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39 시공의 폭풍 =========================================================================
“어째서 신살검이 그곳에 존재하는 거요?”
왕은 혼란을 억누를 수 없었다. 노신하가 답을 아는 것도 아니지만, 마치 그의 실책인 것처럼 추궁했다.
노신하는 선뜻 입을 열지 못했으며, 왕은 머리를 감싸듯이 쥔 채 고뇌에 빠졌다. 체통을 지켜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신살검은 신을 멸할 힘을 간직한 왕가의 보물이다. 대대로 국왕의 손을 거쳐 내려오며, 언제고 벌어질 성전의 선두에 서게 될 위대한 검이다.
그 단 하나뿐인 신살검이 지구에 존재하고 있다. 그것도 부러진 채로.
‘그것마저 저주의 현혹이란 말인가?’
그런 번뇌가 얼핏 들었으나 왕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다. 그것은 틀림없는 신살검이었다.’
꿈속에서 일정 이상 권능을 사용하면 튕겨져 나오고 만다. 그것을 각오하면서까지 통찰안으로 신살검을 확인했다.
통찰안으로 들여다본 바, 분명히 틀림없는 신살검이었다.
“아무리 저주의 힘이 강대하다 한들…….”
신을 죽일 수 있는, 신이 만든 검마저 모방해낼 수 있는가?
통찰안의 권능까지 속일 수 있을 만큼 정교하게?
왕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제아무리 허구의 세상이라 한들, 다른 것도 아닌 신살검을 창조한다? 그것도 통찰안의 힘마저 피해가며? 말도 안 된다.
“폐하, 꿈속 세계에 신살검이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신살검은 고대의 주신 카드리안이 다루던 보물, 신을 죽일 수 있는 힘을 가진 무기입니다. 저주가 아무리 강력해도 그것마저 모방해내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그곳에 있었소. 통찰안으로 분명히 확인했소.”
“그렇다는 것은…… 저주가 꿈속 폐하의 인식마저 흐릴 정도로 강력해졌다는 뜻이 됩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통찰안의 권능은 그 자체로 절대적이지만…… 통찰안이 비추는 진실을 인식하는 것은 결국 폐하의 정신입니다. 제아무리 진실을 비추어 낸들 그것을 올바르게 인식할 수 없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노신하는 굳은 표정으로 호소를 이어 나갔다.
“잊지 마소서. 정신력을 흩어놓는 것, 그 또한 저주의 효력 중 하나입니다.”
“아니면.”
왕은 평소처럼 끄덕이며 수긍하는 대신, 비릿한 조소를 살짝 머금었다.
“그곳이 허구가 아닐 수도 있겠지. 안 그렇소?”
“폐하!”
노신하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며 외쳤다.
“농으로라도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안 됩니다! 그곳을 진실이라 받아들이는 순간 저주는 완성됩니다! 그것이 바로 저주가 노리는 바라 고하지 않았습니까?”
왕은 입을 열지 않았고, 노신하는 애가 타듯이 간청했다.
“부디 그 말씀을 거둬 주시옵소서. 본디 말은 그 자체로 힘을 가지는 법입니다. 진실도 반복해서 의심하게 되면 거짓으로 믿어버리게 됩니다.”
“이곳 레노지안이 거짓이라고 말한 적은 없소. 그렇게 여긴 적도 없고.”
노신하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왕은 조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것은 노신하가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다만 그곳이 허구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거요.”
“……폐하.”
“저주가 짐의 정신마저 흐트러뜨릴 정도로 강해졌던가, 아니면 그곳이 실존하는 곳이던가. 둘 중 하나겠지. 안 그렇소?”
왕은 여전히 냉소를 지우지 않았다.
한서진은 왕이 남기고 간 흔적을 살피는데 여념이 없었다. 바로 니트론에게 보여준 시공간 웜홀 생성 칩이었다.
왕이 만든 칩은 마력칩셋과 마찬가지로, 반도체 칩에 에테르 회로를 새겨 넣어서 만들어진다. 즉 기본 원리는 같다.
다만 회로가 담고 있는 수준이 놀라웠다. 며칠에 꼬박 걸쳐 자세히 회로를 뜯어본 한서진은 혀를 내둘렀다.
“대단하다.”
레노지안의 진정한 마법 수준을 목도한 한서진은 그저 감탄 밖에 나오지 않았다.
반도체 칩에 새겨진 에테르 회로, 레노지안에서는 그것을 마법 주문이라고 부른다.
신효진이 외워서 가져오는 마법 주문은 수준이 매우 낮은 편에 속한다. 애초에 그녀는 마법 같은 고등학문과 친하지 않고, 주문이 너무 길고 복잡해 단순히 암기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공간 웜홀 주문은 수준이 전혀 달랐다.
주문의 형식을 가만히 뜯어보고 있으니, 한서진은 여태껏 자신이 만들었던 마력 칩셋들이 문득 부끄러워졌다.
그것들이 세발자전거라면, 왕이 남긴 것은 벤틀리에 비유할 수 있을 만큼 어마어마한 수준 차이가 났다.
“마법이란 정말 대단하구나.”
이 마법은 레노지안에서 어느 정도 수준에 속할까? 한서진은 문득 그 점이 궁금했다.
‘적어도 중위 이상의 수준이 아닐까?’
아서 왕에게 반도체로 마법을 재현하는 것은 익숙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최고의 마법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왠지 허탈해진다.
자신은 서너 가지 에테르 회로, 즉 마법으로 지구 전체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시공간 웜홀 주문을 보면, 자신이 개발한 것은 레노지안 수준에서 한없이 초라한 수준일 뿐이다.
“만약 레노지안의 고등 마법을 현실에 재현할 수만 있다면…….”
불현듯 그런 미래를 상상하자 가슴이 거칠게 뛰었다.
몇 가지 하찮은 마법으로 지금의 지위를 쌓아 올렸는데, 레노지안에서도 고등 수준에 속하는 마법을 가져온다면?
“전 세계를 지배하고도 남겠네.”
지금처럼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수준이 아니라, 말 그대로 전 세계의 패왕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절대적인 힘 아닌가.
레노지안 덕분에 지금의 인생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워해왔다.
아서 왕의 목적 중 하나는 이곳 지구를 없애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그가 저주에서 해방될 테니.
그러나 레노지안의 진정한 마법 수준을 목격한 지금, 심경이 조금 변했다.
‘욕심 생긴다.’
이런 놀라운 기적이 일상화 된 세상이라니. 한서진은 처음으로 몹시 탐이 났다.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레노지안에 계속 접촉을 시도해볼까 하는 욕심이 슬그머니 들 만큼.
‘정신 차려, 한서진.’
그는 두 손으로 뺨을 가볍게 쳤다.
‘이건 독이 든 사과야. 함부로 탐내면 안 돼.’
아서 왕이 이곳 지구를 거짓으로 여기는 이상,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은 해선 안 될 짓이다. 어차피 레노지안과 연결이 닫혀 있어 불가능하지만.
한서진은 눈을 들어 주모니터를 주시했다.
화면에는 아서 왕이 남긴 에테르 코드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주문의 서라고?”
니트론이 했던 말이었다. 아마 레노지안에서는 이런 걸 주문의 서라고 부르는 모양이었다.
무에서 유를 떠올리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유에서 유를 새로 고안하는 것은 쉽다.
한서진은 정신을 집중한 채 에테르 코드를 주시했다.
에테르 에너지를 이용해 기적적인 힘을 발휘하게 하는 언어, 바로 마법이다.
‘웜홀 목적지는 알프스 지역으로 되어 있고, 유지 시간도 짧다. 하지만 게이트를 열고 유지하는 것 자체에 많은 에너지가 드는 것은 아니야. 단지 그렇게 설정했을 뿐.’
에테르 코드의 일부를 살짝 바꾸는 것만으로 웜홀의 목적지, 그리고 유지 시간을 조절할 수 있다. 자연의 에테르를 흡수해서 활용하게 함으로써 유지 시간을 반영구적으로 만드는 것도 가능했다.
다른 사람 눈에는 전혀 의미를 알 수 없는 기호일 뿐이다. 수천 대의 Z7을 활용해도 해석이 불가능할 것이다.
이것은 지구 과학으로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이 아니었으니. 오로지 통찰안을 지닌 자신만이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으리라.
한서진은 이론 공개를 언제 할 거냐고 독촉하던 니트론을 떠올렸다. 저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공개를 할지, 안 할지는 모르지만…….’
욕심이 생긴다.
이 지식을 온전한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공개 여부는 그 뒤에 생각할 일 아닌가?
“좋아, 해보자.”
“왜 눈물을 보이는 거요?”
다정한 ‘한서진’의 목소리에 신효진은 정신을 차렸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스치는 순간, 그녀는 자신이 스칼린이 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나쁜 꿈이라도 꾸었소?”
흰 실크 잠옷을 입은 왕이 다정히 옆에 누워서 바라보고 있다. 한서진과 똑같은 얼굴, 그러나 전혀 다른 사람. 이곳 레노지안, 또 하나의 세계에서 자신과 평생을 함께 할 반려.
그녀는 아서 왕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눈물을 흘렸다.
왕이 측은하게 바라보며 그녀의 눈물을 가만히 닦았다.
“정말 몹쓸 꿈을 꾸었나 보군. 그대가 이렇게 슬퍼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듯하오.”
“……리온.”
“진정하시오. 곧 날이 밝아올 텐데, 시녀들 앞에서 부은 얼굴을 보여줄 순 없지 않소.”
“그래요. 알았어요.”
스칼린은 눈물을 닦으며 애써 웃어 보였다.
“당신 말대로 정말 나쁜 꿈을 꾸었나 봐요. 제가 원래 이런 적이 없었는데.”
“그런 꿈 따위는 잊어버리시오.”
“그래야겠어요. 나쁜 꿈 따위는 잊어야죠.”
나쁜 꿈. 스칼린은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지구의 생활이 꿈인가? 아니다. 자신은 그곳이 현실이라는 것을 생생하게 인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레노지안이 꿈인가?
처음에는 그렇게 여겼다. 현실과 똑같이 생생하지만, 그저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자신을 다독였다.
그러나 한서진을 만나고 레노지안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부터, 조금씩 그런 생각에 금이 가고 있었다.
한서진은 레노지안에서 얻은 권능으로 지구에서 지금의 지위에 올랐다. 그 권능이 실재한다는 것은, 레노지안 역시 우주의 다른 차원 어딘가에 실존한다는 의미가 아닌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어떻게 기적의 권능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그때부터였다. 레노지안을 단순한 허상의 꿈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
시간축은 서로 다르지만 두 사람이 같은 꿈을 공유하며, 한 명은 그곳의 권능을 현실에서 사용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단순한 꿈으로 치부할 수 있겠는가.
이미 한서진도 마찬가지다. 그도 더 이상 레노지안을 허상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
알지 못하는 머나먼 차원의 어딘가에 존재하는 세상, 그리고 오직 꿈을 통해서만 접속할 수 있는 세상. 둘은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
‘혹시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도 있을까?’
한서진도, 신효진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닐 거라는 느낌이 강했다.
레노지안에서 둘의 지위는 너무 특별하니까. 혹 다른 이도 자신들처럼 레노지안과 꿈으로 연결돼 있다 해도, 그것이 현실에서 의미 있을 만큼 강렬하진 않을 것이다.
이런 생생한 꿈을 꾸는 이가 많다면,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알려졌을 것이다.
하지만 한서진이 작정하고 돌린 감시 프로그램에서, 그런 조짐은 단 한 번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만 일어납시다.”
“그래요, 리온.”
어느덧 새벽이 걷히고, 아침이 되었다.
몸을 정갈히 씻고, 시녀들의 도움을 받으며 정복을 착용했다. 오늘은 왕궁에 중요한 행사가 있는 날이었다.
수천 명의 신하들이 모인 가운데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엄숙한 행사가 진행되었다. 왕과 왕비는 왕국의 주인이자 어버이로서 행사를 주관했다.
질서정연하게 행사를 진행 중인 신하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스칼린은 다시 서글픔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 아름다운 세상이 수십 년 후에 멸망한다고? 그렇게 미래가 정해져 있다고?
스칼린은 보이지 않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속으로 외쳤다.
‘싫어! 그런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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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력칩셋이 세발자전거라면, 웜홀 마법은 벤틀리 정도가 아닐까?”
“ㅇㅇ 벤틀리 RC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