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38 시공의 폭풍 =========================================================================
제주도는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갑자기 오리할콘 뼈와 아카식 블레이드가 에테르 공명 현상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과거 평양에 일어났던 에테르 스톰과 흡사한 현상이었기에, 주둔 중이던 미 해군은 비상이 걸렸다.
다행히 한국 정부에서 제주도민을 피난시켜야 하는지를 놓고 갈팡질팡할 일은 없었다. 한국 정부에 보고가 들어가기 전, 에테르 공명 현상이 거짓말처럼 잠잠해졌기 때문이다.
미군 본부에서는 한국 정부에 정보를 제공할지를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제공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바쁜 청와대를 건드릴 필요는 없다.’
Table A의 신속한 판단이었다.
지금 한국 대통령은 한서진과 거래한 바를 지키기 위해 열심히 사정의 칼날을 휘두르고 있는 중이었으니. 정재계를 가리지 않고 사방에서 죽는 소리가 나오고 있는 판에, 이미 안전하게 끝난 일을 알려줄 필요는 없다고 결정했다.
에테르 공명 현상은 그렇게 일반 대중에는 알려지지 않은 채 조용히 묻혔다.
심지어 미 대통령조차 ‘그런 작은 해프닝이 있었다.’라는 뉘앙스의 보고를 받고, 곧 잊어버린 채 넘어갔다.
“레노지안은 미래에 멸망합니다.”
신효진과 독대한 자리에서 한참의 고민 끝에 한서진이 꺼낸 말이었다.
그녀를 만나기 직전까지 한서진은 무수한 번뇌를 거듭했다. 무슨 말을 어떻게, 어디까지 설명해야 하는지를 놓고 수많은 어휘와 표현을 놓고 고민했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신효진의 표정이 창백하게 굳었다. 그는 참을성 있게 그녀의 다음 반응을 기다렸다.
찬물로 속을 식힌 뒤, 그녀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레노지안의 미래를 봤습니다.”
“미래요? 멸망한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한서진은 자신이 본 꿈의 광경을 자세히 이야기했고, 신효진은 아무 말도 없이 찬물만 연거푸 들이켰다.
다소 터프한, 평소 연약한 그녀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 그녀가 느끼는 혼란을 여실히 말해주었다.
이윽고 그녀가 힘겹게 입을 떼었다.
“최후의 성전…… 결국 패배하는군요.”
전혀 모르지는 않는 듯한 어투에 한서진의 눈빛도 살짝 변했다.
“알고 계시는군요?”
“네. 신좌의 탈환은 카드리안 가문의 숙명이니까요. 아니, 레노지안 전체의 염원이기도 하죠.”
신효진은 창백한 표정으로 하얗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기록에도 정확한 언급이 없을 만큼 까마득한 오래 전, 주신 카드리안은 배반자에게 그 자리를 빼앗기고 지상으로 추락했어요. 그때 카드리안과 함께 추방된 백성들이 지금 레노지안 대륙의 조상들이죠. 까마득하게 먼 옛날부터 전해져 오는 전설이자, 역사예요.”
“…….”
“역대 국왕들은 평생에 걸쳐 힘을 쌓으며, 신좌를 다시 탈환할 기회만을 노렸어요. 하지만 정식으로 신좌에 도전했던 국왕은 별로 없었죠. 대부분은 평생 힘만 쌓으면서 치세를 베풀다가 수명을 마쳤죠. 그래서…… 아서 왕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신효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표정에 어둡기 그지없는 무게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데…… 아서는 결국 도전하는군요.”
신좌의 탈환은 왕가, 그리고 왕국 전체가 품은 소망이자 자긍심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실제로 실행에 옮긴 왕은 극소수다.
왜냐하면 성공을 장담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힘을 쌓았다고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패배가 확실한 전쟁은 결국 왕국 전체의 고통만 가져올 뿐이다.
역대 국왕들은 충분히 그런 판단을 할 수 있을 만큼 현명했고, 또 백성들을 아꼈기에 전쟁을 피했다.
“하지만 아서 왕은 결국 도전합니다. 그것도 국가의 모든 힘을 이끌고서요.”
“승산에 확신을 가질 만큼 충분한 힘을 쌓았던가, 아니면…….”
왕가의 소망에만 눈이 멀어버린 폭군이 돼버린 것이던가. 그러나 신효진도 한서진도, 그 가정은 입에 담지 않았다.
“왕국 모든 백성들과 신하, 가족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으면서 출전하더군요. 어떻게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웅장한 장면이었습니다.”
“어떡해요. 이제 웬만한 헐리우드 영화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으시겠어요.”
신효진이 농담처럼 말하자 한서진도 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팽팽했던 긴장감이 어느 정도 느슨해지며, 심박수도 천천히 가라앉았다.
“정리하자면 제가 겪는 시간축은 과거고, 박사님이 겪으셨던 시간축이 현재잖아요.”
“그리고 이번에 본 게 미래였죠.”
“장성한 아들이 둘이라고 했었나요?”
“네, 아주 잘 생겼더군요. 그래서 처음에는 아들인 줄도 몰랐습니다.”
“중년의 왕비는 어떻던가요? 엄청 삭았을 것 같은데…….”
한서진은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다.
“아뇨, 아닙니다. 젊은 시절하고 너무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미래라는 것을 상상도 못했죠. 장성한 왕자 두 명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수십 년 뒤 미래라는 것도 몰랐을 겁니다.”
신효진은 풀썩 웃으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저보다 나이 든 아들이 둘이라니……. 뭔가 신기한 기분이에요.”
“…….”
“저도 잘 상상이 안 돼요. 과연 스칼린 왕비가 어떤 세월을 보냈을지…….”
한서진이 꾸는 레노지안은 현재다. 그리고 신효진이 꾸는 레노지안은 과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레노지안의 멸망은 당연히 미래라고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점이 남는다.
‘왕은 그럼 나중에 왕비를 용서하는 걸까?’
왕비는 저주를 걸고 그 대가로 깊은 잠에 들었다.
하지만 레노지안이 최후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멸망하기 전, 왕비는 왕의 가장 큰 후원자로서 함께 하고 있다.
‘모든 것은 오류일지도 몰라.’
왕은 이곳 지구가 꿈속의 가상공간이라 믿고 있다. 반면 한서진은 지구와 레노지안 둘 다 현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하고 있었다.
자신이 본 레노지안의 수십 년 뒤 미래가 진짜라는 것은, 왕이 리미트리스 드림에서 해방된다는 뜻이 된다. 동시에 왕비를 용서하거나, 혹은 화합할 것이다.
한서진은 가만히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되면 정말 좋을 텐데…….’
지구도 레노지안도, 실제 세상으로서 계속 존속한다. 동시에 레노지안의 꿈을 통해 얻은 권능과 지식도 남는다.
자신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해피엔딩 아닌가.
신호등에 빨간불이 켜졌다. 신효진은 신호대기선 앞에 정차한 뒤 멍한 얼굴로 허공을 주시했다.
‘레노지안이 멸망한다고…….’
믿기 어려운, 아니 믿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신좌를 탈환하기 위한 성전, 거기에서 패배하고 레노지안의 모든 것이 흙으로 돌아간다니.
‘……안 돼.’
그녀는 핸들을 쥔 채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레노지안은 자신의 힘든 시절을 지탱해준 꿈이었다.
공장 근로자 시절, 하루하루 기계적인 삶이 반복되고 매일 피곤에 찌든 채 잠들었다. 가정환경은 엉망이었고, 미래에 대한 희망 따위는 없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나아질 거야. 괜찮아질 거야.
그런 최소한의 비전도 품지 못한 채, 죽지 못해 하루하루 연명해나가는 상황. 그때 그녀에게 레노지안이라는 꿈이 찾아들었다.
꿈에서 그녀는 초라한 공장 근로자가 아닌, 마수를 무찌르고 사람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는 강인한 여전사였다.
깨고 나면 꿈이었다는 허탈함 대신 내일 다시 또 그 다음을 이어가고 싶다는 기대감이 드는, 생생하고 현실 같은 꿈.
레노지안의 꿈은 그녀의 모든 것을 바꿔주었다.
힘들고 희망 없는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게 해주었다. 일상이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밤이 되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이 하루를 버틸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지금처럼 풍족하고 부족할 것 없이 화려한 삶을 누릴 수 있게 해주었다.
재계 1위 그룹의 후계자와 친자매처럼 지내고, 수십억을 호가하는 주상복합 아파트에 산다. 세계 최고의 부자인 한서진의 개인비서로서, 이전에는 상상도 못할 놀라운 삶을 누린다.
그 모든 게 레노지안 덕분이었다.
그런데 그런 레노지안이 훗날 멸망한다고?
“……안 돼. 제발.”
신효진은 머리를 숙인 채 이를 악물었다.
‘스칼린’은 자기 자신이기 전에, 자신이 바라는 이상향 그 자체였다. 그곳이 멸망한다는 것은 더 이상 꿈을 꿀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절망에 버금가는 상실감이었던 것이다.
어느새 신호가 바뀌고, 뒤에서 시끄럽게 경적이 울렸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이나 움직이지 않았다.
“시공간 웜홀 이론은 언제 공개할 겁니까?”
요즘 단둘이 남을 때마다 니트론이 꺼내는 말이었다.
다소 경쾌하긴 해도 학문에 관해서만큼은 진중했던 사람이지만, 시공간 웜홀 앞에서는 그 캐릭터성도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는 어미 닭을 쫓아다니는 병아리처럼 한서진을 졸졸 따라다니며, 웜홀 이론 이야기만 꺼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언급하지 않는 자제심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게 기적이라 생각될 정도로 열렬했다.
“시공간 웜홀이 상용화 된다면 물류의 혁신이 일어납니다! 몇 달 걸려 운반하는 물자가 몇 시간 내로 이동하고, 수에즈 운하는 관광지가 될 겁니다! 해적은 더 이상 아무 위협이 될 수 없고, 산을 깎아서 송유관이나 철로를 건설할 필요도 없어요! 환경오염도 줄어들고. 아, 물류쪽 일자리가 좀 줄어들긴 하겠지만 그거야 과학의 발전이라는 위대한 결과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소? 그리고 또…….”
“인류가 우주로 나아갈 길이 열리겠지요. 화성유인 탐사도 손쉽게 이뤄질 테고요.”
“아니, 그렇게 잘 아시면서.”
“그거야 이미 수십 번을 넘게 들었으니까요. 죄송하지만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입니다.”
“그렇게 잘 알면서 왜 숨겨두는 겁니까? 그런 놀라운 발견을 대체 왜?”
니트론은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세상이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다고 해서 망설이지는 말아요. 새로운 발견은 어차피 저항에 부딪칩니다. 결국 부딪칠 거, 조금이라도 일찍 시작해서 투병 생활을 빨리 끝내고 미래로 나아가야 합니다.”
니트론은 한서진이 이론 발표를 주저하는 이유로, 세상이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다고 생각해서라고 믿고 있었다.
“석유가 쓰이고 석탄업자들이 줄도산을 했습니다. 은행전산 시스템이 발달하면서 많은 은행원들이 일자리를 잃었었고, 이제 자율주행 시스템이 정착되면 많은 운송업 종사자들이 일자리를 잃게 될 겁니다.”
니트론의 표정은 엄숙하기 그지없었다.
“그렇다고 발전을 피할 수는 없어요. 그것은 인류의 전진을 인위적으로 늦추는 길입니다.”
“교수님. 그게 아니라.”
“변화에 피해를 보는 이가 생긴다면, 그 피해를 보상하고 그들이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처음부터 변화 자체를 억지로 늦추거나 없애는 것은 해선 안 될 일입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요.”
“한 박사가 뭘 걱정하는지 나도 알아요! 웜홀 이론이 상용화되면 무수히 많은 일자리가 사라지고, 또 생겨나겠죠. 그러나 그 혼란은 인류가 겪어야 할 성장통입니다! 성장통이 무섭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아이로만 남아 있을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니트론이 이렇게 흥분한 모습, 처음 봤다.
“적어도 이론 공개만이라도 고려해줄 수는 없는 겁니까아아!”
============================ 작품 후기 ============================
뭘 알아야 공개하든 말든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