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37 시공의 폭풍 =========================================================================
“허억!”
한서진은 외마디 비명 같은 숨을 토하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등이 흠뻑 젖은 채로 심장이 터질 듯이 뛴다.
모든 것이 선명하게 기억났다.
제주도에서 출발해서 서울로 향하던 중, 전용기가 에테르 과부하에 휘말려 중심을 잃고 청주 공항에 긴급 착륙을 시도했다.
마지막 순간 자신이 차고 있던 에테르 워치에서 엄청난 빛이 뿜어지던 것을 기억한다. 그 뒤로는 기억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고 있었다.
고개를 든 한서진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금과 보석으로 치장된 화려한 고딕 침대. 고급스러운 원목 기둥은 붉은 수실로 장식이 되어 있으며, 열 명이 누워도 충분할 듯 넓었다.
한 사람만을 위한 침실이라기에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넓은 공간, 그리고 다소곳하게 서서 대기 중인 십여 명의 시녀들이 눈길을 끌었다.
‘레노지안이구나.’
한서진은 속으로 신음을 흘렸다.
그렇게 진입이 막혀 있던 레노지안으로 다시금 들어온 것이다. 그것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문이 열리며, 한 젊은 여자가 들어섰다. 시녀들이 그녀를 보고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종아리가 살짝 드러나는 타이트한 가죽 바지와 재킷을 입고, 등에는 커다란 대검을 찬 여자였다. 금방이라도 전장에 나갈 듯이 씩씩하고 강인한 모습이다.
한서진은 신효진과 쌍둥이처럼 똑같은 그녀의 얼굴을 멍하니 주시했다. 그녀가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침대에 살짝 걸터앉고, 그의 무릎에 손을 올렸다.
그녀의 손가락은 무거운 대검을 다루는 전사의 것이라기에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고, 고왔다.
“일어났나요, 리온?”
“…….”
한서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코앞에서 풍기는 그녀의 향기가 마음을 간지럽힌다. 그녀는 젊고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느껴보지 못한 신비한 원숙함을 풍기고 있었다.
“드디어 오늘이에요.”
“……오늘?”
“당신과 나, 카드리온 가문, 그리고 모든 레노지안 신민들의 꿈이 이뤄지는 날이죠.”
한서진은 가벼운 혼란에 빠졌다.
지금은 어느 시대일까?
왕과 왕비가 만난 지 1년 후? 3년 후? 5년 후?
카르쉬라이 가문이 왕비의 주도로 반역을 일으키게 되는 날까지는 또 얼마나 남아 있는가?
그때 또 다른 이들이 왕의 침실을 찾았다.
중무장을 한 금발의 청년 둘이었다. 조각한 듯 잘생긴 얼굴, 그리고 온몸에서 풍기는 자신감과 강인함에서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넘쳤다.
나이는 이십 초반쯤 되었을까? 한서진이 그들이 누군지 몰라 의아해하고 있을 때, 그들이 몇 발자국 다가와서 허리를 숙였다.
“폐하, 소자들은 준비가 되었습니다.”
“어서 소자들을 이끌어 주시오소서.”
전류가 가슴을 짜릿하고 타고 흘렀다.
한서진은 놀란 마음을 억누르지 못한 채, 두 청년을 바라보았다. 어딜 봐도 건장한 저들이, 왕자들이라고?
“어서 일어나요, 리온. 우리 왕자들만이 아니에요. 왕국 신민 모두가 기다리고 있어요.”
왕비가 미소를 머금은 채 부드럽게 재촉했다.
한서진은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주시했다.
여전히 젊고 아름다운 얼굴, 하지만 다소 이질적으로 느껴지던 신비함. 그것의 정체가 뭔지 깨달았다.
그녀는 마법으로 젊음과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을 뿐, 이미 두 장성한 아들을 둔 원숙한 중년이었던 것이다.
홀린 듯이 모든 게 흘러갔다.
시녀들이 무구를 챙기고, 왕비와 왕자들이 지켜보고, 그리고 그를 보필하여 왕성을 나선다.
중무장한 기사와 군사, 그리고 수많은 용이 포효를 참으며 몸을 웅크리고 있다. 결전을 앞둔 모습에서는 비장한 각오가 느껴진다.
성에 몰린 수많은 백성들의 환호에 모든 소음이 묻힌다.
한서진은 그들의 앞에 섰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모든 소음이 뚝 멎었다.
수많은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저마다 뜨거운 염원을 담은 눈빛에, 한서진은 무슨 말을 꺼내면 좋을지 몰랐다. 얼어붙은 듯이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어?’
갑자기 온몸에서 감각이 사라졌다. 동시에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발을 한 발짝 내밀고, 검을 뽑은 손이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들어올린다.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이 힘찬 함성과 환호가 터지며 사방을 가득 채웠다.
그의 통제를 벗어난 아서 왕의 몸은, 이미 자의적으로 움직이며 연설을 시작했다.
“오래 전! 카드리안은 신족이었다! 그러나 사악한 배신자에 의해 신좌를 잃고, 인간으로 추락했다! 동시에 카드리안을 추종하는 그대들의 선조 역시 인간으로 격하되었다! 하지만 카드리안은 수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복수를 꿈꾸며 칼을 갈았다!”
높이 세운 칼에서 선명한 광채가 발했다.
한서진은 왕의 몸에서 어마어마한 힘이 뿜어져 나와 군중을 휘어 감는 것을 느꼈다.
힘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온 대륙의 사방으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한서진은 그 모든 것을 똑똑히 느꼈다.
‘이것이 왕명…….’
한서진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진실한 왕의 권능, 그 위력은 자신이 상상하던 것 이상이었다. 왕명의 권능에 삼켜진 무수한 군중은 열망에 취해서, 미친 듯이 환호를 내지르고 있었다.
“오늘, 우리는 되찾으리라! 우리가 잃었던 모든 것을!”
폭발적인 함성이 터져 나왔다. 마치 귀가 멀어버릴 듯이 막막한 환호였다.
왕이 뒤를 돌아보았다. 왕의 몸에 빙의한 한서진도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왕비와 왕자들이 상기된 표정으로 다가왔다. 왕은 묵묵히 쥐고 있던 검을 왕비에게 내밀었다.
“왕비, 그대가 이것을 맡아 주시오.”
“폐하, 어찌 제가 영광스러운 성전에 왕가의 보물을 들고 나서겠습니까. 거두어주세요.”
왕비는 정중하게 거절했으나, 왕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사로서의 능력은 왕비가 나보다 낫소. 견고한 신의 갑옷을 이 검으로 부수어 주시오.”
“폐하.”
결국 왕비는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하고, 왕이 내민 검을 받아들었다.
그 광경을 낱낱이 지켜보던 한서진의 의식은 불현듯 큰 충격에 사로잡혔다.
‘저, 저 검은?’
왕이 왕비에게 건넨 검, 그 자태가 똑똑히 시야에 들어왔던 것이다.
어찌 그걸 못 알아볼 수 있으랴. 비록 자신이 알던 것과는 달리 ‘온전한’ 모습이지만, 한서진은 한눈에 그 검을 알아봤다.
‘아카식 블레이드!’
바로 그 순간이었다.
거짓말처럼 주변의 시공간이 일그러지며, 소리 없는 폭풍이 그의 의식을 집어삼켰다.
시간을 빠르게 감은 듯이, 모든 게 순식간에 지나간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벌어졌는지, 한서진은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모든 게 너무나 순식간에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강한 빛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캄캄한 어둠이 세상을 뒤덮었다. 어둠은 조금 길게, 그리고 흔들림 없이 이어졌다.
어둠의 정적 속에서, 한서진은 보았다.
수도 없이 널브러진 백골과 무기들을. 온 사방에서 풍기는 죽음과 멸망의 악취를.
‘이건…… 레노지안의 미래?’
한서진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알아들을 수 없는 놀란 소음이 사방에 울렸다. 밝고 강렬한 빛이 눈앞에서 번쩍이며 시력을 마비시켰다.
“……사, 한 박사, 정신이 듭니까?”
주변의 목소리가 서서히 선명해지기 시작하며, 사물의 형체가 또렷해지고 있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그의 눈에 걱정을 가득 품은 니트론의 모습이 보였다.
“괜찮소, 한 박사?”
“……니트론 교수님.”
“갑자기 기절해서 걱정했습니다. 걱정 마시오, 아카식 블레이드와 오리할콘 뼈는 다시 잠잠해졌어요. 아마 일시적인 에테르 과부하 현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카식 블레이드? 오리할콘 뼈?
한서진은 멍하니 듣기만 했다. 그러다가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깨달았다.
‘여기는 Table A 연구함인데?’
그는 당황스러웠다.
분명히 제주도를 출발해서 청주공항에 비상 착륙을 시도하던 중이었다. 그게 마지막 기억인데, 깨어나 보니 Table A 연구함에 있다니?
자신이 기절한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서.’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의식이 레노지안에 넘어가 있었듯, 아서도 아마 자신의 몸으로 이곳에 있었던 게 틀림없다.
그는 서둘러 태블릿 PC를 꺼내 시스템 사용 기록을 남김없이 조회했다.
‘역시.’
마스터 권한에 여러 번 침투를 시도했다가 실패한 흔적이 있었다. 자신 외에는 접속 암호를 알지 못하니, 아서 왕도 번번이 실패한 것이리라.
혹시 아서 왕이 자신의 몸에 빙의할 것을 대비해서 마련해둔 대책이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둔 셈이다.
그러나 곧 머릿속을 치민 다른 생각에 한서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런데 아서 왕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아카식 블레이드, 자신이 먼저 그 단어를 꺼내지 않으면 니트론 교수 등 다른 이들도 관련 주제를 발설하지 못하게끔 조치를 취했다.
그들이 장난처럼 생각한 것 때문에 시행착오가 있었으나, 그래도 어느 순간부터는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아카식 블레이드와 오리할콘 뼈가 있는 1번 연구함에서 깨어났다는 것은, 아서 왕이 여기까지 도달했다는 의미 아닌가?
“교수님, 아카식 블레이드 말인데…… 혹시 제가 좀 이상하거나 그러진 않았습니까?”
“아아, 그거 말이오? 이해합니다. 나라도 믿을 만한 사람인지 한 번 더 시험하고 싶었을 거요. 그저 영광일 뿐이오. 마법이라니, 그런 놀라운 기적을 목도해서…….”
“예?”
니트론의 눈빛이 소년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것에 황당함을 느끼던 한서진은 다그치듯이 물었다.
“빨리 말씀해 주시죠.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갑자기 또 왜 그러는 거요?”
“어서요.”
니트론은 당황하긴 했으나, 곧 한서진이 캐묻는 대로 그간 있었던 일을 소상히 말했다. 중간 중간 ‘이 사람이 또 나를 시험하나?’하는 듯이 갸웃거리긴 했지만.
모든 이야기를 낱낱이 듣고 난 한서진은 살짝 허탈해졌다.
‘아서가 아카식 블레이드를 발견하지 않길 바랬는데…….’
너무 허술한 준비였던가 싶은 마음에 기분이 안 좋아졌다.
그렇다고 자신에게 다른 사람의 혼이 빙의할 것을 조심하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한서진은 아쉬운 마음을 억지로 씹어 삼켰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일이 있었다.
“그나저나 시공간 웜홀은 언제쯤 세상에 공개할 겁니까?”
한서진은 눈앞이 캄캄했다.
하필 시공간 웜홀 마법이라니. 이건 과학으로 위장하는 게 불가능한 수준이 아닌가?
그는 아서가 원망스러웠다.
‘이걸 나더러 어떻게 수습하라고.’
다행히 시공간 웜홀 마법을 알고 있는 것은 니트론 한 명 뿐이었다. 어찌어찌 수습이 될 것 같긴 했지만, 앞으로 니트론의 등쌀에 죽어라 시달릴 듯한 예감이 든다.
겨우 니트론을 떨쳐 낸 한서진은 서울로 돌아왔다.
혼자가 된 그는 아까 목격했던 환영을 떠올리며 깊은 침묵에 잠겼다.
‘다 큰 아들이 둘이나 있었어. 그렇다면…… 내가 이번에 본 것은 아서의 미래인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그리고 그 미래의 끝에서…….
‘레노지안은 멸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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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조.아.를 외치지 않은 벌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