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36 시공의 폭풍 =========================================================================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니트론은 한서진과 함께 전용기를 타고 직접 제주도로 향했다. 한서진의 정신질환 문제는 서너 명의 최측근들 사이에서만 공유하는 비밀이었기에, 절차상으로 크게 걸릴 게 없었다.
이동 행적을 파악한 정지원과 구프게니가 니트론에게 따로 질의를 했지만, 그것도 간단히 넘겼다.
“자세히 말해줄 순 없지만, 한 박사가 아카식 블레이드에서 정말 대단한 발견을 했소. 더 이상은 설명해줄 수 없으니 두 분 모두 이해 바랍니다.”
「대단한 발견이요?」
“그렇소. 지금까지 한 박사가 이룩한 모든 것들을 다 합쳐도 상대가 되지 않을 위대한 발견이오. 아, 물론 자연과학의 학문적 성취성으로 따졌을 때 이야기입니다.”
「그럼 당장 돈벌이가 되는 것은 아니군요.」
정지원은 그답게 수익성에 일단 먼저 관심을 보였다.
니트론은 그저 흐뭇하기만 했다.
“아, 진짜 당장 설명해주지 못하는 게 너무 아쉬울 뿐이오. 지금 내 입이 얼마나 근질근질한지 두 분은 전혀 모를 거요. 나중에 전부 알게 되면 그때는 지금 내가 얼마나 답답한지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정도로 대단한 발견입니까?」
“그렇다니까.”
「그럼 언제쯤 말씀해주실 겁니까?」
“그거야 한 박사가 허락할 때지.”
니트론은 간결하게 덧붙였다.
“물론 허락해달라고 억지로 조르면 안 됩니다.”
제주도 해군기지로 향하는 도중, 왕은 가슴이 조금씩 두근거림을 느꼈다.
니트론은 완전히 의심을 벗었다. 마법의 놀라운 힘을 목도한 그는 더 이상 어떤 불신도 가지지 않았다. 그전에 느꼈던 모든 모순, 어색함에 스스로 그럴싸한 이유를 붙여 합리화할 것이다.
‘아카식 블레이드라…….’
아직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한서진이 자신으로부터 감추고자 한 것이 틀림없었다. 사전에 측근들이 자신을 의심하게끔 해놓은 함정도 전부 그것을 숨기기 위함이었으리라.
대체 무엇일까. 왕은 조금이라도 빨리 그것을 보고 싶은 초조함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어디 편찮으세요? 표정이 안 좋아요.”
수행비서 자격으로 따라온 신효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왕은 쓴웃음을 감추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음료라도 갖다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아직 왕은 신효진을 대하는 게 어색했다.
그녀는 왕비의 의식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하진 않다. 이 꿈의 세상에 잔류하는 왕비의 혼일 수도 있고, 아니면 왕비가 준비한 함정일 수도 있다. 그도 아니면 한서진의 무의식이 투영한 존재일 수도 있고.
그렇다고 신효진을 상대로 정면 돌파 할 수는 없었다.
왕의 권능을 마음껏 사용할 수 없는 지금, 함정일지도 모르는 곳에 들어갈 수는 없으니. 적어도 그녀가 자신을 ‘한서진’이라고 생각하게 놔두는 게 낫다.
마침내 전용기가 제주도에 도착했고, 한서진과 니트론은 미군의 호위를 받으며 연구선이 정박한 미군항으로 이동했다.
물론 신효진은 제외였다. 그는 제주공항에서 갈라져 따로 숙소로 먼저 이동했다.
“한 박사, 그나저나 그 연구는 언제 발표할 겁니까?”
“생각 중입니다.”
“상상만 해도 흥분됩니다. 세상이 아주 발칵 뒤집어질 거요. 세계 물리학자들이 뒤집어질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이 너무 두근거리는군.”
들뜬 니트론은 잡담을 멈추지 않았고, 왕은 피식거리며 흘러 넘겼다.
레노지안에서는 별 거 아닌 공간이동 마법을 반도체 칩으로 재현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곳 지구에서는 기적 그 자체였다.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니트론이 보이는 반응만 해도 어떤가.
덕분에 손쉽게 그의 의심을 풀었으니 잘 된 일이다.
의전 차량은 미군의 호위를 받으며 마침내 미군항에 도착했다. 니트론은 신이 나서 먼저 1번 연구함을 향해 앞장섰다.
왕 또한 태연하게 그의 뒤를 따랐다.
저번에 오지 않은 곳, 한서진이 자신으로부터 숨기려 한 장소가 틀림없었다.
2번 연구함과 같은 구조를 가진 1번 연구함은 갑판 출입부터 삼엄한 보안을 자랑했다. 모두가 한서진과 니트론이 누군지 알고 있음에도, 출입을 위해서는 직접 생체 인식 시스템 인증을 거쳐야 했다.
1차 출입문을 통과 후 긴 복도가 끝나자, 넓은 공간과 함께 분주하게 움직이는 연구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왕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곳은 진짜다. 바로 자신이 알지 못하게, 한서진이 감추고자 했던 비밀장소.
여기에 있다는 아카식 블레이드, 과연 어떤 것일까?
니트론은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다. 마주칠 때마다 연구원들이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왕은 끄덕이며 그들의 인사를 흘러 넘기고, 니트론을 따라 걸었다.
엄중한 출입문을 몇 차례 더 통과하자, 지금까지 봤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왕은 눈을 부릅떴다. 저도 모르게 주먹이 꽉 쥐어졌다.
‘저건……!’
거대한 짐승의 두개골이 있었다. 200미터는 족히 넘어 보인다.
왕은 저도 모르게 내뱉고 말았다.
“타르온?”
크기를 보면 자신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초룡 타르온의 뼈와 흡사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리 외친 것이다.
다행히 들은 사람은 없었다. 니트론이 저만큼 떨어져 있는 게 다행이었다.
왕은 형언할 수 없는 충격에 사로잡혔다.
타르온의 두개골이 왜 여기에? 타르온은 지금 레노지안에서 멀쩡히 잘 살아 있는데?
설마 이것도, 꿈이 만들어낸 환영이자 거짓인가? 피시전자인 자신을 기만하고, 유혹하려는?
‘잠깐.’
놀라움은 잠시였다.
왕은 곧 무언가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타르온의 것으로 추정되는 두개골이 뭔가 이상했던 것이다.
‘이 구조는…… 성체의 것이 아니다!’
크기 때문에 순간 착각했지만, 두개골의 구조를 자세히 뜯어보니 이상한 점이 뭔지 깨달았다.
뼈의 생김새는 아직 한참 덜 자란 어린 초룡 개체의 것이었던 것이다. 단지 크기 때문에 성체로 착각했다.
‘성체에 버금가는 크기…… 하지만 생김새를 보면 갓 부화한 어린 개체인데?’
기이한 모순에 왕의 눈빛이 일순 흔들렸다.
그때였다.
“아카식 블레이드! 스캐닝 반응이 이상합니다!”
“대량의 전자파 발산! 내부에서 에너지 반응이 있습니다!”
“오리할콘 뼈에서도 동일한 반응! 뭔가에 공명하는 듯합니다!”
“대피, 대피해!”
갑자기 한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니트론이 허겁지겁 그를 향해 달려왔다.
“한 박사! 뭔가 이상하오! 일단 피합시다!”
왕은 그쪽으로 눈을 돌리다가 불현듯 발견하고 굳어져버렸다.
중간이 부러진, 낡고 거대한 검이었다.
무려 4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높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웅장함을 준다.
마치 거인족이 사용했던 것처럼 커다란 크기, 그리고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하는 익숙한 형태.
주변의 시간이 멈춰버린 듯했다. 왕은 그 자리에 굳은 채로 움직이질 못했다.
성체의 크기에 버금가는 커다란, 하지만 갓 부화한 초룡의 두개골.
부러지고 남은 부분이 40미터가 넘는 거대한 검.
그 두 가지 사실이 왕에게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을 안겨 주었다.
“신살검…….”
자신이 몰라볼 리가 없었다. 그럴 수가 없었다.
오래 전, 신을 죽이고자 하는 열망을 담아 만들어진 왕족 최대의 보검.
한때 왕의 검이었고, 왕의 부친의 검이었으며, 조부의 검이었고, 증조부의 검이었으며, 그리고 또 그 위의 선조들이 쓰던 검이었던 것이다.
“한 박사! 일단 피합시다!”
사방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옆에서 니트론과 다른 연구원들이 자신의 팔을 잡고 끌고 있었다.
그러나 왕은 그들을 뿌리친 채,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 힘이 어찌나 굉장한지 니트론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한 박사! 위험하다니까요!”
왕은 전혀 듣지 못했다. 아니, 듣지 않았다.
뭔가에 홀린 듯이 그저 무작정 앞으로 나아가기만 했다.
혼란스럽고, 어지러웠다.
왜 왕가의 보물인 신살검이 부러진 채 이곳에 있는가? 그것도 저렇게 거대한 크기로?
어린 초룡의 두개골이 왜 이곳에 있는가? 그것도 성체 못지않게 커다란 크기로?
―폐하, 그곳의 모든 것은 거짓이며, 오로지 폐하를 현혹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그만!”
왕은 외마디 일갈로 머릿속을 침투하는 환청을 막아냈다.
부들부들 떨면서, 왕은 오리할콘 두개골과 부러진 신살검을 번갈아 주시했다.
눈동자가 붉게 충혈되기 시작했다. 왕은 온몸의 힘을 끌어올려, 두 눈에 정신을 집중했다.
권능을 사용한 대가로, 지금 당장 이곳에서 튕겨져 나가도 좋다. 하지만 그전에 반드시 알아야겠다. 자신을 현혹하는 요망한 환영의 정체를.
통찰안이 발동하며, 그의 눈에 맺힌 붉은 기운이 황금색 광채로 변했다.
주변의 소음이 사라진 듯 들리지 않고, 모든 시간이 멈춰버린 듯이 느껴졌다.
고귀한 권능을 품은 두 눈동자는, 오리할콘 뼈와 부러진 검이 품고 있는 진실을 훑었다.
진실을 읽은 왕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순간, 주변의 모든 것이 순식간에 지워졌다.
“…….”
왕은 눈을 떴다.
자신이 알던, 익숙한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바로 왕의 침실이었다.
부스스 몸을 일으킨 왕은 조용히 허공을 응시했다. 시중을 들기 위해 들어온 시녀들이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몸을 숙였다.
시녀들이 뭔가 말을 걸었지만, 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넋이 나간 듯이 아무 말도 없이, 미동도 않은 채, 침실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그 소식은 삽시간에 왕궁 안으로 뻗어나갔다. 왕궁 전체가 왕을 걱정하는 근심으로 가득 차서 소란스러웠지만, 왕은 그마저도 느끼지 못하는 듯이 보였다.
“폐하.”
왕을 정적에서 꺼낸 것은, 귀에 익숙한 음성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왕은, 수정 지팡이를 짚고 로브를 입은 노신하를 볼 수 있었다. 수십 년 간 자신을 보필해온 충직한 인물이자, 왕비의 친아버지.
왕은 그를 바라보며 통찰안을 발동했다.
「―――――― ―― ―――.」
잡음이 낀 듯,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귀가 그의 이름을 인식 못하듯이, 통찰안의 권능도 그의 이름을 읽지 못했다. 정확히는 통찰안이 보여준 진실을, 자신의 정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저주의 후유증이옵니다, 폐하.’
전에 그가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저주가 숙성됨에 따라 기억이 차근차근 소멸하고 있는 것이라고.
단순히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소멸 그 자체로 돌아섰기에, 들어도 인식할 수 없고 보아도 읽을 수 없다 했다. 저주를 극복하기 전까지는.
“신료들이 근심하고 있습니다. 부디 건장한 모습을 보여 주시어,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주시옵소서.”
“…….”
왕은 아무 말도 않은 채, 물끄러미 노신하를 바라보기만 했다.
“흔들린 적은 있으되, 결코 부정한 적은 없었소.”
“……폐하?”
노신하가 의아한 음성으로 반문하며 고개를 들었다.
왕은 그의 눈빛을 똑바로 주시했다. 저도 모르게 시트를 쥔 주먹에 힘이 꽉 들어갔다.
“이곳 레노지안만이 진실이고 그곳은 저주가 만들어낸 허구의 공간이자 꿈이라는 것을, 한 번도 부정한 적은 없었단 말이오.”
“폐하.”
“그런데 어째서 이 세상에 단 하나만이 존재하는 신살검이, 그곳에 존재하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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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그것은 시공의 폭풍에 빨려들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가입하시면 카드팩 전원 증정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