용한다.
온천수 전용 저장 탱크가 있으며, 보일러로 물의 온도를 적절하게 유지한다. 사용을 하든 하지 않든, 하루가 지나면 버리고 새로 공수해온 물을 채워 넣는다.
매일 화물기가 공수해오는 온천수로 목욕을 즐기는 것, 어지간한 재벌들이라 해도 엄두도 내지 못할 사치다.
“오빠, 요즘 많이 이상한 거 알아요?”
물을 첨벙거리던 송하나가 문득 물었다. 한서진은 괜히 찔리는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걸리는 게 어디 한두 개여야 말이지.
“뭐가?”
“그냥 여러 가지로요.”
“…….”
“연구 때문에 바쁜 건 이해해요. 하지만 가만히 보면 너무 정신없어 보일 때가 많아요. 저번에도 많이 이상하셨고.”
한서진은 입을 꾹 다문 채, 속으로 아서 왕을 원망했다.
이왕 자기 행세 할 거면 좀 제대로나 하던가. 괜히 정신 질환 있는지 오해하게 만들어 놓고 복귀하면 다야?
“니트론 교수님은 괜찮다고 하시던데…… 오빠,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그럼. 그때는 그냥 좀 정신이 없었어. 중요한 이론 연구 때문에 바빴거든.”
송하나는 조금 풀린 듯 피식거리며 말했다.
“에이, 오빠 연구 중에서 중요하지 않은 게 어딨어요.”
“아냐, 이건 다른 것들과 비교가 안 돼.”
한서진은 한껏 표정으로 강조하며, 진지하게 덧붙였다.
“엄청 중요한 거야.”
“……그 정도예요?”
범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는지 송하나도 솔깃해서 반문했다. 한서진은 시선을 똑바로 마주친 채 힘 있게 끄덕였다.
“만약 이게 상용화되면, 지금까지 내가 한 모든 것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평가를 받을 거야.”
“……이론 실험은 성공했다는 뜻이군요.”
“그렇지.”
사소한 표현에서 그걸 알아차리다니, 역시 눈치가 빠르다. 한서진은 괜히 흡족해졌다.
“어떤 거예요? 말해줄 수 있어요?”
“완성되면 제일 먼저 말해줄게.”
“저한테까지 비밀로 하시는 거예요?”
“아니. 그냥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어서 그래.”
송하나는 배시시 웃으며 어깨에 슬쩍 기대왔다.
“알았어요. 그럼 저 엄청 기대해도 되는 거죠?”
“뭘 기대하든 그 이상일 거야.”
“뭘까. 진짜 궁금하네.”
한서진도 피식거리며 한 팔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온천수에서 서로 피부를 맞대고 있으니, 기분 좋은 노곤함이 밀려온다.
“근데 오빠. 저 할 말 있는데.”
“응.”
“요즘 효진 씨랑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 하세요?”
딸꾹. 딸꾹.
“이상입니다.”
“…….”
오랜 설명이 끝을 맺었을 때, 신효진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표정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녀가 얼마나 큰 충격에 잠겼는지 파악하기에는.
장고의 고심 끝에 한서진은 신효진에게 모든 것을 오픈하기로 결정했고, 그녀를 불러서 전부 털어놓았다.
리미트리스 드림, 왕비 가문의 반역, 그리고 저주의 대가로 영원한 잠에 빠진 왕비 이야기까지 모두.
그런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그만큼의 오랜 시간, 그리고 크나큰 번뇌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제 더는 숨겨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 그녀에게 털어놓고, 함께 의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심 끝에 알려준 것이다.
충격이 어느 정도 가시고 난 뒤에야 그녀는 더듬더듬 말문을 열었다.
“제가…… 아니, 스칼린 왕비가 그런 아서 왕에게 그런 저주를 걸었다고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아서 왕은 긴 꿈에 빠졌고, 초라한 공장 노동자 한서진으로 24년을 꿈에서 살았습니다. 물론 레노지안에서는 단 하루도 되지 않는 시간이었죠.”
“…….”
“아서 왕의 말이 맞다면, 저는 지금 제가 누구인지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하는 자각몽을 꾸고 있는 겁니다. 실제로 저는 한서진이 아닌 레노지안의 아서 왕이고, 이곳은 제가 꾸는 꿈에 지나지 않는 거지요. 이 꿈의 무대에서 저는 한서진이라는 역할을 맡고 있는 거고요.”
한서진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효진 씨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
“이 한국, 아니 지구가 그저 제가 꾸는 꿈에서 만들어진 임시 무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세요?”
신효진은 당장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한서진은 그녀의 혼란을 이해하고, 기다렸다.
잠시 후 그녀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요. 저에게는 너무 낯설고, 어려운 개념이에요. 하지만…….”
“하지만?”
“저는 분명히 저 자신으로서 존재하고 숨 쉬고 있는데, 사실은 다른 사람의 꿈속의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니. 뭔가 그건 받아들이기 어려워요. 제 의식은 이렇게 또렷하게 존재하는데.”
한서진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끄덕였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
“이 지구가 아서 왕의 꿈속이다? 말도 안 되죠. 이렇게 정교한 세계가 어째서 누군가의 꿈 따위에 불과하다는 겁니까?”
“……맞아요.”
신효진은 조그맣게 긍정했고, 한서진은 더욱 따스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는 넋이 살짝 나간 듯이 중얼거렸다.
“전에 말씀하신, 지구가 가짜라는 의미가 바로 그런 의미에서였군요. 리온은 이곳을 꿈이라고 인식하고 있다니…….”
“저주가 소멸하면 이 꿈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게 되는 거고, 아서 왕은 다시 건강을 되찾을 수 있겠죠.”
“하지만 이곳은 꿈이 아니잖아요.”
“그래요. 그런데 아서 왕은 그걸 인정하지 않습니다.”
한서진은 어두운 웃음을 지었다.
“레노지안에서는 그게 당연한 진실이니까요. 아서 왕 뿐만 아니라 신하와 백성, 모두가 공통으로 믿고 있는.”
“…….”
신효진은 문득 고개를 돌려 한서진을 똑바로 직시했다. 어딘지 무거운 감정을 담은 눈빛이다. 한서진은 지금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럼 스칼린 왕비…… 아니, 저는 왜 아서 왕에게 그런 저주를 건 걸까요? 그렇게나 서로 사랑하는 사이인데.”
“왕비 본인만의 의지가 아니라 카르쉬라이 가문 전체의 음모일 수도 있습니다.”
“카르쉬라이 가문은 명문가예요. 왕좌 따위를 탐내서 얻을 게 아무것도 없어요.”
“왕좌 따위라…… 권력을 좇는 이들의 탐욕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잘 모르시는군요.”
한서진은 조소를 머금었다. 신효진의 순진함을 향한 게 아닌, 인간 본연의 민낯을 향한 웃음이었다.
“권력은 그 자체로 손에 쥘 가치가 있습니다. 특히 절대왕정제의 왕좌라면 말할 것도 없지요.”
“……모르겠어요. 저는 잘.”
신효진은 아직도 믿어지지 않았다. 스칼린, 꿈속의 자신이 왕을 제거하려고 반역을 일으켰다니.
그렇게나 사랑하는 사람을 대체 왜?
“여왕 따위가 되고 싶진 않아 했는데……. 어째서…….”
“…….”
한서진은 조금 무거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가 자신의 말을 대부분 믿어주는 것은 다행이었지만, 꿈속의 스칼린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것은 조금 마음에 걸렸다.
‘괜찮아. 그래도.’
그러나 그는 통찰안이 보여주는, 그녀의 ‘반려 적합’ 판정을 굳게 믿었다.
반려라는 것은 인생을 평생 함께 할 수 있는 동반자. 즉 자기 자신만큼이나 믿고 아껴도 되는 존재. 통찰안이 보여주는 신효진의 반려 판정은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부터 단 한 번도 흐릿해진 적이 없었다.
신효진이 꿈의 생생함에 흔들려 현실을 저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반려 판정이 흐려졌을 테니.
꿈을 꾸자 여지없이 레노지안의 세상이 열렸다.
며칠에 걸친 왕실 행사를 마친 스칼린은 온몸이 녹초가 돼 있었다. 육체적인 피로가 아닌, 정신적인 피로가 누적된 결과였다. 천부적인 여전사의 재능을 타고 난 그녀는 웬만한 강행군으로는 육체적 피로를 느끼지 못한다.
‘내가 리온을 배반하다니. 말도 안 돼.’
스칼린은 좀처럼 충격을 벗지 못했다.
자신이 리온, 아서 왕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데 겨우 왕좌 따위가 탐나서 그를 배반한다고? 심지어 소중한 아들들까지 있는데?
한서진이 봤다는 레노지안의 미래, 수십 년 후 성전에서 패배하고 비참하게 멸망한다는 것보다 더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정말 내가 리온을 배반한다면 대체 왜? ……그리고 언제?’
한서진은 배반 시기를 정확히 가늠하지 못했다. 아서 왕이나 스칼린 왕비나 둘 다 젊음을 오래 유지하기 때문이다. 중년을 넘길 때까지도 둘은 청년 시절의 외모를 거뜬히 유지했으니.
‘최후의 성전에 왕과 왕비가 함께 출전하는 걸 보면, 아서 왕은 미래에 저주를 극복하는 게 분명합니다. 아마 왕비도 용서했겠지요.’
한서진의 부연설명이었다. 결국 나중에는 둘 사이의 오해가 전부 풀릴 것이라는.
하지만 그녀에게는 조금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자신이 리온을 배반한다는 것만이 뇌리에 강하게 남아, 그녀의 심기를 형편없이 무너뜨렸다.
그렇다고 가만히 두고 보기만 한다 해서 모든 것이 잘 굴러가지는 않을 것이다. 미래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왕이 저주를 극복하고 왕비를 용서하는 것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 될 수도 있다.
미래가 예정대로 흘러간다 해도, 그 역시 문제다.
그 끝에는 성전의 패배와 멸망한 레노지안의 시체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으니.
한서진도 신효진도, 레노지안이 그대로 멸망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레노지안의 멸망이 현실 지구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가늠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그녀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은 것이다. 레노지안을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것은 그녀뿐이니, 전면적인 협조를 얻기 위해서 말이다.
한참 번뇌에 잠겨 있던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 대기 중이던 시녀들이 황급히 뒤를 따랐다.
“왕비 전하. 어디를 그리 바쁘게 가시옵니까?”
“아버지를 봬야겠다.”
“수석마도사님을요? 알겠사옵니다.”
시녀 두 명이 서둘러 앞서 나갔다. 수석마도사, 스칼린의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미리 전하기 위해서였다.
스칼린은 왕궁을 나섰다. 급히 서두르다 보니 행차가 조촐해졌지만, 그래도 수십 명의 수행원들이 그녀를 따랐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백성들마다 모두 그녀를 알아보고 급히 허리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평소라면 다정한 미소로 화답했을 테지만, 지금 그녀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수석마도사는 마탑에 있었다.
“어쩐 일이시옵니까, 왕비 전하?”
친딸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중히 예를 표했다.
그녀가 한숨을 쉬며 수행원들을 전부 물렸다. 그럼에도 그는 예를 거두지 않았다.
“아버지, 물어볼 게 있어요.”
“하문하소서.”
“리미트리스 드림에 관해서예요.”
“네, 네가 어떻게 그것을 아느냐?”
수석마도사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그는 깍듯하게 차리던 예도 잊어버린 듯했다.
그의 격렬한 반응에 스칼린은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긴장감이 차오르며 숨이 가빠졌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요. 저는 마법을 거의 쓸 줄 모르는데 그 저주를 시전할 수 있나요? 아니, 레노지안 대륙에 그것을 시전할 수 있는 사람이 있나요?”
“저주?”
수석마도사의 얼굴에서 놀라운 감정이 지워졌다. 그 대신 의아한 표정이 자리 잡았다.
“그게 무슨 말이냐?”
“네?”
“리미트리스 드림은 저주가 아니다.”
똑바로 자신을 직시하는 아버지의 눈빛에서, 스칼린은 숨이 막힐 듯한 혼란에 빠졌다.
“성스러운 축복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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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목욕비로 대체 얼마를 쓰는 거죠. 덜덜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