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33 깨어난 군주 =========================================================================
현재 미군 기지에는 Table A의 초대형 연구 선박이 두 척 정박하고 있다. 각각 오리할콘 뼈, 아카식 블레이드를 싣고 제주도를 찾은 개체들이다.
오리할콘 뼈가 먼저 제주도에 도착했고, 그 뒤에 아카식 블레이드가 도착했다. 그 직후 연구팀은 오리할콘 뼈를 2번 연구함으로 이전해서 연구를 계속했다.
지금은 편의를 위해서 두 가지를 같은 함에 모아서 연구를 진행 중이었다.
당연히 1번 연구함에 있던 자료도 모두 2번 연구함으로 이전했으며, 지금 1번 연구함은 텅 빈 채로 대기 중이었다. 만약을 위해서 아직 철수하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니트론은 ‘한서진’을 비어 있는 1번 연구함으로 안내했다.
“공교롭게도 지금은 아무도 없군요. 점심시간도 아닌데…… 다들 잠시 머리를 식히러 갔나 봅니다.”
데이터 자료를 이전하긴 했어도, 설비시설 자체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때문에 겉으로 보이는 연구실 풍경 자체는 그럴싸했다.
거대한 크레인과 로봇 팔, 수십 개 이상의 구획으로 분할 된 각종 밀폐 작업실은 Table A가 온 역량을 쏟아 부어 만든 초대형 최첨단 연구함다운 위용을 자랑했다.
‘한서진’은 가동 중인 중앙컴퓨터 앞에 선 뒤 자료를 탐색했다.
‘아무것도 없다?’
잘못 짚었나?
왕은 순간 아차 싶어서 니트론 교수를 확인했다. 그의 표정에서 크게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놀리듯이 말했다.
“여기에 뭐 남아 있는 데이터 있나 혹시 감사라도 하러 온 거요? 난 한 박사가 왜 또 이곳으로 오자고 했는지 의아했군.”
“빠뜨린 게 있는 것 같았는데, 아니군요.”
“연구 자료는 한 박사 지시대로 2번 함으로 다 옮겼소. 우리가 실수로 빼먹은 건 없으니까 너무 빡빡하게 감사할 필요는 없어요. 안 그래도 철야를 밥 먹듯이 하면서 연구에 매달리는 공돌이들인데, 이거 너무한 거 아니오?”
“그럴 뜻은 없었습니다.”
왕은 아무렇지 않게 미소 지으며 무난히 그 순간을 넘겼다.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에게서 떨어지는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이 둘의 표정이 동시에 경직되었다.
‘실수했군. 문제가 커지면 곤란한데.’
‘한 박사…… 갑자기 왜 저러는 거야?’
니트론은 차마 뒤에서 따라오는 ‘한서진’을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이마에는 보이지 않게 식은땀이 맺혔다.
‘정말 한 박사가 맞긴 한가?’
니트론은 한서진을 2번 연구함으로 안내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아무리 봐도 한서진의 태도가 이상했던 것이다.
먼저 그가 직접 정한 규칙, 그가 ‘아카식 블레이드’란 단어를 언급한 후에야 일체의 관련 논의를 시작하자고 제안한 것을 지키지 않았다.
아니, 자신이 그런 규칙을 정했다는 것 자체를 잊어버린 듯이 보였다.
다섯 개의 연구실이라는 터무니없는 언급을 했을 때에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심지어 1번 연구함으로 안내하는 동안에도 내내 의문을 보이지 않았다.
정박 위치만으로도 1번 연구함인지 2번 연구함인지 대번에 분간이 되는데, 그는 아무렇지 않게 여겼던 것이다.
그가 보인 일체의 행동을 보면, 이건 마치 아카식 블레이드와 오리할콘 뼈 연구에 얽힌 모든 것을 잊어버린 듯이 보이지 않는가.
‘다른 사람일 리가 없다.’
니트론은 거듭해서 자신의 추정을 확신했다.
다른 사람이 한서진으로 위장한다? 어설픈 분장으로는 금방 들켜버리고 만다. 무슨 수로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 있겠는가.
설령 위장 자체가 완벽하다 해도, 경호의 시선을 피해 바꿔치기를 한다는 게 가능할까? 미국이나 러시아가 나선다 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 자신이 대하고 있는 인물은 한서진 본인이 맞다. 적어도 껍질은 그러하다.
그렇다면?
‘알츠하이머? 일시적 기억상실? 아니면 다중인격장애?’
차라리 그런 쪽으로 의심하는 게 합리적이리라. 그러나 그런 추정은 한편으로 다른 불안함을 낳는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큰일 나겠어.’
한서진의 두뇌는 인류 전체의 보물이나 다름없다. 몇 년도 안 되는 사이에 그는 비약적인 발견을 거듭 이뤘다.
에테르 반도체, 수퍼컴퓨터, 정확한 날씨 예측 모델, 간 재생 치료제와 탈모· 무모증 치료제, 우주 자원의 채굴 등 헤아릴 수 없는 업적을 해냈다.
그런 위대한 인물의 정신에 문제가 생겼다면, 온 세상이 발칵 뒤집힐 것이다. 당장 미국 전체가 비탄과 경악에 잠길 것이고, 전 세계 증권시장이 난리가 날 것이다.
어쩌면 세계적인 대공황이 찾아올 수도 있다. 한서진의 정신적 질환은 충분히 그런 일을 불러올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였나?’
니트론은 한서진이 처음 규칙을 제안했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는 참 희한한 일을 벌인다고 웃어넘겼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한 박사는 이미 알고 있었구나.’
니트론은 그렇게 확신했다. 한서진은 이미 자신의 질환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그래서 그런 희한한 규칙을 만들었던 것이리라. 그리고 그 이유는 아마도…….
‘자기 손으로 프로젝트를 망치는 걸 막으려 했던 거군.’
알츠하이머, 다중인격장애, 그 어느 쪽이든 간에 자신이 연구 프로젝트를 망칠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 틀림없다.
오늘 겪었던 일을 차분히 복기한 니트론은 자신의 생각이 틀림없다고 결론지었다.
‘일시적인 건지 아닌지, 정도가 얼마나 심한지는 모르지만…….’
니트론은 주먹을 불끈 쥐며 마음을 굳게 다졌다.
‘내가 노망이 들어도 그랬겠지.’
한서진이 왜 직접 말을 못하고 그런 식으로 에둘러 대비했는지, 그 마음은 이해될 것 같았다. 자신 같았어도 비슷한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혹시나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섣불리 놓기 힘들었으리라.
‘걱정 마시오, 한 박사. 우리가 힘을 합쳐 돕겠소.’
니트론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한서진’은 2번 연구함을 보지 못한 채 서울로 돌아갔다.
니트론은 그를 돌려보내자마자 곧바로 비상 회의를 소집했다. 회의 멤버는 자신, 구프게니, 그리고 정지원이었다.
자신과 구프게니는 Table A의 수장이자 실권자로서, 그리고 정지원은 ‘심신상실’ 상태인 한서진의 의사표현을 대리할 후견인 자격으로서.
“큰일났소.”
회의는 화상회의로 진행되었다. 세 명 모두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칼라 네트워크망을 이용한 통신이기에 해킹을 당할 우려는 없었다.
“한 박사의 여기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소.”
니트론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툭툭 치면서 말하자 구프게니와 정지원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어디 다치기라도 한 겁니까? 그런 말은 못 들었는데요.」
「뇌 관련 질환입니까?」
구프게니의 질문에 이어 정지원이 침착히 물었다.
니트론은 가볍게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의사가 아니라서 잘 모르지만 알츠하이머나 기억상실, 다중인격장애, 뭐 그런 쪽의 질환인 것 같소.”
「…….」
「……그런 말도 안 되는.」
“자신이 누군지 자각은 있지만, 아카식 블레이드 프로젝트에 관한 걸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소. 최소 지난 1, 2년 동안 있었던 굵직한 사건들을 잊어버린 듯하오.”
「그래서 그런 기이한 제안을 했던 거군요.」
「그럼 본인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거 아닌가요?」
분위기가 대번에 침통해졌다.
특히 구프게니의 얼굴에 떠오른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깊었다.
Table A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주를 이루고 있는 지식을 밝히는 것이다. 그 염원을 개척해줄 선장의 정신에 문제가 생겼다니, 하늘이 무너진 듯한 좌절감을 맛볼 수밖에.
「왜 우리에게 미리 털어놓지 않으셨을까요?」
“구프게니, 자네라면 내가 노망이 난 것 같다는 걸 섣불리 털어놓을 수 있겠나? 게다가 아직 확진이 난 것도 아닌데 말이야.”
「노망이라고 단정하시면 곤란합니다, 니트론 교수님.」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정 대표. 적어도 한 박사의 정신이나 인격에 문제가 생긴 건 확실합니다. 내가 오늘 지켜보고 알았습니다.”
「한 박사가 혹시 다른 의도를 가지고…….」
“그 사람이 나한테 그런 장난을 칠 사람입니까? 무슨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어요.”
니트론은 강하게 자신의 뜻을 밝혔고, 정지원은 더 이상의 항변을 하지 못했다. 구프게니와 니트론도 정지원의 그런 마음만큼은 이해했다.
한서진이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니, 누구라도 인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일단 정확한 진단을 받아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안 됩니다. 괜히 관련 사실이 흘러나가면 한국과 미국, 아니 전 세계가 패닉에 빠집니다.」
「정 대표, 하지만 이대로 놔둘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더 악화될 수도 있어요.」
「그래도 섣부른 진단은 위험합니다. 의사의 입을 믿을 수 없습니다.」
원래 의료인은 환자의 정보를 비밀로 지켜야 한다. 그러나 환자의 사회적 지위, 그리고 그로 인한 파장이 워낙 크다 보니, 섣불리 믿고 맡길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
진찰 문제를 놓고 입씨름을 하던 중 구프게니가 문득 말했다.
「그런데 한 박사님이 우리한테만 그런 귀띔을 하셨을까요? 어쩌면 송하나 양이나 백철중 회장님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지 않을까요?」
“그건 알 수가 없지. 이거 난감한데. 그렇다고 우리가 섣불리 떠볼 수도 없고.”
‘곤란하군. 의심을 산 것 같은데.’
서울 세연동 저택으로 귀가 중인 왕은 내내 찝찝한 마음을 떨치기 어려웠다.
니트론은 크게 표시를 내지 않았으나, 왕은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행동에 어떤 의아함을 품었음을.
과연 뭐가 잘못되었을까? 짚이는 게 워낙 많다 보니 왕은 선뜻 단정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통찰안을 사용해서 확인할 수도 없었다. 권능의 남용은 꿈의 세상에 머무는 시간을 줄여버릴 수 있기 때문에.
‘꿈속의 짐이여, 무방비하게 있지만은 않았구나.’
분명 제주도에 ‘아서 왕’이 알아선 안 될 어떤 게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니트론을 위시한 이들의 철저한 통제를 받고 있으리라.
니트론이 의아함을 품은 지금, 그 ‘어떤 것’에 접근하기가 어려워졌다. 이미 한서진이 그들에게 어떤 조치를 취해 놓은 것으로 짐작된다.
‘권능을 사용하면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지만…….’
그랬다가는 자칫 꿈에서 튕겨져 나갈지도 모른다. 왕은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두기로 하고, 그동안은 다른 길을 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오빠.”
저택에 도착하니 기다리고 있던 송하나가 반갑게 맞이했다.
바로 한서진의 약혼녀, 그녀를 보는 왕의 마음은 다소 씁쓸할 수밖에 없었다.
“폰에 무슨 문제 생겼어요? 제 톡 메시지, 읽고 대답 안 하시던데.”
“바쁜 일이 있어서.”
왕은 어색하게 한서진의 말투를 흉내 냈다. 니트론에 이어 송하나까지 의심하게 되면 곤란하다.
꿈의 공백이 워낙 크다 긴 탓에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너무해요. 전 언제 연락 오나 계속 기다렸는데.”
“미안하다.”
“그렇게 큰 문제였어요? 저한테 잠깐 대답도 못해주실 만큼?”
“조금.”
송하나는 내내 서운했던지 이것저것 열심히 캐물었고, 왕은 기억을 짜 맞춰서 대답했다.
“다음부터는 그러시면 안 돼요. 알겠죠?”
“알았다. 약속할게.”
손가락까지 걸고 약속을 나눈 뒤, 송하나는 그를 씻으라고 위층으로 올려 보냈다.
그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던 송하나는 이윽고 한숨을 내쉬고는 니트론에게 연락했다.
“교수님 말씀이 맞아요. 오빠 지금 뭔가 이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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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이렇게 의심받게 하려는 한서진의 빅픽쳐입니다?