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434화 (434/609)

00434  깨어난 군주  =========================================================================

H그룹은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한서진과 송하나의 약혼은 이미 재계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사실이었다. 덕분에 H그룹은 단순히 재계 1위가 아닌, 황제나 마찬가지 대우를 받고 있었다.

조금 과장하자면, 계열사 부장 앞에서 타 그룹 회장급 인사가 쩔쩔 맨다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

일례로, 칼라 칩으로 한국과 미국의 통신 시장을 석권한 H통신은 그 분야에서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거대 독점 기업이었다.

미국 내 다른 단말기 제조사들은 H통신에 굽실거리며 칼라 칩 시스템을 납품받아 자사 제품에 장착한다. 통신의 안정성, 그리고 고속 데이터 성능에서 칼라 칩의 발끝만이라도 따라가는 모델이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미국은 다른 단말기 제조사가 공존이라도 하지, 국내에서는 칼라폰이 시장의 95%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사실상 독점이었다.

재계 기업들 사이에서 H그룹은 절대 황제나 다름없었고, 큰 것에서부터 사소한 것 하나까지 모두 벤치마킹의 대상이었다.

단순히 경영 차원에서 따라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기업 운영의 지침서와도 같은 것이었다.

「여기는 SKK정유 화재 피해자 공동 분향소입니다. 총 8명이 사망하고 3명이 중상을 당한 안타까운 사고인데요, SKK그룹 회장이 임원들을 이끌고 직접 분향소를 찾아와 절을 하며 사죄의 뜻을 드러냈습니다.」

―회장직을 걸고, 다시는 이런 안타까운 사고가 없도록 안전성 보완에 철저히 대책을 세우겠습니다. 또한 모든 피해자 및 유족분들에게 회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보상을 약속…….

「여기는 H그룹 홍보실입니다. SKK정유 화재 사건을 접한 H그룹 홍보실은 SKK그룹이 여전히 구시대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경영한다며 의미심장한 멘트를 했는데요.」

―사실 제대로 된 안전 시스템을 갖추는 것보다 실제 사고가 났을 때 돈으로 떼우는 게 더 싸게 먹히긴 합니다. 하지만 그건 해서는 안 될 짓이죠. 아직도 그런 근시안적인 방식으로 경영하는 기업이 참 많다는 게 유감입니다.

―그리고 막상 사고가 나면 그 돈도 다 안 주려고 하고 질질 끌죠.

―우리 H그룹이요? H반도체 백혈병 피해자들이 원하는 보상의 딱 세 배를 해줬습니다. 그것도 질질 끌지 않고 즉시. 아, 물론 그룹 경영 방침을 전면적으로 수정한 이후이긴 합니다만, 어쨌든.

기업들은 회사에 무슨 사건이 터졌을 때, H그룹이 무슨 논평을 내놓는지를 두려워했다. 그리고 H그룹의 방침에 맞춘 수준으로 사건을 해결하고자 했다.

예를 들어 H그룹이 피해자에게 3억의 배상금을 지불한다면, 비슷한 경우와 규모의 사건 피해자에게 마찬가지로 3억의 배상금을 지불하는 식이다.

그보다 덜 내거나 무마하려고 하면, H그룹이 어떻게 귀신같이 알고 논평을 내놓는다. 소송으로 질질 끄는 것도 먹히지 않는다.

불과 작년, 재계 11위의 C그룹 화학계열사 신 공장 건설 중에서 큰 사고가 발생했다. C그룹 경영진은 보상보다는 공장 건설 재개에 더 큰 힘을 썼고, 피해자들은 잊혀졌다.

피해자들은 1심에서 승소했으나, C그룹은 1심 결과에 굴복하지 않고 항소심을 진행했다. 시간을 최대한 끌고 피해자들이 지치면 적은 금액으로 합의를 하겠다는 전략이었다.

그때 H그룹이 나섰다.

적대적 합병으로 C그룹의 핵심 계열사를 차례차례 빼앗은 H그룹은 곧바로 전면적인 감사를 진행했다. 그 과정에서 C그룹 전 회장과 임원들의 비리가 낱낱이 드러났고, 그들은 최하 5년 이상의 형을 확정 받고 재산을 몰수당했다.

C그룹 계열사는 H그룹에 모두 편입되었고, 화학공장 피해자들은 자신들이 요구했던 것의 정확히 세 배에 달하는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일이 있은 직후 기업들은 H그룹을 두려워하며 사내 정책 기준을 자사에도 맞춰서 적용하고 있었다. C그룹처럼 경영권도 뺏기고, 재산도 뺏기고, 감옥에 들어가기는 싫었으므로.

혼자 깨끗한 척 한다는 조용한 비난은 힘을 얻지 못했다.

한서진이 과거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며 큰 병을 얻었다가 기적적으로 완치됐고, H그룹 회장이 그로 인해 사람이 변했다는 아름다운 명분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었다.

H그룹이 재계의 바이블이 되자 가장 기분이 좋은 것은 백철중 회장이었다.

“하나야, 요즘 우리 예비 사위 얼굴 보기가 너무 힘들구나. 다음 주에 놀러 와서 같이 술 한 잔 하자고 전해주련?”

“안 돼요. 정밀검사 있어요.”

“뭐? 한 박사가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냐?”

일단 한 번 눈에 뜨이면, 사소한 것도 전부 걸리는 법이다.

니트론을 기점으로 한 주변인들은 한서진이 예전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말투나 태도 등의 사소한 어색함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아카식 블레이드 프로젝트 자체를 잊어버린 게 분명했고, 이상하게 그것을 숨기고 있었다.

다른 사람으로 바뀐 것은 아니다. 상식적으로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

때문에 의구심은 자연스럽게 정신적 질환으로 쏠렸다.

“여기에 문제가 생긴 건 확실하오.”

정지원과 구프게니가 득달같이 달려왔고,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니트론이 자신 있게 주장을 펼쳤다.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가리키는 모습에서 송하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약혼자의 머리에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말을 면전에서 듣고 있으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어때요? 항상 가까이 지내는 약혼녀야 말로 더 잘 알지 않겠소?”

니트론이 묻자 송하나는 작게 한숨을 뱉고는 대답했다.

“오빠가 분명히 뭔가 이상해요. 꼭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기까지 해요.”

“그렇게 느껴질 만큼 내면에서 뭔가가 결핍된 거지.”

니트론은 자기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젊은 나이에 벌써 노망이라니. 역시 하늘은 천재에게 모든 걸 주지 않으시는 건가.”

“…….”

송하나와 정지원의 표정이 살짝 변했지만, 니트론은 깨닫지 못하는 듯이 보였다. 구프게니가 그의 옆구리를 슬쩍 찌르며 만류했다.

“정확한 건 진찰을 해봐야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만나서 설득해보겠습니다.”

“정 대표님, 그냥 제가 물어보는 건…….”

“하나 양, 그런 민감한 건강 문제는 약혼녀에게 더 털어놓기 어렵죠. 제가 나서는 게 한 박사 마음도 편할 겁니다. 그 전에.”

정지원은 다른 이들을 돌아보며 다부진 음성으로 끝을 맺었다.

“한 박사가 주요 프로젝트에 더 이상 손을 대지 못하게 막아야 할 겁니다. 정상이 아닌 상태로 건드렸다가 자칫 훼손시킬 수도 있으니까요. 한 박사가 일찍이 우리에게 당부했던 것도 그런 취지에서일 거요.”

한서진의 대비는 제법 꼼꼼했다. 왕은 그것을 또렷이 느끼고 있었다.

연구 프로젝트에 관한 모든 기록은 패스워드 없이 접근이 불가능했다. 지문이나 음성, 홍채 인식 등의 방식이었다면 왕도 가능했을 것이다.

보안 체계는 왕의 의식이 깨어났을 때를 철저히 대비해서 짜여 있었다.

‘통찰안을 쓰면 해결된다. 하지만.’

동시에 이 세계에서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극도로 짧아진다.

마치 택일을 하라고 강요하는 듯한 각본에, 왕은 저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무력하게 시간만 허비할 것이냐, 아니면 단시간 내에 레노지안으로 돌아갈 것이냐.

그렇게 방법을 찾고 있을 때 정지원이 찾아왔다.

“오셨습니까.”

왕에게는 존대가 무척 낯선 것이었다. 태어난 이례 직계존속을 제외하고 존칭을 써본 적이 없었다. 왕위를 계승하고 레노지안에서 가장 고결한 존재가 된 이후부터는 그럴 일이 전혀 없었고.

“두루두루 일 처리할 게 있어서. 너한테 직접 결재 받고 싶은 일도 있고.”

“정 대표님의 재량껏 처리하면 됩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잘 하리라 믿습니다.”

“내 재량껏 처리하기에는 사안이 너무 막중해서 말이야.”

“…….”

왕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한두 해 사람을 다뤄온 게 아니다. 가장 고귀한 자리에 올라, 250억 명에 달하는 왕국 시민들을 다스려온 몸, 정지원이 품고 있는 예민한 기도가 느껴졌다.

“건강검진을 받는 게 어떨까? 받은 지 오래 됐잖아?”

“내 건강이 이상하다고 생각합니까?”

“설마 그럴 리가. 그냥 요 몇 년 간 과로에 너무 심하게 시달렸잖아. 젊을 때 미리미리 체크하자는 거지. 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당장 세상이 어떻게 되겠어?”

“…….”

“네 두뇌는 너 혼자만의 것이 아니야. 인류 전체의 축복이자 보물이다. 당연히 조심스럽게 아껴 써야지.”

왕은 보이지 않게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은 확실히 의심의 시선을 받고 있다. 아마 한서진이 준비해둔 것도 기여를 했으리라.

다행히 그 의심은 ‘어딘가 이상하다.’ 정도에 그치는 모양이었다. 적어도 레노지안이라든가, 다른 인격이 몸에 들어앉아 있다는 정도까진 아닌 듯했다.

물론 한서진이나 그들 입장에서나 다른 인격이지, 왕에게는 동일한 사람이자 본래 인격이었지만.

‘나름대로 대비를 해뒀군, 한서진.’

대견한 미소 따위는 지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일이 쉽지 않겠다는 난감함이 밀려왔다.

꿈속으로의 진입이 막힌 동안, 한서진의 대비책이 두터워졌다. 그것은 한서진이 이곳 꿈의 세상에 얼마나 집착하는지를 나타내는 방증이기도 했다.

한서진은 결국 꿈속 왕의 자아, 그가 꿈에 집착한다는 것은 저주가 완성을 향해 지속적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 아닌가.

왕은 쾌활히 대답했다.

“좋습니다.”

극도의 보안을 유지한 채, 진찰이 시작되었다.

종합검진을 표방하지만, 실제로 다른 신체는 가벼운 체크 정도만 하고 두뇌와 정신 건강 상태 확인에 집중했다.

의료진은 환자의 정확한 신원도 알지 못했다. 그저 극도로 중요한 VVIP 환자라고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한서진의 얼굴을 보거나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금지되었으므로.

머지않아 결과가 나왔다. 모든 게 정상이었다.

“아니, 이건 정상 정도가 아니라…….”

“역시 천재의 두뇌는 비범하군요.”

다각적으로 측정한 뇌 활동량 수치는 놀랍기 그지없었다. 그의 두뇌는, 비유하자면 잠시도 쉬지 않고 폭발을 일으키는 거대한 화산과도 같았다.

일반인의 것에 비교하면 그 활동량이 어마어마하게 컸으며, 조금도 멈추거나 느슨해지지 않았다.

“이것으로 여러분들이 걱정을 접을 수 있다면 다행이군요.”

왕이 웃음을 띠고 말하자, 니트론 등 최측근 인사들은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했다.

“아니, 이렇게 멀쩡하면서 그때는 왜 그랬소? 사람 간 떨어지게 말이오.”

니트론은 의심을 거의 떨친 얼굴이었다.

진단 수치가 정상 그 이상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으니, 더 이상 걱정할 게 없었다.

“교수님, 내일 따로 조용히 봤으면 좋겠습니다.”

“나를?”

“실은 에테르의 새로운 활용법을 찾았습니다. 교수님께 진지한 검증을 받고 싶군요.”

“오, 그게 정말이오?”

니트론은 더 이상 의심하지 않은 채, 오히려 뛸 듯이 기뻐하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그런데 진지한 검증이라니? 무슨 뜻입니까?”

“너무 놀라운 현상이어서요. 교수님도 직접 보면 아마 섣불리 믿지 못하실 겁니다.”

“호, 그 정도입니까?”

왕은 조소를 머금었다. 이 늙은 학자는 노신하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다. 맛있는 지식의 먹이를 눈앞에 두면, 함정인 줄 알면서도 스스로 걸어 들어오게 된다.

“마법이라고 오인하실 정도입니다.”

============================ 작품 후기 ============================

끝났어. 니트론은 이미 틀렸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